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한 셔츠가 다시 가장 현대적인 옷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런웨이는 지금 가장 익숙하고 일상적인 옷으로 향하고 있다.

패션은 늘 새로운 것을 원한다. 새로운 얼굴과 새로운 실루엣, 새로운 시대. 그러나 디자이너들은 정말 중요한 변화의 순간마다 가장 익숙한 옷으로 돌아가고는 한다. 최근 럭셔리 하우스의 흐름 역시 다르지 않다. 특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바뀌는 등 체제를 새로 정비하는 순간, 이들은 극적인 드레스나 강렬한 시그너처 대신 셔츠 같은 기본 아이템을 먼저 꺼내 든다. 마치 복잡한 문장을 모두 지우고 첫 줄부터 다시 쓸 각오를 한 사람처럼 말이다.
2026 S/S 컬렉션에서 마티유 블라지가 선보인 샤넬 역시 비슷했다. 사람들은 새 디자이너가 오면 강렬한 선언 같은 룩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이전 시대와의 차이를 단번에 보여줄 상징적인 룩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블라지가 이끄는 샤넬에서 의외로 시선을 사로잡은 건 조용하고 군더더기 없는 셔츠였다. 장식은 단조롭지만 그 공정과 바탕의 이야기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셔츠에 대한 영감의 원천은 하우스의 창립자 가브리엘 샤넬이다. 그가 자신의 연인인 보이 카펠에게 빌려 입은 샤브레 셔츠. 블라지는 이 셔츠를 재현하려고 프랑스의 유서 깊은 셔츠 메이커인 샤브레와 협업했다. 덕분에 셔츠는 남성복 특유의 낙낙하고 여유로우면서도, 샤넬만의 여성적 힘을 더해 날렵하고 단정한 비율로 완성됐다. 셔츠 한 장은 화려한 장식보다 지금 샤넬이 무엇을 고민하는지 더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이것은 단순한 미니멀리즘이라기보다 브랜드의 구조를 다시 정비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생각해보면 셔츠는 참 묘한 옷이다. 누구나 입는 동시에 가장 다루기 어려운 옷이기도 하다. 티셔츠처럼 편하게 뒤집어쓸 수도 없고, 재킷처럼 존재감으로 밀어붙이는 데도 한계가 있다. 칼라의 각도와 어깨선, 소매 길이, 원단의 밀도 같은 작은 차이가 전체 분위기를 좌우한다. 그래서 셔츠는 디자이너의 미감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아이템으로 알려져 있다. 기본 아이템일수록 브랜드의 실력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법. 팬데믹 이후 몇 시즌 동안 패션은 억눌린 에너지를 쏟아내듯 지나치게 많은 이미지를 소비해왔다. 더 자극적인 컬러, 더 과장된 실루엣, 더 빠르게 SNS에 퍼질 장면까지(AI의 등장은 이를 더 가속화했다). 런웨이는 현실보다 이미지에 가까워졌고, 옷은 실제 생활과 점점 멀어지는 듯했다.
물론 패션은 여전히 판타지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사람들은 조금 다른 종류의 ‘럭셔리’를 원하기 시작했다. 과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옷, 오래 입을 수 있는 옷, 현실 안에서 자연스럽게 스미는 스타일 등. 그 흐름 속에서 셔츠는 가장 상징적인 아이템이 된다. 유행을 과하게 타지 않으면서도 시대의 분위기를 담을 수 있고, 클래식하지만 얼마든지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셔츠를 매개로, 브랜드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혀 다른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는 이유다.
가령, 질 샌더는 깨끗한 화이트 셔츠와 단단한 레더 스커트 조합으로 룩을 완성했지만, 몸에 딱 맞지 않게 살짝 떨어지는 실루엣과 절제된 균형으로 긴장감을 조성한다. 더 로우는 생활과 훨씬 더 밀접한 방식으로 셔츠를 다룬다. 구김이 자연스럽게 남은 셔츠, 무심하게 걷어 올린 소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쇼츠와 로퍼의 매칭. 특별히 꾸민 느낌 없이도 분위기가 완성되는 지점이다. 보테가 베네타는 익숙한 유니폼의 감성을 활용한다. 스트라이프 셔츠와 구조적인 스커트, 깔끔한 화이트 셔츠와 강한 컬러 포인트 하나로 룩을 연출하는 식이다. 익숙한 오피스웨어처럼 보이지만, 비율과 소재의 균형을 통해 충분히 현대적인 분위기로 풀어낸 반면, 루이 비통은 벌룬 실루엣 드레스 위에 화이트 셔츠를 매치하며 판타지와 현실 사이를 연결했다. 클래식한 셔츠가 들어가는 순간 과장된 실루엣조차 현실적인 호흡을 얻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토즈는 셔츠를 가장 데일리하게 제안한 브랜드 중 하나다. 오버사이즈 스트라이프 셔츠를 짧은 드레스 위에 툭 걸치고 힘을 뺀 실루엣으로 마무리. 실제 옷장 안에 있을 법한 조합이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하우스의 감각이 남아 있다. 아크네 스튜디오는 또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연한 블루 셔츠에 브라운 레더 팬츠를 매치하거나, 아이보리 셔츠에 빈티지한 가죽 백을 더하면서 차갑고 건조한 관능을 만든다. 반면, 발렌시아가는 거대한 화이트 셔츠를 드레스처럼 확장하고 블랙 장갑과 선글라스를 더해 극단적인 실루엣으로 밀어붙인다. 하지만 그렇게 과장된 룩조차 출발은 아주 평범한 셔츠라는 사실.
익숙한 옷 하나가 어디까지 변신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준 셈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셔츠는 기본템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위치에 올라섰다. 단추를 어디까지 잠그는지, 소매를 얼마나 걷는지, 일부러 크게 입는지 같은 사소한 선택의 연속이 전체 인상을 완성한다. 그래서 요즘 스타일링에서는 오히려 셔츠 한 장이 복잡한 액세서리보다 더 강한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특히 화이트 셔츠는 더 이상 깨끗한 기본에 머무르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절제된 미니멀리즘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권위와 관능, 혹은 ‘무심한 듯 세련된’ 어떤 한 끗처럼 읽힌다. 이런 흐름은 리얼웨이로 옮겨와 사람들의 스타일을 바꾸고 있다. 지나치게 완성된 룩보다 현실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옷차림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면서 셔츠가 다시금 중요해졌다. 셔츠는 일상과 가장 가까운 옷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입지만 아무나 같은 분위기로 입을 수 없는 옷. 이 감각은 국내 브랜드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너프원은 힘을 뺀 오버사이즈 셔츠에 독특한 절개와 같은 디테일로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렉토는 남성 셔츠의 구조에 여성적인 긴장감을 남기고, 로우클래식은 단정한 셔츠를 도시적인 비율로 풀어내며 현실적인 미니멀리즘을 보여준다.
이들이 선보이는 잘 재단된 셔츠 한 장, 소매 디자인의 다양함, 단추의 생김과 위치 같은 디테일은 예전이라면 무심히 스쳤을 장면이지만 지금은 더 강하게 기억된다. 결국 패션은 늘 새로운 것을 말하지만, 중요한 변화는 종종 가장 익숙한 지점에서 시작된다. 지금 디자이너들이 셔츠로 돌아가는 건 단순한 유행이 아니다. 더 많은 장식과 이미지로 자신을 설명하기보다, 가장 기본적인 옷 하나로도 충분히 새로운 시대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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