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콕의 부활

패션 디자이너에게 영감의 원천은 다양한데, 그중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영화다. 서스펜스, 금발 미녀 그리고 레이디라이크 스타일로 대표되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는 패션 디자이너에게 ‘고전’으로 칭송받고 있다.

1 회색 슈트를 입고  대본 연습 중인 킴 노박. 2 에서 암녹색 슈트를 입은 그레이스 켈리. 3 에디스 헤드가 디자인한 블랙앤화이트 드레스를 입은 그레이스 켈리. 4 2013년 가을/겨울 돌체앤가바나 컬렉션. 의 킴 노박이 입었던 회색 슈트를 연상시킨다. 5 와 의 여주인공을 떠오르게 하는 타이트한 슈트와 메이크업의 2013년 가을/겨울 구찌 컬렉션. 6 2005년 가을/겨울 알렉산더 맥퀸 컬렉션. 금발과 레이디라이크 룩으로 히치콕의 여주인공을 오마주했다.

1 회색 슈트를 입고 <현기증> 대본 연습 중인 킴 노박. 2 <이창>에서 암녹색 슈트를 입은 그레이스 켈리. 3 에디스 헤드가 디자인한 블랙앤화이트 드레스를 입은 그레이스 켈리. 4 2013년 가을/겨울 돌체앤가바나 컬렉션. <현기증>의 킴 노박이 입었던 회색 슈트를 연상시킨다. 5 <새>와 <사이코>의 여주인공을 떠오르게 하는 타이트한 슈트와 메이크업의 2013년 가을/겨울 구찌 컬렉션. 6 2005년 가을/겨울 알렉산더 맥퀸 컬렉션. 금발과 레이디라이크 룩으로 히치콕의 여주인공을 오마주했다.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영상이 투영된 벽을 따라 머리를 촉촉하게 늘어뜨린 스커트 슈트 차림의 모델들이 걸어 나온다. 2013년 가을/겨울 프라다의 런웨이는 클래식함과 긴장감이 흐르며 마치 서스펜스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했다. 1940년대의 레이디 룩을 제안한 보테가 베네타, 우아한 실루엣의 슈트를 제안한 구찌 쇼 모델을 보면 볼수록 컬렉션의 메이크업과 의상에서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바로 서스펜스 영화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 속의 여주인공들이다. 프라다 컬렉션의 헤어 스타일은 <사이코>의 여주인공을 연기한 자넷 리가 샤워하는 모습을 연상시키고, 루이 비통의 슬립 드레스, 에르마노 설비노의 화이트 코트와 회색 스커트 슈트에서는< 현기증>에서의 킴 노박의 모습이 엿보인다. 사실 히치콕의 미장센과 여주인공의 스타일은 오래 전부터 많은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주어왔다. 초대장부터 영화< 현기증>의 오리지널 포스터를 차용한 알렉산더 맥퀸의 2005년 가을/겨울 컬렉션은 히치콕 영화 여주인공들의 스타일을 충실히 재현한 컬렉션으로 지금껏 회자되고 있다. 영화 <새>의 여주인공을 연기한 티피 헤드런과 <현기증>의 킴 노박이 런웨이를 걸어 나오는 듯한 이 컬렉션에서 선보인 가방 역시 킴 노박의 이름에서 따온 노박백이었다. 히치콕의 영향력은 비단 런웨이에만 그치지 않는다. 특유의 음산한 기운과 금발 미녀의 조합에 영감 받은 광고 이미지도 상당한데, 2012년 봄/여름 질 샌더 캠페인의 깨진 유리창을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나타샤 폴리의 모습은 <새>의 티피 헤드런과 <사이코>의 자넷 리를 오마주한 것이고, 2013년 봄/여름 컬렉션에서 디스퀘어드2의 딘앤댄은 ‘Behind the Mirror’라는 주제로 히치콕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음악과 조명으로 알프레드 히치콕에게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이처럼 패션 디자이너들을 자극하는 히치콕 영화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레이스 켈리가 열연한 <이창>에는 우아함의 정수라고 칭할 만한 의상이 대거 등장한다. 