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에 재회해 울고 웃다 끝날 줄 알았더니 파리 컬렉션 도전? 어느새 50대가 된 90년대 언니들의 도전을 응원하는 이유.
이 소녀는 자라서 대한민국 예능을 접수합니다

홍진경 하면 떠오르는 옛날 유머가 있다. 한 소녀가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있는데 창문을 똑똑똑 두드리는 누군가, 열어 보니 모르는 할머니가 히~ 소리를 내며 웃고 있다. 그런데 소녀의 집은 아파트 2층. 두려움에 떨면서 다시 공부를 하는데(하여간 공부 공부 하던 시절이었다), 또 다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공포에 질린 소녀가 “할머니 대체 누구세요?” 소리 지르자 돌아온 답은? “롱다리~ 롱다리~!”
오싹오싹 공포 괴담과 깔깔깔 시리즈의 콜라보. 1993년 <특종 TV연예>에 출연한 고등학교 1학년 홍진경은 임백천, 이경규 사이에서 롱다리 시리즈를 들려주는 재간둥이였다. 제2회 슈퍼모델대회에서 ‘베스트 포즈상’을 받았던 그의 장래희망은? “포즈 잘 취하는 개그맨이요.”

90년대 슈퍼모델들의 귀환, 소라와 진경

두 사람이 15년 만에 만났다는 <소라와 진경> 예고편을 보고 그 시절 방송국을 휘어 잡은 톱스타들의 모임이 떠올랐다. 그리운 배우 최진실부터 코미디언 이영자와 정선희, 가수 엄정화, 그리고 모델 이소라와 홍진경. 그러니까 이 방송은 한때는 친했지만 지금은 어색해진 셀럽들의 ‘절친노트’인가?
그런데 웬걸. 뚜껑을 열어 보니 90년대 언니들의 ‘무(모)한도전’이었다. 유행은 돌고 돌아 다시 90년대를 소환했고, 시절은 바뀌어 다양한 연령의 모델들이 쇼에 서는 시대. 방송국 녀석들은 1세대 K슈퍼모델도 지금 파리 컬렉션에 설 수 있다며 두 사람을 꼬여내는 데 성공했다.
<핑계고> ‘가짜의 삶’ 편에서 밝힌 대로 한때 홍진경은 대기실을 같이 썼던 동갑내기 톱스타에게만 몰린 기자들의 관심에 울컥해 느닷없이 유학을 발표했고, 파리행 비행기를 탔다가 소득 없이 3개월 만에 돌아왔다(그리고 방송에 전념했다). 마지막으로 패션쇼에 선 것도 무려 20년 전. 그런데 한국 나이 ‘쉰’에 파리 컬렉션에 도전한다고?

막막하기는 슈퍼모델 1회 우승자 이소라 역시 마찬가지다. 20대에 밀라노에서 러브콜을 받았지만 10kg을 빼지 못해 결국 가지 못했고, 십 수 년 전 대퇴부 골절 이후 워킹마저 두려워하게 된 58세. <무한도전> 노홍철과 정준하의 해외 컬렉션 도전은 무한짤을 생성하며 웃음을 주었지만, 90년대 패션계를 주름 잡은 언니들에게는 망신만 당할까 두려운 도전이었다.
그때는 핫했고, 지금은 올드하다?

무대로 돌아온 스타들의 도전을 응원하게 되는 시작은 현역으로 활동 중인 후배들 앞에서 작아지는 (남일 같지 않은) 모습을 볼 때다.
<무한도전>의 여름 겨냥 혼성 그룹 프로젝트 ‘싹쓰리’로 돌아온 이효리는 지코에게 수차례 물었다. “너무 올드하니?” 그런가 하면 김완선은 <댄스가수 유랑단>에서 만난 화사에게 데뷔 초에 자신을 닮았다는 말에 실망하지 않았는지 묻기도 했다. 1986년에 데뷔한 K팝 시조새가 남긴 어록은 두 개. 연하를 만나라는 말에 “애가 왜 나한테 왜 오겠니?”, 대학 축제를 다니라는 말에 “불러줘야 가지!”였다.

잔뜩 움츠러들기는 이소라와 홍진경도 다르지 않다. 실컷 포트폴리오를 만들었지만 프린트를 파일에 끼워 만든 ’북’은 요즘 모델들은 본 적 없는 유물. 중간 턴을 하고 엔딩 포즈로 윙크를 하는 이소라의 워킹은 현역 후배뿐만 아니라 홍진경도 놀란 옛 스타일. 올드하다고? 늙었다고? 너희들은 안 늙을 줄 아니?
하지만 롱다리라는 말로는 부족한 신인류의 워킹은 그 시절과 확연히 다르고, 확실히 젊다. 유튜브를 2배속으로 보는 세대라 그런가, 성큼 성큼 내딛는 걸음은 뛰는 것처럼 빠르다. 어지러울 정도로 너무 많은 것이 변한 탓에 두 언니는 후배들의 말을 가끔 의심한다. 프로필 사진을 그냥 벽 앞에서 핸드폰으로 찍는다고? 에이 거짓말!?
나이는 숫자, 연륜이 진짜!

<소라와 진경> 2화에서 서울컬렉션에 간 두 사람은 우연히 한국 1세대 패션 디자이너 진태옥 ‘선생님’을 만났다. 이소라는 슈퍼모델 대회 전 진태옥 쇼에 섰고, 홍진경은 첫 쇼는 물론 첫 해외 무대도 (케이트 모스와 함께) 진태옥 쇼였던 인연.
1993년, 한국 디자이너 최초로 파리 프레타포르테의 문을 열었을 때 진태옥의 나이는 60. 적지 않은 나이에 도전하는 일이 두렵지 않았는지 물었을 때 93세의 현역 디자이너는 말했다. “프로들은 나이가 없어요.” 백스테이지에서 후배들의 쇼를 보며 “너무 이모야 우리, 엄마인가?” 말했던 홍진경의 뒤통수를 때리는 답변. 여전히 매일 아침 출근길이 설레는 디자이너는 두 사람을 이렇게 격려했다. “가요, 가세요. 인생 자체가 끝나는 날까지 도전이에요.” 내면에 쌓여 있는 자산과 연륜으로 모델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이다.

알려진 대로, 홍진경은 지난 파리 컬렉션 쇼에 올랐다. 다른 모델들이 파리에 초대 받아 진출했을 때, 내돈내산으로 간 파리에서 벤치 노숙까지 했던 20대의 홍진경은 상상할 수 없는 50대의 시작. 웃기기만 한 줄 알았던 ‘공부왕 찐천재’의 본업 모먼트는 웃음기 없이 감동적이었다. 그의 롤모델 진태옥 선생님의 말씀처럼 프로는 나이는 없고, 인생은 끝나는 날까지 도전. 90년대 슈퍼모델 언니들의 도전이 계속되기를 응원한다. 나이는 숫자, 도전은 기세, BAAAAA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