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만 해도 뿌듯한 남자 배우 넷
보기만 해도 뿌듯한 남자 배우 넷과 길을 걸었다. 얼굴에 닿는 바람의 방향이 달라져 있었고, 어둠이 내린 서울은 참 괜찮은 도시였다.
낭만적 사랑과 배우 | 김무열
“이번은 쉬어야지 하는데도 잘 안 되네요.” 김무열의 말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현재 김무열은 가장 바쁜 배우 중 하나니까 말이다. <최종병기 활>이 끝나고 딱 열흘 쉬고 달려간건 <아가씨와 건달들>의 무대였다. 그사이 영화는 승승장구를 거듭해 600만 이상의 관객을 넘었지만 그는 이미 완성된 영화의 흥행 성적보다 지금 뮤지컬을 보러 온 관객들을 더 신경 썼다. <아가씨와 건달들>도 막을 내리면 이젠 정말 숨 좀 돌릴 수 있을까? “사실은 저예산 영화에 출연하기로 했어요.” 이 정도면 워커홀릭이라고 부를 수밖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이 동하는 걸 참지 못해서.”
이 사진은 스튜디오 앞의 고등학교에서 찍었다. “고등학교요, 졸업하고 한두 번 간 것 같아요.” 안양예고 시절의 그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하는 예술 학교의 눈부신 학생이었을것 같다. 하지만 김무열의 증언은 다르다. “학교에서는 정지훈이나 붐이 인기가 많았죠. 전 연기만 했어요. 연극 배우가 되고 싶었고,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 것에 대한 낭만이 있었어요.” 김무열이 소년시절부터 갖고 있었던 예술가 기질은 관객들에게는 행운이 되었다. <쓰릴 미>와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김무열은 정석이자 전설처럼 내려온다. 적어도 뮤지컬계에서 김무열은 위험한 선택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위대한 배우가 되었다. “<쓰릴 미>는 검증이 안 된 작품인데 대본을 보고 너무 끌려서 무조건하겠다고 했죠. <스프링 어웨이크닝>은 우리나라에서는 좀 시기상조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잘되었죠. 흥행이 될 작품보다는 책을 읽어보고 좋은 작품이면 해요.”
그런 김무열이 무대를 벗어나 영화로, 드라마로 종횡무진할 때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우려한 것도 사실이다. 영화나 드라마 산업이 좋은 뮤지컬 배우를 쉽게 소모하는 장면을 많이 봤고, 그건 배우를 아끼는 사람에게 꽤나 마음 아픈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최종병기 활>의 김무열이 더 반가웠는지 모른다. “이 영화가 블록버스터라는 건 나중에 알았어요. 그때 알고선 꽤 걱정을 했죠. 그만큼 제작비가 많이 들면 더 책임질 부분이 많잖아요. 블록버스터 사극 영화들의 지난 성적표도 생각났고요.” 이 영화에서 김무열은 영화 포스터에 이름이 들어가는 네 배우 중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못했어요.” 그렇다면 스스로를 칭찬해줄 법도 하지만 김무열은 냉정하게 또 자신을 평가한다. “뮤지컬에서는 책임감을 갖고 있고, 영화에서는 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참 반듯한 인생 | 유현수
유현수를 만난 사람은 공통된 코드를 읽는다. 이렇게 반듯해도 되나. 방금 세탁한 리넨을 풀을 먹여 다린 것처럼 주름 하나 없이 반듯하고, 얼룩 하나없는 깔끔함. 목소리와 말투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물론 그 모습이 전부는 아니다. 뮤지컬 무대나 연극 무대에서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뒤집곤 한다. 너무나 담백하고 바른 사람이 조금 삐뚤거나 나쁘게 보였을 때의 효과는 두 배쯤. 아니 세 배쯤 되나. 예전 뮤지컬 <진짜 진짜 좋아해>가 그랬고, 연극 <내 이름은 김삼순>이 그랬다. 물론 재미있는 스토리 하나쯤도 가지고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요? 원래 가수로 데뷔하려고 했다는 것? 그런데 소속사가 망했어요.” 그러니까 어쩌면 SS501 같은 그룹의 멤버로 유현수를 만나게 되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가 그의 데뷔작이 되었다. 그에게 가수보다 배우가 더 어울린다고 조언해 주던 교수들은 지금 그를 보면 꽤 흡족해할지도 모르겠다.