블랙앤화이트 드레스에 진주 귀고리와 목걸이, 긴 장갑을 매치해 우아함을 강조한 스타일은 그레이스 켈리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기억될 정도다. <현기증>의 킴 노박은 간결한 회색 스커트 슈트에 단정한 펌프스를 신고 등장하며, <새>의 티피 헤드런 역시 대부분의 장면에서 단정한 실루엣의 스커트와 코트를 입고 있다. 이같이 히치콕 영화 속 여주인공 스타일의 바탕은 레이디라이크 무드가 지배하는 클래식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바로, 금발머리! 그래서 이러한 요소를 가진 여주인공들을 통틀어 ‘히치콕 블론드’라 칭한다. 히치콕은 자신이 추구하는 미장센을 완벽하게 표현하기로 유명했는데, 이는 여주인공의 스타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금발 머리의 여배우만 캐스팅했고, 연기 지도가 아닌 스타일링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여배우와 의상에 집착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레이스 켈리부터 킴 노박까지 많은 스타일 아이콘이 탄생한 배후에는 전설적인 커스튬 디자이너인 에디스 헤드가 있었다. 그녀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이 컬렉션을 위한 그림을 그리듯, 히치콕이 밑바탕을 그리면 이를 완벽한 드레스와 헤어 스타일로 구현해냈다. 그레이스 켈리의 빈약한 가슴을 감추기 위해 스커트에 주름을 잡았고, <현기증>을 찍을 때 히치콕이 킴 노박에게 회색 스커트 슈트와 검은색 하이힐을 요구했는데, 이를 끔찍하게 싫어한 킴 노박을 설득한 사람 역시 에디스 헤드였다(아이러니하게도 킴 노박의 회색 슈트는 패션사에 길이 남을 대표적인 슈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알프레드 히치콕이 미적인 아름다움에만 집착한 것은 아니었다. 영화 속에서 패션 아이템은 때때로 영화의 복선이나 결정적인 단서로 작용했다. <현기증>에서 남자 주인공 스카티가 죽은 연인 마들렌과 새로운 연인 주디(킴 노박이 1인 2역을 연기했다)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주디가 습관적으로 하는 목걸이 때문이었고, <이창>에서 이웃집 남자가 부인을 살해했다는 것을 깨닫게 한 결정적 단서는 결혼 반지였다. 이처럼 단순히 스타일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와의 연관성으로 인해 의상은 또 다른 등장인물이 되었고, 다급한 순간일수록 더욱 매혹적인 의상을 주인공에게 입혀 묘한 반전의 순간을 선사했다.
히치콕 영화가 패션 디자이너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고엔 제이 디자이너 정고은은 이렇게 말한다. “이번 시즌에는 어두운 무드의 컬렉션이 많아요. 히치콕에게 직접 영감을 받은 건 아니지만 영화의 누아르적 분위기가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히치콕 영화의 여주인공들은 전형적인 고전 미인이지만 절제되어 있고 섹시해요. 외면만 보면 21세기 여성 같다고 할까요. 관능적이면서 우아한 이중적인 매력은 디자이너들이 상상력을 발휘하기 좋은 요소죠.” 히치콕의 영화는 관능미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단정한 슈트와 초연한 표정을 통해 오히려 여자의 내면에 있는 관능미를 끄집어낸다. 요즘 말하는 반전의 미가 히치콕 여인들의 매력 포인트인 것. 패션에서 디자인만큼 중요한 것이 이 표현 방식이다. “내겐 섹시하다는 말이 속임수로 들린다. 얕은 수로 속이려 드는 그런 뻔한 속임수. 섹시함을 드러내기 위해 플레이보이처럼 입을 필요는 없다”라는 에디 슬리만의 말은 꼭 히치콕의 여인들에게 보내는 찬사 같다. 드러내지 않아서 더 돋보이는 우아한 관능미! 여성의 가장 강력한 두 가지 매력을 보여주는 히치콕의 영화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고, 다음 시즌에도 새로운 히치콕 레이디는 어김없이 탄생할 것이다.

