예술 분야 간의 경계를 무너트리고 범위를 확장시킨 포스트 모더니즘. 그 영향을 받은 패션은 디자인뿐만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도 다양한 예술 영역을 넘나들며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뮤지엄까지 장악했다.

루이 비통의 빈티지 트렁크를 만날 수 있는 전시 .

루이 비통의 빈티지 트렁크를 만날 수 있는 전시 <비행하라, 항해하라, 여행하라>.

 

바야흐로 우리는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 몇 초의 짧은 영상이 더 큰 파장을 일으키는 비주얼 시대에 살고 있다. 게다가 그마저도 수많은 정보가 무분별하게 쏟아져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 기 때문에 단순한 옷이 아니라 그 안에 가치, 환상 그리고 비전까지 담은 ‘오브제’를 선보이는 패션 브랜드들은 고객과의 소통을 위해 전시에 관심 을 갖기 시작했다.

패션 전시는 특정 공간(Space) 안에서 패션 오브제(Fashion Objet)와 메시지(Message)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스토리(Story)를 만드는 매우 섬세한 작업이다. 건축적인 요소, 작품으로서의 옷, 관람자의 동선과 그 에 따른 감정의 흐름과 변화, 빛과 그림자, 음향 효과 등도 정확하게 계산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2008년 홍콩을 시작으로 세계 를 순회한 샤넬의 <모바일 아트 파빌리온(Mobile Art Pavilion)>, 2009 년 서울 경희궁에서 열린 프라다의 <웨이스트 다운(Waist Down)>, 2011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알렉산더 맥퀸 : 새비지 뷰티 (Alexander McQueen: Savage Beauty)>나 모스크바 푸슈킨 미술관의 <인스피레이션 디올(Inspiration Dior)> 등과 같은 굵직한 패션 전시는 21세기 문화 예술 분야에서 큰 이슈가 되었다. 이들은 패션 전시에 모바 일이라는 동시대 화두를 담았고, 움직이고 변형하는 건축이라는 실험정 신을 더했으며, 천재 디자이너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이라는 감정을 표현 하는 등 매일 입는 옷이 역사가 되고, 감동이 되며 미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문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2011년 메트로폴리탄 뮤지 엄에서 알렉산더 맥퀸 전시를 기획하고 총괄한 큐레이터 헤롤드 코다 는 패션 전시가 가진 의미를 이렇게 이야기했다“.생 존을 위한 필수 조건 으로 시작했던 의복은 이제 예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경지에 이 르렀다. 패션은 디자이너의 개인적인 취향을 넘어 문화, 경제, 정치적인 의미를 지니며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 보다 의미 있고 개념적인 전시 는 관람객이 자유롭게 시대를 넘나들게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 생각 한다. 예를 들면 18~19세기 작품들이 컨템퍼러리 디자이너의 최근 컬렉 션과 나란히 전시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패션 브랜드가 준비하는 지 극히 상업적인 전시들 중 지금까지의 흐름을 문화사조 또는 굵직한 사 건들과 접목하거나, 역사에 남을 만한 디자이너의 작업 스킬을 연구하는 등의 기획은 훌륭하다.” 즉 전시를 통해 패션의 상업성과 예술성의 공존 을 확인하며, 더 나아가 패션이 담고 있는 문화와 사회적인 메시지를 고 찰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패션 하우스들이 예술가와의 협업에서 그치지 않고, 예술 재단을 만들어 예술가를 후원하고 전용 극장이나 전시 공간을 만들어 공연과 전시를 기획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아르마 니와 돌체앤가바나는 전용 극장을 만들어 공연과 전시를 기획하고 있고, 까르띠에는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을, 프라다는 폰다지오네 프라다를,생로랑은 피에르 베르제-입생로랑 재단을 통해 동시대 아티스트들의 작 업을 후원하고 전시하는 문화 재단을 직접 설립해 운영하는 등 패션과 예술의 교류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이달 주목할 만한 글로벌 패션 전시 두 개가 서울에서 열린다. 먼저, 서 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6월 8일부터 27일까지 열리는 루 이 비통의 <비행하라, 항해하라, 여행하라 – 루이 비통(Volez, Voguez, Voyagez – Louis Vuitton)>. 패션 전시의 대가로 알려진 큐레이터 올리 비에 사이야르가 기획해 더욱 주목을 받는 이번 전시는 ‘여행’을 화두로 1854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브랜드의 DNA를 되돌아보는 콘셉트를 담 고 있다. 브랜드의 방대한 아카이브에서 찾은 대표적인 앤티크 트렁크로 시작해 다양한 오브제와 문서, 파리 의상장식박물관 소장품 및 개인 컬렉 션을 거쳐 마지막으로 루이 비통의 장인정신에 헌정하는 의미를 담아 장 인들이 직접 시연을 펼치는 공간으로 마무리되도록 동선을 구성했다. 두 번째는 에르메스의 <원더랜드, 파리지앵의 산책>, <YOUTH – 청춘의 열병, 그 못다 한 이야기> 등을 함께하며 패션 전시 공간으로 익숙한 한 남동 디뮤지엄에서 6월 23일부터 7월 19일까지 선보이는 샤넬의 <마드 모아젤 프리베(Mademoiselle Prive)>이다. 지난 2015년 10월 런던에 서 샤넬이 창조한 세계의 영감의 원천과 근원을 둘러보는 흥미로운 여정 으로 성황리에 치러졌던 전시를 런던에 이어 서울에서 선보이는 것이다. 새로운 콘셉트가 더해진 이번 전시에서는 브랜드 고유의 독창적인 작업 과정을 보다 강조하며 칼 라거펠트가 재창조한 오트 쿠튀르, 샤넬 No.5 향수, 1932년 가브리엘 샤넬이 손수 디자인한 유일무이한 하이주얼리 컬 렉션 비주 드 디아망(Bijoux de Diamants)의 리에디션 작품 등 마드모 아젤 샤넬의 대표적인 창작물들을 주로 전시할 예정이다. 가브리엘 샤넬 과 칼 라거펠트의 카리스마 넘치는 개성과 자유로운 반항 정신을 포착한 이번 서울 전시에서는 디지털 강국답게 디지털의 역동성을 강조할 것이 라고 관계자가 귀띔한다.

