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가능한 K-팝 ‘그룹’의 미래
왜 영원할 것 같던 어떤 순간은 영원할 수 없을까? K-팝 ‘그룹’은 앞으로도 지속 가능할까?

2009년 9월, 나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JYP 구 청담 사옥 앞에 앉아 있었다. 박재범의 2PM 탈퇴 소식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고작 데뷔 2년 차에 접어든 신인의 너무 빠른 탈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물론 탈퇴는 철회되지 않았고, 당시 소녀들에게 <무한도전>과도 같았던 2PM의 인기 예능 프로그램 <와일드 바니> 마지막 화 또한 영영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와 함께 2PM을 향한 내 마음도 조금 식었다. 내 ‘최애’는 다른 멤버였음에도, 한 명이 떠난 그룹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게 느껴졌달까? 그 후로 시간이 많이 흘렀다. 훌륭하게 성공한 박재범이 직접 제작한 보이 그룹 ‘롱샷(LNGSHOT)’의 ‘롱버지’로서 첫 번째 봄을 맞이하고 있을 때, 내게 날아든 것은 또 다른 탈퇴 소식이었다. 지난 3월 10일 전해진 희승의 엔하이픈(ENHYPEN) 탈퇴, 그리고 4월 3일 공식화된 마크의 NCT 탈퇴 및 SM과의 계약 종료 뉴스. 어안이 벙벙하기는 10여 년 전과 다를 게 없었다.
K-팝 그룹에서 탈퇴나 멤버 축소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지금 활동하는 그룹 중 멤버 변동이 없는 팀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지경이다. 계약 종료는 더 흔하다. 연차가 쌓인 그룹일수록 서로 다른 소속사에서 활동하다가 팀 활동할 때만 뭉치거나 직접 기획사를 차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우연히도 비슷한 시기에 연달아 전해진 희승과 마크의 탈퇴 소식은 그동안 익숙해진 공식과 전혀 다르다는 점에서 팬덤에 길고 큰 충격을 남겼다. 엔하이픈과 NCT 모두 최정상의 인기를 누리는 ‘현역’이라는 점, 그리고 두 멤버 모두 특별한 논란거리조차 없다는 점이 그랬다.
희승은 소위 ‘마의 7년’이라는 재계약 시점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그룹을 떠나며, 소속사인 빌리프랩에서 솔로 활동을 이어가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렸다. 이미 SM과 한 차례 재계약을 진행한 마크는 10년 계약의 종료를 앞둔 시점이었다. NCT 127과 NCT DREAM 양 팀에 속한 멤버였던 마크가 떠나면서 127은 7인조로, DREAM은 6인조로 재편된다. 엄청난 여파다. 이처럼 각기 다른 맥락과 상황에서 진행됐지만, 희승과 마크의 탈퇴 입장문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자신의 음악적인 꿈을 위해’ 떠났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명시했다는 것이다. 이를 입증하듯 희승은 에반(EVAN)이라는 새로운 활동명과 함께 6월 솔로 데뷔를 빠르게 발표했고, 마크는 미국 유명 레이블의 스튜디오에서 작업 중인 장면이 곧바로 포착됐다. 이 또한 K-팝 그룹 멤버의 솔로 활동은 팀을 유지하면서 병행된다는 일반적인 공식에 대치되는 셈이다. 그런데 과연 산업의 ‘일반적인’ 공식이라는 게 대체 무엇일까? 대부분 10대부터 연습생 생활을 시작하는 아티스트가 어느 날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발견했다고 말할 때, 이를 막을 수 있는 권리는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
한 라디오 프로그램 PD에게 ‘다른 장르와 구분되는, K-팝의 가장 독특한 특성이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나는 ‘멤버가 여러 명’이라는 점이라고 답했다. 음악적 장르의 경계는 희미해진 지 오래. 춤은 테이트 맥래이(Tate McRae)가, 비주얼은 레이디 가가와 로살리아(Rosalia)가 압도한다면, 여러 명의 목소리와 개성에 맞춘 구성이야말로 K-팝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숙소까지 같이 쓰는 그룹 활동 자체가 가능한 건, 집단의식이 강하고 목표를 위해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하는 걸 자연스럽게 여기는 한국 특유의 문화 때문이기도 하다.
