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속에서 서로의 물리적 거리는 멀어졌지만, 마음만은 더욱 가까워졌다. 뉴욕, 방콕, 홍콩의 사람들이 보내는 안부 편지. 모두 잘 지내나요?

 

[ 뉴 욕 에 서 ]

가끔 달력을 보며 날짜를 센다. 24일째,  38일째, 55일째, 이 글을 쓰는 5월 5일 지금은 딱 60일째다. 60일 동안 집밖에 나가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3월 6일, 오래전 계획했던 스페인 북부 여행으로부터 뉴욕 집으로 돌아와 자가격리를 시작하자마자 나를 둘러싼 세상은 정신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692 뉴욕 비상 알람과 뉴스 브레이크 앱이 시도때도 없이 울리고 믿을 수 없는 숫자가 매일 그래프를 갈아치웠다. 중국, 한국, 이탈리아를 덮친 그림자는 방금 전에 다녀온 스페인으로 넓혀가더니 미국에, 그것도 내가 사는 뉴욕에 더 짙게 드리웠다. 그러던 차 3월 15일 뉴욕의 학교, 직장뿐 아니라 레스토랑, 상점 등에 셧다운 명령이 떨어졌다. 에센셜 워커(Essential Workers) 외엔 나다닐 수 없고 식료품, 의료품을 사는 이유 말고는 집에 머물러야 하며 6피트의 사회적 거리 두기 필수, 그러면서 ‘마스크는 쓰지 말라’는 이해할 수 없는 명령도 있었다.

우왕좌왕 걱정만 하던 나는 셧다운 직전 칩거를 준비하며 동네 마트를 돌다 심하게 좌절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마스크는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지만 휴지도, 새니타이저도, 해열제도, 쌀, 달걀, 파스타, 시리얼, 통조림도,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생전 먹지도 않는 우유와 냉동감자, 과자류 등 남은 것들을 어깨 빠져라 이고 집에 돌아와 온라인 사이트들을 뒤졌다. 역시 없었다. 사재기를 경멸하던 나는 이제 자신을 경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휴지와 먹거리에 대한 걱정은 코로나만큼이나 두려운 혐오 범죄로 곧 덮였다. 길을 걷다가,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었다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총에 맞거나 흉기에 찔렸다는 뉴스가 핸드폰을 쉴 새 없이 울려댔다. 그때마다 나는 지도를 열어 거기가 어딘지 시간은 몇 시였는지, 도움도 되지 않고 의미도 없는 것들을 검색하면서 하루를 버렸다. 코로나에 대한 모든 뉴스를 읽고 희망과 절망 사이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가며, 내 진짜 두려움이 코로나인지 범죄인지 화장지인지 쌀인지조차도 헷갈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가장 큰 괴로움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었다. 외로움.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하루의 모든 행동을 위한 자리를 창문 앞으로 옮겼다. 높은 의자를 책상 삼아, 작은 바구니를 식탁 삼아 일도 하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때론 그냥 앉아서 창밖 보는 일에만 몰두한다. 그날의 기운과 해가 지는 것, 창밖 나뭇잎과 창가에 어설프게 심은 파가 자라는 것을 관찰하고, 나에게 하루도 빠짐없이 연락하는 네 명의 친구와 SNS에서 만나는 여러 친구와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끝나 있다. 오늘도 이렇게 쓸데없이 가버렸어, 라고 잠들기 전 친구에게 문자하지만 다음 날도 똑같을 것을 안다.

외로워. 친구들 만나고 싶어. 그럴 때마다 나는 코로나 앱을 켜고 미국 120만 명의 확진자와 7만의 사망자, 뉴욕 30만 확진자와 2만5000명의 사망자, 오늘도 뉴욕 사망자에 얹힌 405란 숫자를 들여다본다. 저녁 7시를 기다려 프런트 라인에 있는 사람들에게 창문을 열어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집안에서 배부른 한탄이나 하고 있는 나를 꾸짖을 친구에게 연락한다. 우리에겐 가장 소중한 가족을 매일 병원에 보내는 친구가 있다. 우리의 딜레마는, 동거인이 있는 사람은 혼자 있는 친구 때문에, 혼자 있는 사람은 최전선에 가족을 내보내야 하는 친구 때문에, 매일 우리가 감사해야 할, 기억해야 할 모든 사람 때문에 힘들어도 힘들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농담이 있다. 병원으로 출근해야 하는 가족을 깨우며 ‘너무 힘들면 내가 다리 하나 부러뜨려줄까?’라 했다든지, 동거인이 달걀찜이 먹고 싶다길래 ‘달걀을 세 개나 쓰는 건 사치야!’라 했다든지, 하루를 버티게 하고 외로움을 덜게 하는 헛헛한 농담들. 농담 사이에 우리가 함께할 외출, 여행 등 희망을 간간이 섞는다. 그런 날이 오겠지. 곧 다들 만나겠지. 그게 다음 주로 다가온 내 생일날은 아니겠지만.

