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 after time, 엄지원
드라마에서 영화로 향한 <방법>. 그리고 8부작 드라마 <산후조리원>으로 2020년을 꼬박 채운 배우 엄지원의 시간.
‘엄지원.’ 한자로는 어떻게 써요?
안 알려드릴 거예요.(웃음)
넘어오지 않는군요! 드라마 <방법>에 따르면 누군가를 ‘방법’ 하려면 한자 이름, 사진, 그 사람의 물건이 필요해요. 그렇다면 한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각본을 쓴 연상호 감독님의 말을 옮기면, 사진이나 한자 이름 같은 건 어떤 사람을 특징 지어서 빨리 찾기 위한 수단이라는 거예요. 한자 이름이 없어도 찾을 수 있대요. 조금 더 오래 걸리겠지만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의 데이터베이스가 있고, 한자를 비롯한 세 가지 도구로 필터링을 한다는 거군요.
맞아요. 세상에 엄지원이 많으니까, 그중에서 어떤 엄지원인지 찾는 거예요.
<방법>은 누군가를 저주할 수 있다는 미신을 주제로 삼고 그 세계관 안에서 쭉 나아갔어요. 당신이 연기한 ‘임진희’도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남을 저주한 후 두려움과 책임감을 갖게 됩니다. 실제로 미신을 믿는 편인가요?
저는 크리스천이라서 사주도 안 보고 그런 걸 별로 믿지는 않아요. 그런데도 작품의 스토리가 정말 재미있었어요. 재미와 흥미를 느끼는 작품을 하려고 하지만 배우로서 필모에 다양한 장르가 포함될 수 있게 노력을 해요. 저 배우가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구나… 할 수 있게요. <방법>은 처음 나오는 한국형 오컬트 시리즈라는 점에 먼저 끌렸어요. 장르가 다양화되는 것이 산업적으로도 좋고 배우들에게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미신은 은연 중에 우리 일상에도 많이 녹아 있어요. 장례식장에 다녀온 후 소금을 뿌리는 집이 아주 많다더라고요. 그것도 한국형 오컬트겠고요.
맞아요.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내가 현재 이 삶을 살면서 느끼고 부딪히고 생각하는 것들이 작품으로 이야기될 때가 있는데, 그런 작품을 만나면 하려고 해요. 예를 들면 <무자식 상팔자> 같은 작품은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는 미혼모에 대한 이야기를 대중에게 환기시키는 작품이에요. 여자로서 그리고 사람으로서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방법>은 올해 드라마로 먼저 공개가 되고 지금 영화화가 진행 중이에요. 처음에는 <반도>의 연상호 감독이 쓴 드라마로 화제를 모았고요. 기존 드라마 작가가 쓴 것과 어떤 점이 달랐나요?
그래서 너무 재미있었어요. 또 그거 때문에 힘들기도 하더라고요. 뭐든 장단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죠. 좋은 건 미리 이야기가 다 나와 있었다는 거예요. 이야기의 틀을 다 짜고 감독님이 배우도 염두에 두고 쓰셨기 때문에 완성도와 집중도 면에서 확실히 달랐어요. 대본이 다 나와 있고 불필요한 게 없고, 각 캐릭터들이 다 살아 있었고요. 12부였는데, 처음에 절반만 보여주셨지만 이미 다 나와 있었어요. 하기로 하면 나머지를 보여준다고.(웃음)
어떤 부분이 힘들었어요?
촬영을 하다 보니 분량이 모자라는 거예요. 일반적으로 드라마는 70분 분량이라고 생각하면 혹시 모르니 작가님들이 넘치게도 쓰시거든요. <방법>은 찍다 보니 부족한 장면이 생기기도 했어요.
그 세계관이 영화로 옮겨져 촬영이 한창이죠. 같은 작품으로 드라마와 영화에 모두 출연하는 것은 배우로서도 흥미로운 경험 아닌가요?
