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을 앞둔 세 편의 영화 속에서 니콜 키드먼은 모두 다른 모습이다. 같은 모습이 없는 하늘과 바다처럼 다채로운 삶을 연기하며 살아가는 니콜 키드먼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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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색 드레스는 노르마 카말리(Norma Kamali).

미국 내슈빌의 와인바 360 비스트로에서 니콜 키드먼을 만났다. 모든 시선이 니콜 키드먼을 향했지만 그녀는 우아하게 우리가 함께 먹을 시저 샐러드를 주문할 뿐이었다. 남편의 어깨 너머로 니콜 키드먼을 지켜보던 여성은 옆자리 이웃과 시끄럽게 떠들던 이야기를 멈추고, 직원도 조심스럽게 니콜 키드먼을 바라본다. 모든 이의 시선이 한곳을 향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니콜 키드먼의 투명한 피부 때문에? 혹은 유명한 영화배우가 낮 1시에 번화가 식당을 찾아서일까? 이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호주 사람이라는 신기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유가 무엇이든 모든 시선이 화장실을 향하는 니콜 키드먼의 우아한 걸음, 특히 그녀의 다리에 맞춰져 있다. 어떤 사람도 그녀처럼 걷지 않기에.

니콜 키드먼은 양팔을 몸에 단단히 붙인 채 완벽한 자세로 2초마다 한 걸음씩 움직인다. 이를 보는 주변 사람들에게 니콜 키드먼의 존재는 신의 축복과 다를 게 없다. 시선은 줄곧 니콜 키드먼을 향하지만 누구도 말을 건네지 못한다.

<디스트로이어(Destroyer)>의 감독 카린 쿠사마가 말했다. “니콜 키드먼은 누가 봐도 조각상이죠.” 우리는 오늘 그녀의 최근작인 <디스트로이어>와 <보이 이레이즈드(Boy Erased)> 등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될 것이다. <디스트로이어>에서는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갱 두목에게 복수를 펼치는 경찰 에린 벨을 맡았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동성애자인 아들이 전환 치료를 받게 하는 <보이 이레이즈드> 또한 어려운 작품이다. 그리고 아틀라나 여왕 역의 <아쿠아맨(Aquaman)>도 잊어선 안 된다.

격정적 감정 연기는 그녀의 캐릭터가 되었다. <래빗 홀>에서 슬픔에 폭발하는 그녀를 기억하는가? 마음을 저릿하게 하던 <물랑루즈>는? 극한 시련에 빠진 <도그빌>은? 아마 니콜 키드먼이 등장한 영화 중 적어도 하나는 봤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할리우드 최고 여배우 5명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니콜 키드먼의 이름은 빠지지 않을 것이며, 아마 3명을 대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렇기에 모두가 하나같이 그녀를 바라본 것이 아닐까?

이곳은 내슈빌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다. 곧 고급 비스트로, 필라테스 스튜디오, 주스바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올해 51살의 니콜 키드먼이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은 2006년, 컨트리 뮤직 가수이자 같은 호주인인 키스 어반과 결혼하면서부터다. 이후 부부와 자녀가 함께 쭉 이곳에서 지냈다. 오늘 인터뷰가 끝나고 니콜 키드먼은 딸이 다니는 리딩 코너 학교를 찾아 책을 읽는다고 했다. “전날밤 딸이 책을 한 권 고르면 다음 날 제가 그 책을 학생들 앞에서 읽어요. 책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를 연기하죠.”

“저는 왼손잡이고 대화할 땐 정해진 흐름이 없는 편이에요. 취향도 정말 이상하죠. 지금 그걸 보고 계신 거예요.” 상처가 짓이겨진 경찰부터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목사 아내, 그리고 만화 영화에 나오는 아틀란티스의 여왕을 오가는 생활을 하는 걸 두고 니콜 키드먼이 한 말이다. “전 30년 전이랑 똑같이 일하고 있어요. 영화를 찍을 때나 무언가를 할 때, 만든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을 때 설레죠.” 문득 니콜 키드먼의 머리가 젖은 걸 발견했다.

“남편이 오늘 아침에 캐나다로 가야 해서요, 같이 수영했어요.”

바보 같은 질문을 뱉고야 말았다. “집에 수영장이 있어요?” “네, 있어요.” 마음을 가다듬고 질문을 던졌다. “서로 물장난을 치나요, 아니면 트랙을 도나요?” “둘 다 호주 사람이라서요, 물속에 있는 게 즐거워요.” 그녀가 답했다. “해변가에 집이 있어서 아침을 먹기 전에 해변에 가요. 리즈 위더스푼이 바로 옆 집에 사는데 ‘사랑꾼들, 대체 물속에서 뭘하는 거야? 호주 사람답다!’라며 늘 저희를 놀리죠. 리즈는 거의 해변에 가지 않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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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니트 소재의 연두색 드레스는 미쏘니(Missoni). 귀고리는 히마구아스(Gimaguas).