– 이현수(미디어 2.0 편집장) 

 

[ 방 콕 에 서 ]

‘잘 지내? 그나저나 지금 어디야? 도쿄? 방콕? 서울?’ 코로나19로 지인들과의 뜸했던 안부를 주고받으면, 제일 먼저 받는 질문이다. 나는 ‘방콕에서 방콕 중’이다. 2016년, 나는 일본의 한 IT회사에 취업해 도쿄로 건너갔다. 생활도 일도 안정되어가던 4년 차 때, 매년 약 30명의 사원을 1년간 각국에 있는 지사로 파견하는 회사 연수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방콕 지사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연수를 빙자한 1년간의 바캉스라는 불순한 의도로 방콕에 발을 들였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담당 프로젝트의 업무량이 많아 8개월간 가본 관광지라곤 왕궁이 전부다. 매일 야근에 집과 회사만을 왕복하는 생활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버티며, 2월 중순 무렵 기나긴 프로젝트는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일에서 해방된 동시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팬데믹이었다.

연간 2000만 명의 사람들이 세계 각국에서 방문하는 도시이니만큼, 방콕에서는 외국인에 의한 감염을 가장 우려하고 있었다. 3월로 들어서면서 방콕 시에서는 코로나19 확산 방지 조치로, 슈퍼마켓이나 약국 등을 제외한 상점시설, 스포츠 및 야외 시설을 폐쇄할 것을 발표하며 모두 재택근무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며, 4월부터는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외출을 제한한 야간통행금지령이 실시되었다. 주류 판매가 전면 금지되고(현재는 일부 허용) 태국의 최대 명절인 ‘송크란’도 연기되었다. 그러던 중, 일본 본사에서 각국에 파견된 연수생들은 신속히 일본으로 귀국할 것을 통보했다.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나는, ‘태국으로 파견된 일본회사 소속의 한국인’이라는 것. 일본 정부가 태국을 입국 거부 대상 지역에 추가하면서, 4월부터 해당 지역에 체류 이력이 있는 외국인은 취업비자가 있어도 입국을 거부한다는 항목이 생겨났는데, 그게 바로 나였다. 그렇게 다른 일본 연수생들은 떠났고, 나는 그들이 남겨놓은 업무를 고스란히 떠안은 채, 기약 없이 방콕에 남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판매금지 전 궤짝으로 사놓은 술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리모트워크, 그랩 푸드와 푸드 판다 같은 배달문화가 발달된 방콕이었기에 재택근무 생활에는 딱히 불편함은 없다. 하지만 일본 귀국 여부를 놓고 한바탕 소동을 벌이면서 깨달은 게 있다. ‘한국, 일본, 태국’이라는 세 집단의 교집합 속에 살면서 모든 혜택을 누려왔지만, 코로나19로 각 집단들이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시하며 멀어진 결과, 교집합에 속해 있던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게 되었다. 평소 각 집단들의 보호와 떠먹여주는 정보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어느새 게으르고 안일한 태도로 타향살이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번 달 전기요금명세서에는 쭉 공백이었던 하단에 무엇인가가 적혀 있었는데, 확인해본 결과, 태국 정부의 경기부양책으로 전기세를 환불해준다는 내용이었다. 그랬다. 타국에서 홀로 살아남기 위해선, 사소한 것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정보를 찾아낼 줄 알아야 한다.

해가 졌음에도 꺼지지 않는 불빛으로 환하고, 시끌벅적한 야시장이 가득했던 방콕의 밤이, 침묵과 어둠에 잡아먹힌 지도 한 달이 넘어가고 있다. 최근 규제가 조금 완화된 듯하지만, 관광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태국인들에게는 이미 치명타를 입힌 후다. 방콕에서 고작 300일밖에 살지 않은 내가, 과연 그 상처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후텁지근한 공기, 각종 향신료로 뒤덮인 거리의 향, 나긋나긋한 태국어들. 이미 내 몸과 마음에는 방콕이라는 도시가 스며들어 있었기에, 코로나19가 방콕에 끼친 위협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노트북을 켜며 근무를 시작할 때, 현지 팀원들이 안녕하냐고 안부를 물으면, 나는 잘 지낸다고 답한다. 그리고 그들의 행복과 안위를 기원하면서, 안녕하냐고 물었을 때 그들의 대답을 들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사바이디카-(잘 지냅니다)”라고.