이 작품에 욕심이 났던 이유기도 해요. 그런 향후 플랜들이 처음부터 다 있었어요. 물론 지금 하고 있는 작품들이 어느 정도 대중의 사랑을 받아야 계획을 풀어낼 수 있겠지만요. 드라마 자체도 새로웠지만 유니버스를 가지고 시리즈물을 만들어가는 최초의 여자 주인공이 된다는 게 저한테 의미 있었어요.
연기도 달라졌나요?
연기가 다른 건 아니지만 드라마를 하면서 아쉬웠던 점, 제 캐릭터에서 답답하고 갈증을 느낀 지점들이 있었어요. 그점을 영화에서 보완할 수 있도록 발전시키고 있어요.
곧 드라마 <산후조리원>도 시청자들을 만날 텐데요, 산후조리원 역시 동시대에 분명히 존재하는 이야기죠. ‘조동’. 즉, 조리원 동기가 대학 동창보다 각별한 경우를 많이 봤어요.
저는 SNS를 통해 제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다르게 해석될 위험이 늘 있으니까요. 대신 연기하는 작품을 통해서 저의 고민을 동시대 사람들과 얘기하고 싶어요. 이번에 나오는 <산후조리원>도 같은 맥락이었어요. 여성에게는 결혼과 출산으로 커리어가 단절되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으니까요.
<산후조리원>은 회사 임원이자 병원에서는 최고령 산모인 주인공을 다룬다고 하죠. 결혼 연령이 늦어지고 있으니 산모의 나이가 많은 건 당연해요. 그런데도 여전히 출산적령기를 20~30대 초로 보고 ‘노산’이라는 낙인을 찍어요. 궁금하네요, 8부작 안에 어떻게 담아낼까.
지금 나의 얘기, 친구들 이야기, 우리가 다 겪고 있는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에요. 조리원에서 2주 동안 일어나는 이야기이고 퇴소를 하면 끝나거든요. 조리원이라는 공간에 한 사람이 들어가서 완전히 다른 세상을 겪고 나오는 이야기예요. 저희끼리는 잘되면 시즌 2도 생각해보자는 플랜을 가지고는 있지만, 원래 기획 자체는 8부작으로 짧았어요.
이미 촬영은 다 했죠? 마음에 드는 작품인가요?
너무 재미있는 작품이에요. <방법> 드라마가 끝나고 중간에 조금 쉬고 싶었는데도 <산후조리원>이 너무 재미있어서 제가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잘할 수 있겠다.(웃음) 이야기적으로 유니크한 작품이 제가 배우로서 가고 싶은 방향이라면 <산후조리원> 같은 작품은 사람 엄지원이 이야기하고 싶은 방향이에요. 어느 쪽이든 방향이 맞는 작품을 만나게 되면 꼭 하려고 하죠.
배우 엄지원의 필모는 그런 게 흥미로워요. 말하는 로맨틱 코미디나 ‘귀여운 여인’ 같은 역할은 거의 없죠. 어떤 과업을 위해 곧장 직진을 해요.
여성 캐릭터가 메인으로 끌어나가는 이야기들이 생긴 게 정말 몇 년 안 됐거든요. 그전에는 여자 주인공이라고 해도 남자 주인공과 대등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게 아니라 남자 주인공을 보조하는 역할이 많았어요. 선택의 폭이 많이 없었는데 그 안에서 그나마 조금 다른 거, 주체적인 걸 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로코가 점점 안 들어오더라고요.(웃음) 신기하게 항상 전작과 비슷한 작품이 들어와요. 스릴러를 하면 스릴러가 쭉 들어오고, 액션을 하면 액션이 쭉 들어오는 식으로… 최근에는 로코가 온 적도 없는 것 같아요.(웃음)
그러니 당신처럼 다양한 역할을 해온 여성 주연 배우도 드물 거예요. 그런 작품을 선택하는 건가요, 그런 작품이 당신을 선택하는 건가요?