비슷한 시기 캣츠아이(KATSEYE)의 멤버 마농이 모두가 꿈의 무대라고 하는 코첼라 입성을 앞두고 사실상 활동을 중단한 것이 크게 충격적이지 않았던 것은, 지극히 한국적인 K-팝 그룹 생활을 유럽 출신인 멤버가 지속하는 게 쉽지 않음을 내심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계약’이라는 명백한 법적 장치와 성공적으로 브랜딩된 팀의 서사를 완전체로 지속할 때 확보되는 수익과 명예는 집단의 결속을 강화했다. 그러나 그룹 유지를 가능하게 한 요소가 더 이상 예전처럼 강력하게 작용할 수 없게 된다면? ‘팀이 잘돼도’ ‘회사나 멤버 어느 한쪽의 치명적 과오가 없어도’ 팀을 떠나는 게 가능해진다면, 앞으로의 그룹은 어떻게 유지돼야 할까? 일련의 사건들을 바라보는 관계자들의 시각이 문득 궁금해졌다.
“모든 게 사람과 사람의 일이잖아요. 당연히 서류상 의무는 이행해야겠지만, 계약으로 묶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가장 중요한 건 멤버들 사이의 신뢰와 끈끈한 관계인데, 그건 강제한다고 되는 게 아니죠. 그래서 서로 건강한 유대감을 쌓아가는 연습생 시간이 긴 게 가장 좋기는 해요. 하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그 긴 시간이 다 투자이고 비용이니 쉽지 않죠. 연습생 생활을 너무 일찍 시작하는 요즘은 소속사 한 곳에만 있다가 데뷔하는 경우도 찾기 어렵고요.” 오랫동안 신인 그룹을 기획해온 매니지먼트 팀장의 말에 BTS, 세븐틴, 트와이스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긴 연습생 생활을 함께한 멤버들과 다 같이 10년 이상을 버틴 팀들이다. 소속사 A&R 출신 지인은 고도화된 대형 레이블 위주의 K-팝 시스템이 문제일 수 있음을 지적했다.
“요즘은 소속사의 기획하에 전적으로 팀이 꾸려지잖아요. 회사가 제시한 성공의 방향성을 멤버들도 처음엔 믿고 따르겠지만 아티스트로서 주도성을 더 원하는 순간, 다른 형태의 활동을 생각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봐요. 특히 나날이 팬과의 상호작용 방식이 다양해지는 요즘, 모든 멤버가 이런 기대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건 아니죠. 다들 처음에는 춤과 노래만 잘하면 된다고 믿고 시작했으니까요.” 한 오랜 K-팝 팬은 그룹을 좋아하는 일의 피로도를 언급하기도 했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이돌 그룹이라는 건 아티스트로서 1인분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한 팀이 되어 관계성이나 서사로 그 틈을 채우는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SNS에서 본 적이 있어요. 아이돌이라고 해서 다 실력이 부족하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멤버들의 상호작용이 중요하다는 거죠. 그런데 요즘은 2~3년 정도 활동하는 서바이벌 그룹이 계속 나오면서 팀의 서사나 관계가 압축적으로 빠르게 소비되잖아요. 한편 연차가 쌓인 팀은 멤버가 ‘재계약’이나 ‘정산 비율’을 계속 언급하면서 결국 이 관계가 비즈니스를 토대로 한 것임을 인지시키기도 하죠. 팬 입장에서는 모든 게 적나라하고 공식화된 것 같아요.”
K-팝 세계에서 영원을 말하지 않는 팀은 없다. “여러분, 영원히 저희 좋아해주실 거죠?” “오늘 같은 하루가 영원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린 연인들 사이에서나 오갈 것 같은 달콤한 약속이지만, 말을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라는 걸 안다. 다만 많은 돌발 상황과 이별의 경험이 중첩되면서 진심이 꼭 진실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나날이 희석되는 감동을 다른 방식으로 메우는 방법을 터득했을 뿐이다. 실제로 불가능해 보이는 영원을 좀 더 지속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이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개인이 운명 공동체가 되어 한 시기를 같이 보낸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더 기적 같은 일이며, 누구나 각자의 삶의 기로에서는 각기 다른 판단을 내린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받아들이기는 힘든 것. 그건 여러 가지 기이한 근본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K-팝 자체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기 때문일 테다. 어쩌면 계속 상처 받더라도 또 다른 사랑과 응원을 보낼 심장을 가진 이들만이 계속 이 신을 남아 떠도는 걸 수도 있고. 요즘 롱샷의 ‘자컨’을 매일같이 보고 있는 내 이야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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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레이터
- 신연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