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로애락 없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그러니 무탈하기를 빌기보다는 삶의 풍파로부터 휘청대지 않도록 내면의 힘을 키우는 게 낫다. 

글 의뢰를 받았을 때, 단번에 “써보겠다”고 답했다. 물론 두 마음이 공존했다. 내가 ‘단단한 마음’에 대해 글을 맡겨볼 만한 사람으로 떠올려졌다는 데 대한 감사함, 그리고 ‘내가 잘 쓸 수 있을까?’라는 불안함. 그 양가적 마음을 알아차렸고, 당연히 긍정의 쪽을 택했다. 매사에 그런 편이다. “다 잘될 거야!”라고 스스로 용기를 불어넣는, 무한히 긍정적인 나는 소위 ‘멘탈 갑’ 부류의 인간이다. 처음부터 멘탈이 강했던 건 아니다. 10대에는 수능 시험에서 극도로 긴장해 평소 실력에 못 미치는 결과를 얻었고, 20대에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상사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대인기피증도 겪었다. 고통은 성장의 어머니라더니, 크고 작은 아픔을 딛고 30대에는 조금 안정기에 접어든 듯했다. 하지만 회사가 부도나며 월급이 안 나오고 우리 사주로 투자한 주식은 휴지 조각이 되면서 수치심만 남았다. 

40대인 지금은? 비로소 진짜 내면의 안정기를 맞았다고 말할 수 있다. 큰 사건 사고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주변의 상황과 환경에 상관없이 스스로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비로소 내면에 거센 바람이 불어도 꺾이거나 흔들림 없이 서 있는 뿌리 깊은 아름드리나무처럼 초연하고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됐다. 그사이 내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사실 단단한 내면을 지니기 위한 방법 또는 강철 멘탈 훈련법 등은 책이나 유튜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얼루어> 독자라면 ‘마음의 주인으로 살라’는 조언은 이미 숱하게 들었으리라 짐작한다. 하지만 다이어트 비법 수십 가지를 알아도 늘 살 빼기에 실패하는 것처럼 마음의 중심을 잡고 살아간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 않나. 그러니 질문을 ‘어떻게 하면 단단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대신 ‘도대체 단단한 마음을 지니기 어려운 이유가 뭘까?’로 바꿔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썩은 잎은 버리고 본연의 모습 수용하기 

일단 우리는 유리 멘탈이 되기 쉬운 사회적 구조에 놓여 있다. 비교 경쟁이 심한 사회에서 자라며, 명망 높은 학교, 알아주는 직장, 조건 좋은 결혼 등 일생의 결정적 순간마다 소위 사회적 기준의 우위에 서려고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배웠다. 그래서 졸업 후에도 끊임없이 자격증을 따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안정적 직업을 갖고 승진하는 걸 성공이라 여기며 힘들어도 어떻게든 버티고, 조건 따져 결혼한 관계에서 행복 찾기를 어려워한다. 사회적 기준에 뒤처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노심초사한다. 어쩌면 우리는 길들여진 서커스단의 코끼리처럼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조금씩 내면에 심지 굳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건 그런 알아차림 덕분이었다. ‘내게 무수한 고정관념과 그로 인한 부정적 감정이 가득 차 있었구나.’ 명문대를 졸업하지 않았다는 자격지심, 도드라지는 패션 감각이 없다는 열등감, 금수저가 아니어서 한계가 있을 거라는 패배의식 등을 발견했고, 더 깊이 들어가, 그런 부정적 마음은 결국 타인의 기준에 부합하려고 애쓰는 내 욕심 탓임을 깨달았다. 그러자 상황을 다른 관점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학창 시절에 공부를 성실하게 하지 않은 대신 평생 공부하며 살아가자’ ‘나는 패션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인데 어쩌다 패션 업계에서 일했네. 내게 맞는 세계가 있을 거야’ ‘금수저가 아니어도, 돈이 많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야’ 하는 식으로 생각을 바꾸니 나를 좀 더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됐다. 있는 그대로. 