광고 캠페인 속의 히치콕 여인들 1 의 킴 노박을 연상시키는 2012년 봄/여름 질 샌더의 광고. 2 의 아이콘, 까마귀를 등장시킨 2010년 가을/겨울 톰포드 아이웨어 광고. 3 히치콕 영화 특유의 긴장감을 사진으로 옮겨온 2013년 가을/겨울 랑방 광고.

광고 캠페인 속의 히치콕 여인들 1 <현기증>의 킴 노박을 연상시키는 2012년 봄/여름 질 샌더의 광고. 2 <새>의 아이콘, 까마귀를 등장시킨 2010년 가을/겨울 톰포드 아이웨어 광고. 3 히치콕 영화 특유의 긴장감을 사진으로 옮겨온 2013년 가을/겨울 랑방 광고.

알프레드 히치콕, 금발 미녀 학대자
한번 가정해보자. 알프레드 히치콕이 영화감독이 되지 않았다면? 답은 분명하다. 그는 관음증 환자가 되었거나, 금발 미녀만 노리는 사이코패스 킬러가 됐을 거다. 사실, 대부분의 존경받는 예술가들에게는 어딘가 뒤틀린 성적 욕망과 기벽이 있는데, 다행히도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예술’이라는 도구를 통해 그 욕망을 발산한다. 그나저나,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히치콕에 대해 잘 모른다면, 히치콕을 관음증 환자나 금발 미녀만 노리는 사이코패스로 묘사하는 게 영 미덥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라. 서스펜스를 다루면서 히치콕이 항상 삽입하는 부차적인 두 가지 키워드가 존재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히치콕의 영화를 더할 나위 없이 섹시하고 패셔너블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두 키워드. 바로 관음증과 금발 여자다.
<이창>의 제임스 스튜어트는 왼다리가 부러져 깁스를 한 상태로, 망원경을 가지고 남의 집 창문을 엿보는 것을 취미로 삼는 남자다. 히치콕의 영화 속에서는 언제나 누가 누군가를 훔쳐보고 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히치콕은 영화라는 매체 자체, 스릴러라는 장르 자체가 바로 ‘ 관음증’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관음증과 이어지는 히치콕의 영화적 페티시가 바로 금발 여자다. 그가 굳이 금발을 선호한 이유? 그거야 아주 개인적인 취향이었을 것이다. 다만, 도널드 스파토의 꽤나 편파적인 히치콕의 전기 <미모에 홀려 : 알프레드 히치콕과 주연 여배우들>에 따르면 히치콕이 병적일 정도로 금발 미녀를 좋아한 이유는 억눌린 성적 욕망 때문이었단다. 체중이 129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단신의 히치콕은 자기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들을 열렬히 사랑했다고 하는데,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히치콕이 관에 들어간 지금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몇 가지 심상찮은 증거를 우리는 영화 속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잉그리드 버그만, 그레이스 켈리와 티피 헤드런 같은, 히치콕이 특별히 아꼈던 여배우들과 히치콕의 관계를 돌아보면 답은 분명해진다. 히치콕은 <오명> 등에 출연한 잉그리드 버그만이 이탈리아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바람이 나 이탈리아로 건너가자 죽을 때까지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고, 다시는 기용하지도 않았다.
<이창>, <다이얼 M을 돌려라>의 주연을 맡은 그레이스 켈리가 모나코 국왕에게 시집가자 히치콕의 질투는 더욱 불타올랐다. 많은 히치콕 전문가는 <사이코>에서 자넷 리를 식칼로 난자해 죽이는 장면이 그레이스 켈리에 대한 개인적 복수라고 풀이한다. 그리고 히치콕의 대표작인 <새>와 후기작인 <마니>의 주연을 맡은 티피 헤드런이 있다. 헤드런은 히치콕이 발굴해 유명해진 여배우였다. 히치콕은 그녀를 잉그리드 버그만과 그레이스 켈리의 대체품처럼 사랑했는데, 심지어 헤드런의 의상과 필적까지 모조리 직접 지도할 정도였다. 히치콕의 영화에서 금발 미녀 집착증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를 단 한 편만 꼽으라면 <현기증>이다. 제임스 스튜어트가 연기한 주인공은 킴 노박이 연기한 연인의 머리 색이나 옷에 무시무시한 페티시즘을 갖고 있는 남자인데, 연인이 죽고 그녀와 꼭 닮은 갈색머리 여자가 나타나자 죽은 연인의 금발과 옷차림을 강요한다. 이쯤 되면 분명하지 않은가. <현기증>에서 제임스 스튜어트가 연기한 캐릭터는 알프레드 히치콕이라는 남자의 성적인 페티시즘과 강박증을 모조리 투영한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히치콕의 금발 미녀에 대한 뒤틀린 애정은 지금 와서 돌아봐도 매우 아름답다. 금발 미녀 캐릭터가 생생한 인간이 아니라 케이크의 중간에 꽂은 장식품에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히치콕 영화의 스틸을 보면 그건 지나칠 정도로 분명해진다. 잉그리드 버그만, 그레이스 켈리, 킴 노박과 티피 헤드런은 완벽한 금발을 하고, 갑갑할 정도로 완벽한 옷을 입고 공허한 표정으로 서 있거나 누워 있다. 혹은 죽어가고 있다. 특히 전설적인 커스튬 디자이너 에디스 헤드가 <현기증>의 킴 노박을 위해 디자인한 그 불멸의 회색 슈트와 초록색 니트와 검은 드레스를 떠올려보라. 그 옷은 마치 금발의 킴 노박을 결박하기 위해 만든 바비 인형용 의상처럼 아름답다. 분명 히치콕은 그 의상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에디스 헤드에게 주문했을 것이다. “몸을 더 옥죄게! 킴 노박의 금발이 더 두드러지게!” 이렇게 외치는 히치콕의 모습이 떠오를 법도 하다. 우리는 알프레드 히치콕이 모든 작품 속에 새겨 넣은 금발 미녀들의 미학을 시체 애호증적인 사랑으로부터 분출하는 극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엉큼한 변태 영감의 새디스틱한 취향이라고? 맞다. 히치콕은 금발 미녀의 목을 조르면서 오르가슴을 느끼는 종류의 뒤틀린 예술가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가장 극단적인 아름다움에는 가장 치명적인 가학성이 숨어 있게 마련 아니던가. 글 | 김도훈(<GEEK> 에디터, 영화 저널리스트)

    에디터
    패션 에디터 / 김지후
    포토그래퍼
    KIM WESTON ARNOLD
    기타
    사진출처 / Jil Sander, Tom Ford Eyewear, Lan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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