모든 건 양자가 서로 선택해야 가능해요. 하지만 제가 먼저 선택을 받아야 저도 선택할 수 있어요. 물론 최종 선택은 제가 하고 그것들이 제 필모가 되었어요. 안 했던 작품 중에 잘된 작품도 있고 또는 제가 2순위였던 작품도 있고요. 결국 하는 사람이 주인공이지만, 느낌이 오죠. 내가 1순위였는지, 2순위였는지요. 어떤 작품에서는 제가 1순위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작품에서는 제가 2순위일 수도 있고.
섭외 순서는 개의치 않는 편인가요?
자존심이 상할 문제도 아니고, 그걸로 자존심이 상한다면 배우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1순위였던 작품도 사실 다른 사람이 했으면 더 잘했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배우는 ‘내가 하게 되는 작품이 내 작품이다’라며 멘탈 관리를 해요.
당신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여성들과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유독 기억에 남아요. <미씽 : 사라진 여자>에서는 공효진과 그랬고, <방법>에서는 정지소가 있었어요. 여성 배우들과 합을 맞출 땐 어때요?
저희끼리만 가질 수 있는 우애, 우정, 서로만 이해할 수 있는 동료 의식 같은 것들이 생겨요. 물론 남자 배우와도 동료 의식을 가질 수 있지만 같은 업계에 있는, 조금은 약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우리끼리 서로 힘을 합치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그런 동료 의식을 제일 많이 느낀 작품은 무엇이었나요?
백 퍼센트로 <미씽>이에요. 내용 자체는 힘들었지만 같이 작업하는 건 정말 재미있었어요.
이제 가을인데, 문득 당신이 나온 <가을로>를 극장에서 본 기억이 나더군요. 그 외에도 <똥개>라거나 많은 작품을 극장에서 봐왔고, 지금도 보고 있어요. 데뷔할 무렵엔 언제까지 연기를 하고 싶다는 계획이 있었나요?
한 열 개나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어요.(웃음) 이렇게 오래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저도 나이가 드니까 지금 생각하는 것들을 같이 이야기하는 게 좋아요. 노년에는 <디어 마이 프렌즈> 같은 작품을 꼭 찍고 싶어요.
끝까지 연기를 하고 싶다는 뜻인가요?
그건 아니에요. 삶의 이야기와 드라마가 같이 가는 것 같아요. <디어 마이 프렌즈>를 보면서 되게 좋았거든요. 제가 노년의 삶에서 느끼는 걸 지금의 저 같은 젊은 사람들과 이야기로, 연기로 나누면 좋겠어요. 허락하는 한 끝까지 즐겁게 작업하고 싶어요. 그러다 보면 당연히 체력이 떨어질 테니까 작품 속도도 줄겠지요.
살면서 느끼는 감정이 연기의 밑거름이 되나요?
삶을 베이스로 하는 작품들은 저희 경험을 통해 연기가 조금 더 풍성하게 나오는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또 많은 작품은 상상에 의존해요. 작품마다 다 달라요.
요즘은 인생에서 뭘 고민하고 있어요?
음… 멀리 서울을 떠나 살고 싶어서 그런 고민을 하고 있어요.
떠나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요?
저라는 사람은 정말 효율적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효율성과 행복의 상관관계가 있을까 하는 질문을 했을 때에는 서로 관련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효율성이 높은 인간이라고 해서 행복한가? 아닌 것 같거든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슬로우 라이프가 맞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게 맞을까? 사회가 우리가 그렇게 몰아가는 면이 있잖아요. 조금 단절되면 조금 더 여유롭게 살지 않을까 해요. 멈춰서 저를 돌아보려면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져야 되지 않나… 스스로는 잘 안 되니까요.
그러면 무엇이 있어야 인간 엄지원은 행복한가요?
