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는 배우의 캐릭터 변신에 황금 열쇠가 되어주기도 한다.

SUPPORTING ROLES

(위부터)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로사 가드니아, 킬리안의 굿걸 곤 배드, 디올의 쟈도르 퍼퓸 도.

캐릭터에 몰입하기 위해 향수를 사용하는 배우들이 늘어났다. 이미 향수는 할리우드 촬영장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주요 소품이다.

CHARACTER BUILDER

영화 <헬프>에서 1960년대의 마릴린 먼로 닮은꼴인 셀리아를 연기한 제시카 차스테인은 실제 마릴린 먼로가 애정하던 샤넬의 N°5를 사용했다.

미국의 토크쇼 <인사이드 디 액터스 스튜디오>의 예전 에피소드를 보면 배우들이 ‘메소드’ 연기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잘 알 수 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에서의 연기를 위해 동물 사체들 사이에서 잠을 잤고, 톰 홀랜드는 <스파이더맨: 홈커밍>을 위해 브롱크스 하이스쿨의 학생들을 몰래 쫓아다녔다고. 캐릭터 몰입을 위한 갖가지 방법 중 가장 의외인 소품은 ‘향수’였다. 향수는 배우들 사이에서는 가장 강력한 연기 조력자로 통한다.

향수의 힘으로 연기 변신에 성공해온 수잔 서랜든은 자신의 캐릭터 변신 비결을 커스틴 던스트와 공유했다. 구구 바샤-로, 엠마 스톤, 페넬로페 크루즈도 마찬가지다. “정말 놀라운 변화를 일으켜요.” 로라 리니가 말했다. “캐릭터 안 가장 원초적이고 깊은 곳까지 나를 데려다 주는 것 같아요.”

리니가 원초적이라고 말하는 건 결코 과장이 아니다. 기억과 감정을 처리하는 뇌 부위는 후각 피질에서 진화한 것이고, 감정과 후각 사이의 강력한 연관성은 이미 수많은 논문으로 증명되었다. 또 시각적이거나 촉각적인 신호와 달리 후각은 문맥화할 필요가 없어 즉시 메시지를 전달한다. “향은 뇌의 수용체를 자극해서 우리의 기분을 변화시키죠. 이 사실을 알았을 때 향수가 더 확실한 변신을 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역할마다 다른 향수를 입기를 즐기는 엘리자 테일러의 말이다.

제시카 차스테인 역시 향수의 힘을 믿는다. “르 라보의 공동 설립자이자 제 절친인 파브리스 페노가 향수 선택을 도와주죠.” 차스테인은 테렌스 맬릭 감독의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 자애로운 아내 역을 위해 오렌지 블라섬 향을, <제로 다크 서티>에서는 CIA 요원 마야 역에 어울리는 스모키하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전하는 오드 향을 택했다. “<헬프>의 셀리아 풋을 연기할 땐 마릴린 먼로가 그랬듯 샤넬 N°5를 사용했어요. 먼로는 침실에서 이 향수 하나만 입었다고 하는데, 그런 점에서도 셀리아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거든요.”

“향수는 나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게 해줘요. 향만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죠. 이것이 수많은 배우들이 연기할 때 향수에 의존하는 이유기도 해요.” 아나 디 아르마스 역시 <블론드>를 촬영하는 내내 먼로의 시그너처 향수를 뿌렸다고 했다. 또 미셸 파이퍼는 <화이트 올랜더>의 자유롭고 아름답지만 살인자이기도 한 예술가 잉그리드로 변하기 위해 원작 소설처럼 라일락 향을 입었다고.

향수는 특히 촬영장에서 캐릭터를 전환하는 연기가 필요한 배우에게 유용한 툴이다. 누미 라파스는 넥플릭스 영화 <월요일이 사라졌다>에서 일곱 쌍둥이(카렌 셋맨 역)를 연기하기 위해 향수 7가지를 선별했다. 마고 로비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할리 퀸과 또 다른 자아이자 정신과 의사 할린 퀸젤이 되기 위해 플레이보이와 에디 하디 향수를 번갈아 뿌리며 연기했다. 엘리자 테일러도 <원헌드레드>에서 두 캐릭터를 분리하기 위해 서로 다른 향수를 사용했다. “화려함의 대명사 조세핀일 때는 우아한 플로럴 향이 나는 톰 포드의 카페 로즈를 뿌리고, 친절하고 겸손한 클라크일 때는 은은한 시더 향이 나는 킬리안의 굿걸 곤 배드를 뿌렸죠.” 향수는 캐릭터 전환 스위치뿐 아니라 때로는 타임머신이 되어주기도 했다. 2017년 방영된 범죄 드라마 <텀퍼>에서 엘리자 테일러는 고등학교에 잠복하는 경관을 연기했다. “고등학생을 연기할 때는 빅토리아 시크릿 바디 스프레이를 사용했어요. 제 청소년기가 떠올랐거든요. 경관의 모습일 때는 성숙하고 파워풀한 느낌의 버버리 포맨을 사용했죠.”

때로는 향수가 지닌 변신의 힘은 학습된 기억에서 나오기도 한다. 이를테면 청소년기에 뿌렸던 바디 스프레이처럼. 하지만 향수가 주는 마법과 같은 효과를 모두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조향사의 조언이 필요하다. 조향사의 일은 단어와 아이디어를 향으로 바꾸는 것이다. 아지 글래서(Azzi Glasser)가 수많은 배우와 고객을 위해 하는 일이 바로 그렇다.

최근 카림 아이누즈 감독은 글래서에게 <파이어브랜드>의 배우들을 위한 향수를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다. <파이어브랜드>는 헨리 8세와 여섯 번째 왕비 캐서린 파를 둘러싼 심리 스릴러다. 글래서는 악명 높고 노쇠해가는 헨리 8세를 연기하는 주드 로를 위해 혈흔과 질병의 느낌을 담은 ‘인간적’ 내음과 당시 귀족의 상징인 장미 향을 혼합했다. 그리고 왕의 마지막 아내인 캐서린 파를 연기하는 알리시아 비칸데르를 위해서는 영국 라벤더 향을 베이스로 한 섬세한 플로럴 향을 만들었다.

향수는 역사적인 맥락도 중요하지만, 영화를 위한 향수를 개발하는 과정은 시기나 배우(캐릭터)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향 분자가 피부와 반응하는 방식은 지극히 개인적이에요.” 글래서가 설명한다. “그리고 배우뿐 아니라 촬영장의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죠.” 로라 리니는 주드 로가 작가 토머스 울프로 분한 2016년 작 <지니어스> 촬영장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드는 담배와 책, 술을 포함한 매우 인상적인 향을 풍겼어어요. 향이 정말 미묘했죠.” 리니는 주드 로를 통해 글래서의 정보를 얻었고, 2017년 브로드웨이 연극 <작은 여우들>에서의 연기를 위해 연락을 취했다. 신시아 닉슨과 교대로 여러 역을 맡았는데, 캐릭터가 극단적으로 달라 향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글래서는 연약하고 부드러운 캐릭터인 버디를 위해 목련과 프렌치 파우더 노트를 조합한 향수를, 계략적인 캐릭터인 레지나를 위해서는 치명적이고 독성을 지닌 벨라도나와 독미나리를 연상시키는 플라워 향을 만들어줬다. 리니는 무대에 오르기 전날 밤부터 자신이 연기할 캐릭터의 향수를 뿌렸다. “향수는 캐릭터가 지닌 리듬, 캐릭터가 존재하는 시간과 장소 속으로 나를 데려다줘요. 그건 마치 빙의 같아요. 내 몸을 관통하는 유령이거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