여러 질문이 떠올랐다. 리즈 위더스푼을 짜증나게 하는 방법은 또 없는지, 어떻게 물이 좋다는 건지, 어쩌면 진짜 목이 마르거나 비유적으로 목마른 욕망 때문에 <아쿠아맨>이란 작품에 끌렸던 건 아닌지, 보통 어떤 것을 갈망하고 목말라하는지. 하지만 인터뷰 내내 끊임없이 떠오르는 궁금증은 하나였다. 니콜 키드먼이란 영화배우로 살아가는 건 어떤지.

니콜 키드먼의 별자리는 쌍둥이자리와 게자리 사이라고 한다. 쌍둥이자리는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특징이고 게자리는 다른 별자리의 엄마 역할을 한다. 별자리 얘기를 꺼낸 것은 니콜 키드먼도 자신의 성격을 잘 표현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니콜 키드먼의 배역을 엄마로 정의하면 너무 단순화되는 면이 있지만, 엄마가 갖는 모성애는 각 역할에서 강력한 힘을 갖는다. <디스트로이어>에서 니콜 키드먼은 성인이 되는 딸과의 복잡한 관계를 헤쳐나가면서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 깊은 신을 만들어낸다. <보이 이레이즈드>에서 연기한 낸시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동성애자인 아들이 전환 치료를 받게 한다. 자신의 신념과 달라도 아들을 구하도록 낸시를 움직인 건 다름아닌 모성애였다.

“엄마를 연기하기 위해서는….” 입을 뗀 니콜 키드먼이 잠시 말을 멈췄다. 1분간의 정적 속 무한하고 조용한 세계가 펼쳐졌다. 마치 엄마를 연기할 수 있다는 건 뜻깊고 감격스러운 선물인 듯이. 물론 그녀가 엄마 연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니콜 키드먼은 네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이건 또 다른 얘기지만.

“<보이 이레이즈드>에서의 낸시는 고군분투해요. 낸시는 변화하는 사람이죠. 저는 그게 좋아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요.” 낸시는 <보이 이레이즈드> 작가의 어머니이자 실화의 주인공 마사 콘리를 바탕으로 한 캐릭터다. 영화 속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낸시가 종교적 신념에도 불구하고 아들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끝없는 사랑을 택했을 때이다. 마사 콘리와 니콜 키드먼은 영화 제작 기간 동안 함께 일했다. 니콜 키드먼은 “나를 보살펴줄 여성들한테 마음이 갔죠. 나도 좀 저런 사람이 필요하다고도 느꼈어요”라고 소감을 전했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니콜 키드먼에게 신념과의 싸움은 낯설지 않다. 늘 끼고 다니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십자가는 할머니께서 주신 선물이다.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십자가를 쥐며 “저는 반드시 신이 존재한다고 믿어요. 한때는 수녀가 되고 싶었죠. 그렇게 되진 않았지만 과거엔 진심으로 수녀가 되고 싶었어요.”

<보이 이레이즈드> 속 낸시가 구사하는 미 남부의 느릿한 말투는 니콜 키드먼이 10년간 내슈빌 지역에 살면서 익혔다. 니콜 키드먼은 호주 중서부 영어도 혀를 마는 ‘R’ 발음이 적기 때문에 호주 영어에 가깝다고는 하지만. <디스트로이어>에서의 목소리는 또 완전히 다르다. 전직 경찰이었던 벨 형사는 초췌한 모습에 술을 끼얹은 듯 걸으며 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한다. 행동을 취할 땐 고민이 없다. 니콜 키드먼이 설명하길, “연기할 때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죠. 자연스럽게 내면에서 나왔어요.”

‘내면에서 나왔다’는 신비한 표현은 배우들이 자주 쓰는 말이다. 마치 이들의 머릿속엔 갓 짜낸 감정이라곤 없는 것처럼. 하지만 니콜 키드먼의 경우, 살아온 경험에서 나온 풍부한 묘사가 머릿속에 가득하다. 벨 형사의 뒷이야기는 영화 대본엔 나와 있지 않다. 유일한 설명이라면 “힘든 삶을 살았어요”라는 짧은 대사뿐. 이 한 줄의 대사를 기반으로 그녀는 캐릭터의 방향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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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니트 소재의 연두색 드레스는 미쏘니. 귀고리는 히마구아스.

<디스트로이어>의 주요 장면은 LA공항 근처에서 발생한 은행 강도 신이다. 여기서 니콜 키드먼이 맡은 벨 형사가 혼다 차 트렁크에서 반자동 소총을 꺼내 서슴없이 거친 모습을 보이는 장면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인상 깊었다. 몇 분간 이어지는 은행 강도 장면에서는 자동차가 직각으로 떨어지는 연출이 있다. 영화 속 장면뿐 아니라 제작 환경도 그만큼 다사다난했다. 화려한 불꽃이 번지고 유리가 깨지며 공포탄을 발사하는 연기자는 적어도 여섯이었고, 한 스태프에게서 시작된 감기가 돌고 돌아 니콜 키드먼도 감기에 걸려 고생했다.

