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혜의 섬 제주에는 돌도 바람도 많지만, 입 안을 화려하고 풍성하게 감싸는 파인 다이닝도 즐비하다. 신선한 제주 식재료를 무궁무진하게 탐닉하는 지금의 제주 미식.


FINE CULINARY
제주국제공항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제주시 아라이동의 어느 한적한 골목에는 따뜻한 색감의 작은 벽돌 건물이 한 채 자리하고 있다. 언뜻 보면 평범한 주택 같지만, 자세히 보면 주차 공간과 연결된 자그마한 입구를 제주 현무암으로 꾸민 이탈리안 레스토랑 더스푼(The Spoon)이다. 지금은 추억 속으로 사라진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의 프렌치 레스토랑 테이블 34(Table 34)와 한때 청담동 미식계를 주름잡던 셰프 이재훈의 정통 이탈리안 레스토랑 뚜또베네(Tutto Bene)에서 근무한 더스푼의 오너 셰프 박기쁨은 제주의 특색 있는 재료를 통해 이탈리아 전역에서 전개되는 다양한 테크닉의 요리를 선보인다. 신선한 제주 식재료를 공수하기 위해 거의 매일 동문시장을 찾는다고. “고향에 있는 내 식당. 왠지 기분 좋아지는 말이에요. 행복해요.” 성게알과 어란을 곁들인 비스큐 스파게티를 내놓으며 그가 말했다. 2016년, 서울 생활을 접고 친누나와 의기투합해 시작한 레스토랑은 9년째 순항 중이다. 욕심 많던 초창기와 달리, 노련해진 지금은 매력적이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플레이트를 완성하기 위해 재료와 레시피 사이 균형을 맞추는 데 온 신경을 쏟는다. 나는 갓 구워 따뜻한 명란 타르트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바삭한 페이스트리 타르트 사이로 부드러운 마스카포네치즈와 약간의 알싸함이 남아 있는 달달한 대파, 짭짤한 명란이 폭죽처럼 알알이 터졌다.
이른 아침,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피해 제주시 월평동 중선농원에 있는 한국 바리스타 챔피언 김사홍의 커피템플(Coffee Temple)을 찾았다. 이른 시간인데도 사람이 북적이는 이 핸드드립 전문 카페는 제주에서만 만날 수 있다. 새콤달콤한 복숭아와 베리, 밀크초콜릿의 풍미, 화사한 꽃향기를 담은 원두로 내린 따뜻한 라테를 한 모금 마셨을 때, 이렇게 보드라운 입자의 라테를 맛본 적이 있는지 생각했다. 커피의 여운을 간직한 채 섬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한림의 어느 한적한 골목에 우두커니 선 유동룡미술관에 도착했다. 방주교회, 포도호텔, 수·풍·석 미술관 등 조형의 순수성과 물성의 본질을 탐구한 건축가 이타미 준의 삶과 작업을 집중 조명하는 전시 <미묘하게 열린 어둠 안에서>가 한창이었다. 전시를 둘러보고 1층 티하우스에서 창밖에 내리는 비를 감상하며 따뜻한 제주 녹차를 마셨다.
마치 호랑이가 웅크린 듯한 형상의 범섬이 내다보이는 서귀포시 호근동 해안가에 들어선 JW 메리어트 제주 리조트&스파는 제주의 땅과 하늘, 바다를 고스란히 담아 안락한 휴식을 누리기에 충분해 보였다. “저희 레스토랑에서는 셰프들이 제주 콩으로 직접 담근 장을 사용해요.” JW 메리어트 제주에서 마케팅을 담당하는 정인주가, 리조트 로비에서 7층에 위치한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더 플라잉 호그(The Flying Hog)로 향하는 길 중간중간 놓인 수많은 장독대를 가리키며 뿌듯하다는 듯 말했다. 본격적인 코스가 시작되기 전, 헤드 셰프 제이든(Jaden)이 활활 타오르는 불이 있는 주방에서 나와 레스토랑에 대해 설명했다. “불과 제로 웨이스트. 더 플라잉 호그의 코어한 콘셉트입니다.” ‘라 리스트 2025’에 선정되기도 한 더 플라잉 호그는 참나무와 제주 귤나무를 활용한 우드파이어 그릴로 제주의 구이 요리뿐 아니라 모든 코스의 식재료에 거칠고 투박한 훈연의 풍미를 더한다.
아뮈즈부슈와 식전 빵을 제외하고도 무려 7코스를 내보이는 시그너처 코스는 내내 황홀했다. 자연석 위에 제주 곳곳에서 영감 받은 한 입 거리를 올린 아뮈즈부슈는 독창적이었고, 화로에 구운 귤을 그리스식 피타 브레드 사이에 무염 버터와 함께 끼워 먹는 식전 빵은 달콤쌉싸름해 입맛을 돋우기에 제격이었다. 제주 딱새우를 참외채와 곁들여 식감과 향이 풍부한 애피타이저를 거쳐 쫄깃한 제주 오리 다릿살과 보드라운 채끝 등심, 훈연한 제주 흑돼지 오겹살을 차례로 맛봤다. 많은 고객의 요청으로 다시 내기 시작했다는 우유 아이스크림을 얹은 수플레 팬케이크는 입에 넣자마자 스르르 녹았다. 모든 요리는 드라이한 화이트와인과도, 탄산이 톡톡 퍼지는 샴페인과도 두루 어울렸다.