 

2 런던 패션&텍스타일 뮤지엄에서는 전이 열린다. 3 레이 가와쿠보와 꼼데가르송의 예술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전시 . 5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건축적인 재단미에 초점을 맞춰 기획한 전시 . 6 디뮤지엄에서 공개되는 샤넬의  전시. 7 밀라노에 위치한 프라다의 폰다지오네 프라다에서는 다양한 현대미술 전시가 열린다.

1 런던 패션&텍스타일 뮤지엄에서는 전이 열린다.  2 밀라노에 위치한 프라다의 폰다지오네 프라다에서는 다양한 현대미술 전시가 열린다. 3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건축적인 재단미에 초점을 맞춰 기획한 전시. 4 디뮤지엄에서 공개되는 샤넬의 <마드모아젤 프리베> 전시.  5 레이 가와쿠보와 꼼데가르송의 예술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전시 <ReiKawakubo/Comme des Garcons Art of the in-Between>.

 

해외 나갈 일이 있다면 들러봐야 할 전시도 있다.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 트 뮤지엄에서는 내년 2월 18일까지 <Balenciaga: Shaping Fashion> 을 개최한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건축적인 재단미를 확인할 수 있는 100여 점의 의상을 비롯, 유명 사진가들이 촬영한 화보 사진 등을 만날 수 있다. 런던 패션&텍스타일 뮤지엄에서는 10월 1일까지 <The World of Anna Sui>를 전시한다. 디자이너 안나 수이의 로큰롤 로맨틱 스피릿에 영감을 주는 역사적인 순간들과 안나 수이가 창조한 텍스타일 에 중점을 둔 기획이 독특하다. 매년 굵직한 패션 전시로 전 세계 패션 마 니아를 불러 모으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는 <Rei Kawakubo/ Comme des Garcons Art of the in – Between> 전시가 성황리에 열 리고 있다. 오는 9월 4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는 디자이너 레이 가와쿠보 의 아방가르드한 패션 세계를 보여주는 140여 점이 전시된다. 1980년대 초반부터 최근에 이르는 꼼데가르송 의상들이 선보이는데, 각각의 의상 과 함께 유명 헤어 스타일리스트 줄리앙 디스가 완성한 가발 역시 흥미 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오늘날 패션 전시에 대중이 열광하는 이유에는 고가의 옷이 오차 없이 반듯하게 걸려 있고, 들어서자마자 매장 직원의 시선을 받게 되는 부티크 보다는 갤러리의 문을 여는 것이 더 부담 없이 느껴지는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패션 하우스 입장에서도 패션 전시는 브랜드의 유산을 단순한 ‘옷’이 아니라 ‘예술’로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니, 앞으로 더 다양 한 시각으로 큐레이팅된 패션 전시가 줄을 이을 것은 확실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