지독한 감기가 걸렸을 때를 생각해보라. 삶의 에너지가 사라지고 일찍 죽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아주 지독한 감기 말이다. 게다가 감기를 앓으며 4일을 꼬박 일해야 하는 상황에 매일 한 시간의 달리기, 총격 신도 추가된다면 어떨까. 쿠사마 감독은 당시를 회상하며 “스태프에 이어 니콜 키드먼도 감기에 걸렸지만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땀과 숨가빠하는 모습은 연출이 아니라 실제였다”라고 말했다.

“당시 열이 높았어요. 소품용 총기를 들었을 때, 이거 정말 무겁다고 느꼈고 심지어 걸을 수도 없었죠. 앉았다가 나중엔 눕기도 했죠.” 다행히 영화 제작팀이 일찍 귀가할 수 있도록 해주었지만, 저예산 영화라 추가 촬영이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하지만 니콜 키드먼은 프로였고, 다음 날 그녀는 정해진 시간에 나타나 촬영을 마쳤다.

가끔씩 그녀는 자신이 맡은 배역들에게 몸이 지배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질문에 대답할 때의 니콜 키드먼은 평소보다 말을 흐렸다. “이상했어요.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Big Little Lies)>을 촬영할 때도 그랬죠. 이상하게도 열병 같았죠. 흔들렸어요.” HBO 드라마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에서 니콜 키드먼은 신체적, 감정적으로 핍박받는 변호사 출신의 전업 주부 셀레스트 라이트 역을 맡았다. “역할이 제게 스며들기 시작했죠. 아주 조금씩요.”

유일하게 감정 소모가 심하지 않았던 작품은 <아쿠아맨>이다. 니콜 키드먼이 연기한 아틀라나 여왕은 금발머리에 호리호리하고 광대가 튀어나온, 딱 니콜 키드먼의 모습이다. 아틀라나 여왕은 아기에게 말을 걸고 바다로 뛰어들었으며 리넨 팬츠를 입고 삼지창으로 적들과 맞섰다. 편한 차림의 아틀라나 여왕은 자애로우면서도 막강한 힘을 가졌다. 이게 내가 아틀라나 여왕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전부다. 이 이상은 더 말할 수가 없다.

여전히 나는 니콜 키드먼으로 산다는 게 어떤지 모르겠다. 가끔은 괴롭고 약해진다는 것 외에는. 인터뷰 도중 니콜 키드먼이 화장실에 가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열병 같았다’는 단어를 찾아보고 다시 한번 그 단어를 되뇌었다. 그녀는 무엇이든 똑 부러진 답을 들려준다. 특히 ‘니콜 키드먼이 되는 건 어떤가’라는 실없으면서도 무례한 질문을 받았을 때도 그랬다. 내가 “셀럽이 되는 건 어떤가요?”라는 바보 같은 질문을 뱉은 순간에는 “저는 제가 셀럽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답했다.

“네? 그럼 스타 영화배우라고 하죠.” 이런 나의 말에도 그녀는 “전 스타 영화배우도 아니에요. 전 그저 배우죠. 비욘세가 셀럽이고, 셀럽은 더 큰 걸 아우르는 사람이죠.”

동의할 수 없지만 니콜 키드먼은 자신은 좀 더 부분적으로 특화된 사람이라고 말한다. 어떤 배우든 인기를 배우로서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테니 이런 니콜 키드먼의 생각이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다. 셀럽에 관한 다른 질문을 궁리하는 동안 창밖에 하얀 SUV가 와서 섰다. 니콜 키드먼은 이 차를 타고 딸아이의 학교로 이동해 책을 읽으러 갈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출연한 영화가 개봉에 맞춰 스케줄을 소화할 것이다.

유명한 배우라면 하나같이 일이 전부라고 말하듯 니콜 키드먼도 마찬가지였다. 몸이 떨리고 면역력이 약해져 일이 고통스러워도 동시에 즐겁다고 한다. 그리고 늘 배려가 몸에 배어 있다. 니콜 키드먼은 말했다. “배우는 받는 사람이 되어선 안돼요. 무언가를 주고 베푸는 사람이어야 해요.”

인터뷰를 마치고 니콜 키드먼은 하얀 SUV에 몸을 실었다. 차를 타고 도착한 다른 곳에서는 아마 영화배우 니콜 키드먼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글쎄. 하지만 니콜 키드먼이 떠나며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리는 동안, 그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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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본 장식 드레스는 힐리어 바틀리 (Hillier Bartley). 귀고리는 델피나 델레트레즈(Delfina Delettre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