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믿는 박재찬은 봄이가고 뜨거운 여름밤이 오도록 점점 더 푸르게 자라고 있다. 

스티치 디테일이 돋보이는 데님 재킷은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아일릿 소재 민소매 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블랙 데님 팬츠는 코노트(Connote). 블랙 더비 슈즈는 발렌티노 가라바니(Valentino Garavani).

자정이 훌쩍 넘었네요.
이거 녹음기예요? 저 처음 봐요. 신기하다. 뭔가 되게 예쁘게 생겼네요.

제법 시간이 늦었는데 지금 괜찮은 거죠?
좀 피곤한 것 같은데 좋아요.(웃음) 화보 촬영은 늘 도전하는 느낌이 들어요. 오늘도 처음엔 헤맸지만 뒤로 갈수록 어떤 느낌인지 알겠더라고요. 수월해지는 그 느낌이 재밌어요.

포즈나 표정을 만들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어 달라고 부탁했는데, 뭘 원하는지 금세 알아차리는 것 같던데요?
배우는 건 뭐든 좀 빠른 편이에요. 학문적인 거 말고요.(웃음) 상황에 대한 적응력이라고 해야 하나. 그때그때 현장에서 습득하는 거요.

여기 오면서 보니까 왓챠 톱 10의 1위가 여전히 <시맨틱 에러>더군요.
2월 16일 1화부터 3월 10일 8화까지 공개된 지 좀 됐는데도 그렇더라고요. 저도 되게 신기해요. 아무래도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 중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 시청자와 팬의 반응까지 보면 뭐 그저 놀랍죠.(웃음)

작품은 다 봤어요? 의외로 자기 출연작을 끝까지 못 보겠다고 하는 배우가 많잖아요.
원래 저도 그런 편이기는 해요. 주로 중요한 장면이나 꼭 확인하고 싶은 장면만 챙겨 보고 마는 식으로요. 근데 <시맨틱 에러>는 1화부터 8화까지 공개되는 날짜에 딱딱 맞춰서 챙겨 봤어요. 제가 나온 작품 전체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보니까 그냥 쭉 보게 되던데요.

한번 틀면 멈출 수 없다?
그것도 그렇지만 마음속에 어떤 욕심이 있어서인 것 같아요. 유난히 그래요. 작품을 촬영하면서 연기에 대한 욕심이 점점 커졌어요. 뭔가 더 해보고 싶다는, 잘하고 싶다는 마음요. 완성된 작품을 보면서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굳이 BL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전제할 마음은 없지만 <시맨틱 에러>를 선택한 건 여러 의미에서 도전이지 않을까 싶은데, 어때요?
일단 제가 작품을 선택했다기보다 선택받았다는 표현이 정확하죠. 아이돌로 데뷔한 지 3년쯤 지났을 때였는데, 제 기준에서 볼 때 이렇다 할 성과가 전혀 없었어요. 뭐든 기회가 오면 다 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시도하고 부딪치다가 좋은 기회를 만나 참여하게 된 거예요. BL이라는 장르에 편견이나 거부감이 없기도 했어요.

진짜 아무 상관 없다는 표정과 말투네요.
그냥 저는 좀 그런 사람인 것 같아요. 벽을 치면 칠수록 삶에서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폭이 줄어드는 거잖아요. 시야도 좁아지고요.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나 싶어요. 나와 다른 사람, 내가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분명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가만히 있어도 이런저런 오해에 휘말리기 쉬운 시대잖아요. 어때요?
사실 회사에서는 고민해보자는 의견이 있었어요. 조심스러우니까요. 근데 저는 진짜 그런 걱정 없었어요. 잃을 게 없는 사람은 그래요.(웃음) 평소 성향도 성향이지만, 저와 제가 속한 팀을 세상에 알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감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는 사람인가 봐요. 지금은 되게 절실한 얼굴이 스쳤거든요.
절실함이 있었어요. 저희 진짜 바닥에서 시작했거든요. 소셜미디어 팔로워도 몇 십 명뿐이었고, 앨범 판매량이 마흔한 장일 때도 있었어요.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게 아니더라고요. 힘들더라고요.

지금은 어때요? 하룻밤 사이 높이 뜬 별이 된 지금.
그 말이 맞아요. 그냥 붕 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느낌 아세요? 이제 단단하게 자리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어요. 정말 한순간에 이렇게 올라온 거잖아요. 더 올라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너무 큰 욕심은 안 내려고 해요. 이 기회를 날려버리지 않고 단단하게 만드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자고 일어났는데 다 사라졌으면 안 되니까요. 가끔 그런 상상을 하는데요. 진짜 무서워요.(웃음)

 

노르딕 패턴 니트 베스트는 메종 마르지엘라 바이 육스(Maison Margiela by Yoox). 그레이 데님 팬츠는 어콜드월(A-Cold-Wall). RIGHT 이어링은 펜디(Fendi).

크롭트 티셔츠, 재킷, 실버 이어링은 모두 펜디.