믿음이라는 물을 듬뿍 주기 

단단한 마음을 지니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살아온 환경 탓일 확률이 높다. 자라면서 부모와 선생님으로부터 어떤 말을 들었는지, 형제자매 간에 비교로 인한 열등의식은 없었는지. 만약 나는 ‘할 수 있어’라는 믿음의 크기보다 ‘이번 생은 틀렸어’라는 부정적 생각이 더 많다면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왜 나는 그런 부정적 사고의 틀을 갖게 됐는지. 어릴 때부터 부모님에게 자주 들은 말, 학창 시절의 경험 등을. 어느 날, 둘째가 언니와 수영하며 놀다가 풀이 죽어서 내게 왔다. 이유를 물어보니 언니가 겁쟁이라고 놀렸단다. 아직 잠수를 하지 못하는 동생에게 언니가 면박을 준 모양이다. 그때 둘째에게 되물었다. “너는 스스로 겁쟁이라고 생각해?” “아니” “네가 스스로 겁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중요해. 엄마도 언니 말보다 네 생각이 맞는 것 같아. 넌 겁쟁이 아니야. 언니는 수영을 배웠고, 너는 아직 못 배운 것뿐이야”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이런 일이 아이들에게만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타인이 배려 없이 툭 던진 말에 쉽게 상처받는다. “너는 왜 이것밖에 못하니?” “너 왜 이렇게 살찐 거야?” 그런데 이때 속상한 감정에 빠지는 대신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보는 거다. ‘나는 정말 이것밖에 못하는 사람인가? 어디서 실수를 했고, 다음번에는 더 잘할 자신이 있는가’ ‘나 스스로 살쪘다고 생각하는가. 살 뺄 계획이 있는가.’ 이렇게 내 생각을 들여다보면, 타인의 말에 기분이 상하는 대신 문제를 개선할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고, 자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생기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누구나 알 법한 회사를 다니지 않더라도 자아실현을 할 수 있다는 믿음, 커다란 집에 살거나 좋은 차가 없어도 나를 둘러싼 환경에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 장애를 갖고 있는 게 불행이 아니라 불편일 뿐이고, 그럼에도 일상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건강한 믿음을 키워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레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판단 없이 존중할 수 있게 된다.

하루 10분이라도 내면의 나무와 대화하기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면, 눈을 감고 화두에 답을 얻고자 하는 명상이나 생각을 정리하는 일기 쓰기 습관을 권한다. 나를 채우고 있는 생각과 감정이 무엇이고, 그것은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파악하려고 자문자답해보자. 그리고 불안감을 발견하면 스스로 용기를 불어넣자. 만약 무의식에 깊은 상처나 트라우마로, 혹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정신적 폭력으로 내 목소리를 듣기 어렵다면 전문가의 안내로 치유하는 것이 우선이다. 나는 명상이 큰 도움이 됐다. 내면의 독소를 정화하고 진정한 평온을 얻기까지 어느 날은 1시간, 답답한 날은 2시간을 가만히 앉아 명상을 했다. 요즘은 매일 아침 루틴처럼 10~20분간 명상을 하고, 낮 동안 마음에 동요가 일 때면 잠시라도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가령 SNS를 보다가 잘난 인친의 피드를 보며 뒤처진 기분이 들라치면, 곧바로 ‘내가 비교하고 있구나!’ 인지하고,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눈을 감고 내 질투심을 바라보며, 이면의 내 인정 욕구를 알아차린다. 신기한 건, 알아차리는 순간 감정은 사라진다. 그러면 마음이 다시 고요해지고, 오직 내가 할 일에 집중하고 수행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이런 식으로 그때그때 감정을 바라보고 고요한 중심으로 돌아오기. 이런 마음의 근력이 생기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수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감정이나 생각에 잠식당하는 대신 내가 추구하는 방향을 향해 생각을 취사선택하고 감정을 조절해 의식적 행동을 할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어떤 고난이 와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나를 지배한다. 내면에 단단한 뿌리를 가진 신성한 나무가 존재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