여전히 해가 보일 듯 말 듯한 우중충한 날,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다 보니 어딘가 미묘한 분위기의 표선해수욕장을 지나 해비치 호텔&리조트 제주에 도착했다. 올해 설립 10주년을 맞은 해비치의 프렌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밀리우(Milieu)는 파인 다이닝 불모지였던 제주 최초의 프렌치 레스토랑이다. 호텔동 로비 한가운데에 탁 트인 오픈 키친을 보유한 밀리우는 잘 가꾼 식물에 둘러싸여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활기찬 주방의 모습을 관찰하고 싶어 대나무를 짜서 만든 코쿤형 개별 룸 대신 바 좌석을 택했다. 주문이 들어오자 총괄 셰프 김중한의 지시에 따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주방은 음식을 대하는 밀리우의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모든 코스는 제주 제철 식재료에서 영감 받아 구성합니다.” 바쁜 와중에도 불편한 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바 테이블로 다가온 그가 웃으며 말했다. 코스의 모든 플레이트에서는 프렌치의 클래식함이 돋보였다. 특히 데친 제주 유기농 아스파라거스 위에 그라나파다노 치즈와 미모사, 사바용을 곁들인 채소 요리는 부드러운 맛은 물론, 아름다운 플레이팅으로 눈까지 즐거웠다. 내가 맛본 봄 시즌 코스에는 아쉽게도 빠졌지만, 6월 시작되는 여름 시즌 코스에는 김중한이 꼽은 밀리우의 시그너처 플레이트인 생선 요리가 포함된다. 여름에는 도미, 겨울에는 방어를 바다 소금과 백된장으로 마리네이드해 감칠맛을 살리고, 레몬 소스와 바질 오일로 산뜻한 균형을 맞춘다.
한편, 제주 미식은 최근 국제적으로도 주목받는 중이다. JW 메리어트 제주는 다가오는 7월, 메리어트 인터내셔널이 주관하는 ‘럭셔리 다이닝 시리즈’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여한다. 아시아-태평양 주요 도시에서 내로라할 셰프들이 미식가와 교류하는 미식 행사에 참여하는 건 JW 메리어트 제주가 국내 최초다. 제주는 미식의 가치를 알리는 데 매진해왔다. 올해 10회 차를 맞은 ‘제주푸드앤와인페스티벌(JFWF)’은 제주 식재료와 셰프의 창의성이 어우러진 비영리 미식 축제다. 제주고메위크, 고메 디너, 마스터 셰프 클래스, 와인 테이스팅, 디저트 페어, 갈라 디너 등 미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이 한 달간 펼쳐진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흑백요리사>에 출연한 셰프 조광효와 박준우를 비롯해 사브 서울 총괄 셰프 장한이, 제주 쁘띠부숑 오너 셰프 전준호, 파크 하얏트 서울 더 라운지 총괄 셰프 이지명 등 여러 유명 셰프가 함께한다. 김중한 역시 2023년 행사에 초청받았다. “최근 제주의 미식은 그 깊이를 더해가는 중입니다. 제주에 정착한 젊은 셰프의 독창적 감각은 제주 식재료를 단순한 지역 특산물로 소비하는 걸 넘어 새로운 형태의 요리를 탄생시키기 때문이죠.” 페스티벌 담당자 강부민은 앞으로도 지속 가능한 미식을 위해 꾸준히 소통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말했다. 서울로 떠나는 날, 내내 흐리던 제주는 내게 작별 인사를 고하듯 그제야 맑고 푸른 하늘을 내보였다.
제주의 파인 다이닝
뤼미에흐(Lumiere)
셰프 형제의 프렌치 레스토랑. 광주 알랭(Alain)에서 오랜 시간 근무한 셰프 조경재가 동생과 함께 운영한다. 제주 현지 농부와 소통하며 신선한 식재료를 수급하고, 제주의 지형적·문화적 특성을 요리에 적극 활용한다.
엠에이티(MAT)
제철 식재료와 제로 웨이스트, 지속 가능성. 오너 셰프 박지호의 요리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제주의 땅과 바다, 자신의 경험을 한데 녹여 단순하지만 밀도 있는 요리를 완성하는 것이 그의 목표. 모든 메뉴는 와인과 페어링해 즐길 수 있다.
에르미타주(Hermitage)
일본 미쉐린 레스토랑에서 근무한 셰프 장신영이 운영하는 프렌치 레스토랑. 한적하고 정겨운 분위기의 주택가에 자리 잡았다. 사계절마다 메뉴가 변경된다. 예약제로 운영하니 참고할 것.
쁘띠부숑(Petit Bouchon)
미쉐린 2스타인 뉴욕 블루힐(Blue Hill)과 파리 쉐즈 라 비에이르(Chez la Vieille)를 거쳐 제주 리스투아(L’historie)를 운영했던 셰프 전준호의 캐주얼 다이닝 레스토랑. 트러플을 올린 카치오페페와 관자 귤 뵈흐블랑 같은 단품 메뉴가 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