그에게는 네모난 브라운관보다 비정형의 무대가 더 어울린다. 연극 무대에 선 그는 달라 보인다. 이마에 주름 몇 개 잡는 것만으로 까칠하면서 비열하게까지 보일 수 있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며 생긴 자신감 위에 무대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의 에너지가 더해지는 배우로 한결 선명하고 충만해진다. “배우가 무대에서 관객에게 전해줘야 하는 건, 무엇보다 즐거움이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즐거운 무대를 줘야 하고 감동은 그 다음이죠. <내이름은 김삼순>에서도 그걸 가장 신경 썼어요. 흥행 연극 중 하나로 승승장구한 이 작품에서 유현수의 연기가 빛났다. 하지만 같은 연기자의 입장에서, 원전이 존재하는 작품을 연극으로 보여주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아시다시피 원래 장도영 역할은 현빈 씨가 했었죠. 관객들은 모두 그 모습을 기억할 테고요. 그래서 고민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제 그는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촬영을 앞두고 있다. “제게 연기는 늘 도전이었어요”라고 말하는 유현수에게 새로운 도전이 될 작품이다. 배우 한석규의 브라운관 복귀작으로도 유명한 이 작품은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했다. 진지한 메시지와 흥미로운 플롯, 어두운 음모가 숨어 있는, 하반기 대작으로 기대를 모으는 작품이다. <꽃보다 남자>의 F4, <성균관 스캔들>의 성균관 F4를 이어, 일명 집현전 F4로 불리는 이순지, 박팽년, 성삼문, 강희안 중에서 이순지 역을 맡았다. 세종과 뜻을 함께한 진지한 학자이며 이상주의자인 인물이다. 그러고 보니 유현수도 자신을 이상주의자에 가깝다고 말했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했다면 아마 연기를 하지 않았겠죠.” 늘 현대적인 인물을 맡아온 그에게 <뿌리 깊은 나무>는 첫 번째 사극이다. 사극은 처음이라서 꽤 긴장된다고 말하지만, 유현수의 반듯하고 바른 이미지가 사극에 썩 잘 어울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집현전 학자 사인방 중에서, 제가 나이가 가장 많아요. 아마 진지하게 연구하고 공부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할 것 같아요.” 게다가 이상주의자로서의 순박함과 진지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의 가식도 없이 시종일관 상냥한 배우를 만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좋거나 유쾌하거나 | 박정민
박정민의 얼굴을 지켜보며 대화를 한다는 건 박정민의 연기를 보는 것만큼이나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그의 얼굴은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서 변화무쌍하게 달라졌다. 고개를 조금 숙이며 말을 고를 땐 냉정하고 날카로워 보였지만 대부분 순수했고, 하하하 하고 웃을 땐 옆집 동생 같았다. 시종일관 같았던 건 재기와 총기가 듬뿍 담긴 두 눈뿐. 박정민은 한국 영화계의 올해의 발견이 되었다. 작은 영화 <파수꾼>은 성공한 예술 영화가 되고, 국제 영화제에서 여러 상을 휩쓸고 배우 박정민을 툭 꺼내놓았다. <파수꾼> 후의 행보도 흥미진진하다. 동명의 영화를 무대로 옮긴 연극 <키사라기 미키짱>에 출연하고, 이장우와 함께 드라마 스페셜 <휴먼 카지노>를 촬영하고 또 ‘내 생에 최초의 상업 영화’라고 말하는 <댄싱 퀸>도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나쁘게 말하면 여기저기, 찔끔찔끔.” 박정민은 민망한 듯 웃었지만 가슴은 당당하게 펴고 있었다. “나는 좋아하지 않는 건 안 해요. 재미없는 건 하고 싶지 않아요.”