꿈이 아닌 것만은 확실해요. BL 문화의 특성상 한번 구축된 팬덤은 철옹성이니까요.
하하. 근데 그 말도 맞는 것 같아요. 팬덤이 진짜 강하더라고요. 힘을 모아서 광고도 해주시고, <시맨틱 에러>를 테마로 한 카페도 있더라고요. 약간 신세계였어요.

유독 한국에서는 숨어서 보던 BL을 양지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으로 남을 거예요. 지난 주말 나른하게 누워 <출발! 비디오 여행>을 보는데, <시맨틱 에러>가 나오길래 벌떡 일어났지 뭐예요.
공중파에 나오다니! 공중파에서 BL이 등장하는 게 거의 금기시되다시피 했다고 하더라고요. 미처 인지하지 못한 건데, 좋은 평가를 보면 괜히 뿌듯하고 막 그래요.

영역을 확장하고 이름을 새기는 사람이군요.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웃음) 그런 작품에 참여해서 영광입니다. 연기를 하든 음악을 하든 한 분야에 획을 긋는 의미 있는 작품에 참여했다는 건 진짜 그런 거잖아요.

이런 질문은 어때요? 왜 지금 BL이 뜨는 걸까요?
사회적 시선이나 개인의 신념에 따라 호불호가 있을 수 있다고는 생각해요. 좋거나 싫거나 하는 기준이 없는 불특정 다수도 있을 거고요. 처음 시나리오를 읽을 때 중후반부까지 저도 BL인지 몰랐어요. 평범한 캠퍼스물인 줄 알았어요. 많은 분이 작품을 그렇게 바라본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장르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식의 이야기라서 거부감 없이 접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편견이 많은 장르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에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정말 똑똑한 방식인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보편적 장르가 아니라 너무 본격적으로 가면 거부감이 생길 텐데 초반 설정을 잘해서 누구나 편하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느릿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분명한 말을 하는 게 흥미롭네요. 확신이 있어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은 무조건 있죠. 그렇게 믿고 싶은 걸 수도 있는데, 혼자 계속 주문을 걸어요. 잘될 거야. 하고 싶은 대로 해봐. 그럼 진짜 멋지고 쿨하지 않을까?

그 주문의 힘으로 오늘날 박재찬이 여기 있는 거겠죠?
요즘 부쩍 자주 하는 생각인데요. 세상 모든 사람이 저를 좋아할 수는 없어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는 게 가장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이런 제 모습을 좋아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지만, 그게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때는 저도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었는데, 그 욕망이 클수록 피폐해지더라고요. 단지 사랑받기 위해서 가짜로 뭘 꾸며내고 싶지는 않아요.

아까 팔뚝에 있는 BCG 주삿바늘 자국 18개를 보면서 우리의 세대와 시대가 많이 다르다는 걸 새삼 생각했어요. 굳이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지 않아도 좋다는 태도도 뭔가 요즘 같아서 좋네요.
에디터님은 이렇게 자국이 남는 불주사 세대예요?(웃음)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에너지를 아껴서, 저를 사랑해주는 사람들과 나눌래요. 그게 훨씬 더 좋아요. 저만의 생존방식이기도 하고요.

그나저나 운명을 믿어요?
저는 운명을 믿어요. 살면서 나름대로 많은 시련을 겪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경험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시련도 성공도 행복도 어차피 다 제가 경험하게 될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제작진은 닫힌 결말이라고 강조했지만, 팬들은 닫힌 문을 강제로 열겠다고 하던데요. <시맨틱 에러> 시즌 2는 어때요?
지금은 시즌 2를 모두가 원하는 것 같아요.(웃음) 작품이 다 그렇겠지만, 수많은 사람이 한곳을 바라보고 모여서 함께한다는 건 정말 기적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함께한 배우 서함이 형이 군대에 있어서 당장은 어렵겠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이어진다면 기적 같은 일이 또 생길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기꺼이, 감사한 마음으로 참여할 거고요.

운명을 믿는 사람이니까, 뭐든 이미 정해져 있을지도 모르죠.
맞아요. 아직 모르는 것일 뿐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을 거예요. 최근 유난히 자주 운명을 믿는다고 말하고 다니는데 어떻게 보면 그것도 제 속 편하려고 그러는 것 같아요.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안하거든요.

금세 또 평온한 얼굴이 되네요. 졸린가요?
스물둘 인생에서 가장 바쁜 일주일을 보내고 있어요. DKZ 컴백을 앞두고 준비할 게 많아요. 새 앨범 예약 판매를 시작한 지 6일 차인데, 아까 보니까 6만 장이 넘었더라고요. 저 진짜 울컥했어요. 몸은 엄청 힘든데 마음은 편안해요. 참 이상하죠?

아직 밤에는 쌀쌀한 4월인데 우리 대화가 세상에 나오는 6월호는 이미 뜨거운 여름을 말하고 있을 거예요. 참 이상하지 않아요?
그때 돌아보면 오늘이 되게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것도 참 이상하고 또 궁금하네요. 6월에는 제 마음이 어떻게 변해 있을까요? 그때는 반소매를 입겠죠? 진짜 여름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