시간.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니까요. 돈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제가 저를 돌아봤을 때 저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은 다 공짜로 주어지는 것들이었어요. 날씨, 하늘, 바람, 여유로움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은 제가 노력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그냥 공짜로 주어지는 것인데 거기서 제가 큰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런 요소를 최대한 많이 누릴 수 있는 삶을 앞으로 살아보고 싶어요. 밸런스를 맞추면서 살고 싶어요.
‘연기’라는 꿈과 ‘시간’이라는 자원의 밸런스인가요?
물론 일도 너무 재미있어요. 재미가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못 했겠죠.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이 정말 재미있거든요. 피가 도는 느낌이에요. 동시에 감정적으로 힘들고, 내 자존과 캐릭터의 싸움도 겪거든요. 연기 초반에는 그런 갈등이 많이 있었어요. 나를 부수고 이 사람의 어떤 면을 표현하는 게 힘들기도 했어요. 그 이후에 오는 평가들, 흥행 성적… 힘듦, 아픔, 재미 모든 것이 섞여 있죠.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매력적이에요. 또 시간은 저한테 좋은 것이거든요. 온전히 좋은 것과 힘든 게 섞여 있어야 좋을 것 같아요.
‘나를 부수고 다른 사람을 표현하는 고통이 있다’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네요. 어쩐지 인터뷰를 할 때면 다들 행복감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거든요.
저도 연차가 되면서 그런 부분이 훨씬 쉬워졌어요. 많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작업이 조금 더 쉬워지고 캐릭터를 떠나보내는 것도 빠르고요. 저는 ‘연애’라고 표현하는데요, 첫사랑은 애틋하잖아요. 그런데 이게 한 서른 번째 사랑이면… 그 순간은 그냥 되게 좋지만 떠나가면 그냥 ‘응 갔구나~’ 하는 거죠.
다시 말해, 매번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군요.
바람둥이가 잘해준다고 하듯이…(웃음). 그때 푹 빠져서 하고 끝나면 빠져나오는 게 훨씬 빨라졌어요. 작품이 끝나고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느낄 때 예전에는 그게 뭔지 몰라서 헤맸었다면 이게 캐릭터를 떠나보내는 과정이라는 걸 지금은 알죠. 여행을 가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하는 식의 방법이 생겼어요. 하다 보니까 이렇게까지 왔고 오다 보니까 보이는 것도 생기고…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지금까지 해왔고, 멈추지 않았었어요. 가장 큰 동력은 뭐였어요?
첫 번째 이유는 연기하는 게 재미있었기 때문이에요. 두 번째는 늘 아쉬워서 그랬던 것 같아요. 항상 아쉽고 부족했어요. 연기가 조금 달랐더라면 좋았을까? 흥행이 잘됐으면 좋았을까? 이건 내가 진짜 잘했네? 어떻게 이렇게 잘했지? 이런 느낌을 스스로 가져본 적이 없어요. 그때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만 있었어요. 다른 건 더 잘할 수 있을까? 이런 마음이 늘 다음 작품을 하게 했던 것 같아요.
<산후조리원>은 만족했다면서요?
‘내가 해야지 이 작품이 잘될 것 같아’라는 혼자만의 뭔가가 있긴 했어요.(웃음) 시간이 지나보니 지금 나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작품들이 있더군요. 제가 어릴 적에는 일부러 나이보다 어른스러운 역할을 했어요.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제 역량을 테스트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것도 좋았지만 그 나이 때 할 수 있는 걸 놓쳤다는 아쉬움도 있어요. <산후조리원>도 몇 년 지나면 제가 할 수 없는 작품일 거고요. 지금 할 수 있는 작품이에요.
2020년이 이제 90일도 채 남지 않았어요. 묘한 해였죠. 그 90일 동안 ‘시간’이 생긴다면 뭘 할 생각이에요?
얼마나 주실 거죠?(웃음) 몇 시간이면 그냥 가만히 쉴 것 같고, 하루라면 오후에 마음이 잘 맞는 친구들을 만나서 샴페인을 마실 것 같고, 이틀이 비면 여행을 갈래요. 제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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