– 김기연(엔지니어) 

 

 

[ 홍 콩 에 서 ]

2차 재택근무에 갇힌 공무원 18만 명이 풀려난 5월 둘째 주 월요일. 민간 기업들도 슬슬 재택근무를 해제하고 4명까지만 모일 수 있었던 규정도 인원이 늘 거란 전망. 내가 한 건 딱히 없지만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기분이다.

나는 홍콩에 산다. 지난 1월 말, 설을 한국에서 보내자마자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오래전 확정된 국제 행사에 참석해야 해서다. 그런데 마스크 좀 구해오라는 남편 부탁에 열 몇 장만 산 걸 곧 후회할 만큼 기내에서부터 분위기가 흉흉했다. 1월 25일 홍콩 정부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설 명절 행사를 모두 취소하고 개학을 연기했기 때문. 도착하니 그 붐비던 공항이 휑했고 내가 참석하려던 행사도 결국 직전에 취소됐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단 느낌이 들었다.

홍콩 사람들은 17년 전 사스 때 공포를 떠올린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그 집단적 악몽은 좋은 방향으로 작동하긴 했다. 정부가 권장하기도 전 다들 몇 시간 줄을 서서라도 마스크를 구해 썼고 강박적으로 손을 씻었으며 사스 때 경험을 축적한 공중 보건 전문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공무원들이 재택근무에 돌입하자 곧 민간 기업이 뒤따랐다. 남편과 나도 집에서 24시간을 마주치게 됐다. 처음엔 많이 싸웠지만 차츰 적응이 됐다. ‘따로, 또 같이’가 원칙. 공공 체육 및 문화시설이 폐쇄됐고 출장, 홍콩 아트바젤 같은 대형 행사마저 취소되었다. 행사 기획을 전문으로 하는 지인에겐 차마 안부조차 물을 수 없었고 설 지내고 보자던 사람들과의 약속은 기약이 없게 됐다. 헛소문에 휴지 사재기가 극심해졌다. 평소 남이 와서 부딪쳐도 먼저 사과하던 사람들이 맞나 싶을 만큼 휴지를 선점하려고 다투는 모습이 계속 보도되고, 종국엔 너무나도 ‘웃픈’ 휴지 무장 강도 사건까지 터졌다. 우린 ‘참전’을 안 했지만 마침내 휴지가 떨어지자 미국 아마존에서 가까스로 ‘직구’할 수 있었다.

2월 4일 첫 사망자가 나오자 의료인 수천 명이 중국 국경을 막으라며 파업, 시위에 돌입하자 정부는 곧 두 곳을 제외하곤 국경을 폐쇄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한 아파트 같은 위치, 다른 층에서 나오자 다들 사스 때 321명이 감염돼 42명이 숨진 아파트를 떠올렸다. 홍콩의 세계 최고 밀도 주거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3월이 되자 분위기가 또 뒤집혔다. 사태 초기 안전해 보였던 유럽, 미국 등으로 피난 갔던 사람들, 유학 중이던 학생들이 대거 귀국하는 2차 파동이었다. 머리는 최대한 짧게 잘라둔 게 다행이었고 식수가 떨어지면 뒷산에 가서 퍼야겠단 생각까지 했다. 안타까웠던 건 악명 높은 홍콩의 ‘새장 집’, ‘관 집’에 사는 빈민층이다. 집이라고 하기엔 운신도 어려운 공간뿐인데 집단 감염 위험은 최고로 높아서, 아예 노숙을 선택한 사람도 있다고 하니까. 정부가 모든 입국자 2주 격리, 전자 팔찌란 카드를 꺼내 들었다. 비거주자의 입국이, 4명 초과 모임이 금지됐다. 란콰이펑과 침사추이에서 집단 감염이 나오자 4월 3일에는 모든 바와 펍이 강제 폐쇄됐다.

지금은 지역 내 감염 0명 상태가 3주를 향해 가는 중이다. 누적 사망자는 4명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홍콩 주민 대부분은 안심하긴 아직 이르다고 생각한다. 강력한 입국 제한과 휴교 조치 등으로 우물 안만 청소해놓은 지금이 일상이라고 할 순 없기 때문이다. 석 달 넘게 가족과도 생이별 중이고 수십 년 된 식당들이 문을 닫았다. 지구촌이 일상으로 돌아가고 서로를 혐오하지 않고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 이선배(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