좋은 작품이 이어지는 이유에 대해 그는 인복이 많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도대체 인복이 많다는 건 뭐지? “제가 몰랐던 기질을 그때그때 알게 하는 연출이 늘 있었어요. 특히 <파수꾼>의 윤상현 감독은 인생의 은인이죠.” 어영부영, 어중간한 길을 가고 있던 그를 배우로 만들어준 건 윤상현 감독이었다고 말한다. “연기관이 그처럼 뚜렷하게 잡혀있고, 그것을 끊임없이 말해주는 감독은 처음 만났어요.” 어린 배우와 집요한 감독, 그리고 두 사람의 열정이 만났을 때의 결과물은 좋았다. “보고 듣고, 그때그때 반응하는 감정을 놓치지 말라고 하셨죠.” 윤상현 감독은 그에게 언제나 날것의 연기를 주문했다. 알고 있었지만 방법을 몰랐던 것을 소크라테스 문답법처럼, 많은 대화로 일깨워주곤 했다. 연극 <키사라기 미키짱>에 출연을 결심한 것도 감독의 한마디가 컸다고 한다. “잘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됐어요. 캐스팅 전화를 받을 때 감독님이 옆에 있었는데, 정말 뛸 듯이 좋아하면서 너 그 작품 안 할 거면 자살해라.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가장 좋아하는 코미디의 플롯을 가진 영화라고 하셨죠.” 연기파 배우로 대성할 조짐이 보이는 박정민이지만, 그럼에도 늘 무너지고 다시 쌓는 과정을 겪는다. 영상원의 재능 있던 박정민도 실제 현장에서는 움츠러들곤 했다. 연극 무대에 처음 갔을 때도 ‘같이 연기하는 형’들이 연기 못한다고 타박을 했었단다. “방법이 있나요? 열심히 했죠. 하지만 무대의 뜨거운 분위기가 있었어요. 집에서 열 개를 만들어가면, 더 해보라고 부추기죠. 준비한 건 다 썼는데도, 또 다섯 개쯤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정말 재미있었어요.” 배우 박정민이 흥미로운 지점은, 그가 무엇을 연기하든 완전히 그 사람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나쁜 역은 박정민이 나빠서인 것 같고, 좋은 역은 박정민이 착해서인 것 같았다.<파수꾼>의 심약한 소년과 <키사라기 미키짱>이 동일인물이라니. <파수꾼> 때의 박정민은 정말 답답하고 어두워 보였지만 <키사라기 미키짱>은 좌충우돌 캐릭터 그대로였지 않나. <댄싱퀸>에서는 중국집 배달부역을 맡았다는데, 정말 그가 중국집 배달부로 보일 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은 말할 수 없는 비밀 | 김시후
김시후는 어둠과 함께 왔다. 처음으로 그가 인사를 건넸을 땐, 목소리가 공간을 꽉 채웠다. 하긴 스크린에서도 그랬었다. 미소년과 같은 앳된 얼굴을 하고서 남자의 목소리로 말했을 때 관객들은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의 얼굴과 낮은 목소리는 언뜻 믹스앤매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 지점 때문에 그의 연기가 더 진지해 보인 것도 사실이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영애의 상대역으로 분했던 어린 소년은, 사실은 어른인것이다. “목소리가 조금은 콤플렉스이기도 해요.” 김시후는 말했지만.
김시후는 누가 봐도 부러운 출발을 했다. 감독들은 그를 좋아했다. 배우를 까다롭게 고르기로 유명한 박찬욱 감독과 강제규 감독의 콜을 받았고, 올해 최고의 흥행 성적을 올리며 감독판까지 나온 영화 <써니>에서는 유일한 남자 주인공을 맡았다. 연예 신문식으로 말하자면 그는 ‘740만의 배우’다. 제각기 개성 넘치는 예쁜 여배우들이 북적대던 촬영장 속에서 그는 유일한 남자였지만 촬영장에서의 김시후는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인 ‘준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배우들과도 그냥 인사를 하는 정도였어요. 원래 내성적이라 먼저 말을 건 적도 없었어요. 혼자 있는 걸 외로워하지도 않거든요.” <써니>에서 김시후는 1인 2역을 맡았다. 어린 나미가 좋아한 준호. 성인이 된 나미가 찾아간 음악 카페에서는 준호의 아들을 연기했다. 미소년이었던 김시후가 20년 후 이경영이 된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면서도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깨닫게 해줬다. “이경영 선배님은 한마디만 하셨어요. ‘네가 나구나’.” 영화 속에서 두 역할의 성격은 분명 달라 보인다. 이경영의 아들이 된 현재의 준호는 밝고 활달했다. 비밀과 어둠을 가지고 있는 건 과거의 준호 쪽이었다. “왜 쟤가 또 나왔지? 이렇게 말하지 않도록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써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장면은 키스 신, 나미를 집에 데려다주던 장면이죠. 비밀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면, 아마 생략된 부분들 때문일 거예요. 그게 좀 아쉽긴 해요.”
최신기사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허윤선
- 포토그래퍼
- 김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