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한 속옷’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에디터의 취향

‘야한 속옷’을 입는 것에 대한 소회.

한때는 납작한 가슴이 좋았다. 옷을 입으면 태가 났고, 특히 루스한 티셔츠를 입었을 때 몸선을 따라 가볍게 흐르는 핏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다 나이를 먹으며 새로운 욕심이 생겼다. 가슴 깊게 파인 딱 붙는 드레스를 입고 완숙미를 뽐내는 상상, 여름에는 알록달록 비키니를 마음껏 즐기고, 또 예쁜 브래지어 컵을 남김없이 꽉 채우고 싶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지체 없이 가슴 수술을 했다. 처음 얼마간은 굉장히 후회했다. 살이 찐 것도 아닌데, 예전처럼 티셔츠를 입으면 부해 보여 울적해지고는 했다. 그저 예쁜 속옷 한번 원 없이 입고 싶었을 뿐인데, 가슴 하나로 스타일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그럼에도 새로 산 브래지어를 입고 자아도취 거울에 나를 비춰볼 때면 후회가 눈 녹듯 사라졌다. 어느새 익숙해진 새 몸을 보며, 이 선택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솔직한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며 흐뭇해한다. 맞다, 나는 사실 야한 속옷이 참 좋다. ‘야한 속옷’은 종종 거울 앞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전제로 선택되기도 한다. 하지만 속옷에 얽힌 기억은 그보다 훨씬 사소하고 개인적인 감정으로 남아 있다.

브래지어를 처음 입기 시작한 사춘기의 기억은 쑥스러움과 불편함으로 가득했다. 몸의 변화를 감추기 위한 거추장스러운 장치이자, 브라 끈이 행여 옷 밖으로 삐져 나올까 노심초사했고, 말랑한 컵이 신경 쓰여 괜히 등을 구부정히 말아 쥐게 만들었다. 성인이 된 후에는 작은 가슴도 모아서 볼륨 업시켜주는 마성의 ‘원더 브라’에 열광했다. 불편함보다는 성숙한 실루엣이 우선이던 시기였다. 애슬레저가 유행처럼 번질 때는 가슴과 밀착되는 스포츠 브라가 일상으로 들어왔다. 활동성과 편안함을 이유로 선택된 스포츠 브라는 오랫동안 합리적인 속옷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은 아니었다. 나만 하더라도 또 다른 압박처럼 느꼈으니까. 조여오는 밴드, 숨을 깊게 들이마실 때마다 느껴지는 답답함. 지지와 안정이라는 명목 아래 몸이 다시 긴장하는 상태. 속옷 앞에서 ‘편안함’이라는 기준은 얼마나 쉽게 일반화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그래서 브라리스(Braless) 패션을 당당히 실천하는 셀럽이 등장했을 때는 쾌재를 불렀다. 더 이상 압박받지 않아도 되는 ‘나의 선택’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저 몸을 덜 방해하는 쪽을 택할 뿐이었다.

그 순간 브라를 입지 않는 선택이 여성학적 맥락에서 ‘해방’과 ‘저항’의 상징으로 읽히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쳤다. 의도한 적도, 선언한 적도 없이 오롯이 편함을 위해 내린 선택이 다른 의미로 해석될까 낯선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편함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페미니즘일지 모른다.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어떤 의미로 해석될지 계산하지 않은 채, 그저 몸이 덜 긴장하는 쪽을 고를 수 있는 결정권이 내게 있다는 가장 현실적인 자유. 페미니즘은 거창한 구호보다, 이런 사소한 일상에서 가장 선명해진다. 요즘은 오늘 뭘 입을지, 어딜 갈지 하루를 상상하며 속옷을 고른다. 어깨선을 또렷하게 세우는 발코니 브라, 상체를 

부드럽게 풀어주는 노 와이어 브라, 깊은 네크라인 아래 실루엣을 정돈하는 플런지 브라와 비쳐도 스타일의 일부가 되는 멋스러운 트라이앵글 브라까지. 물론 브래지어를 생략하는 날도 잦다. 그러다 어느 날, 아끼고 아끼던 야들야들한 레이스 브라렛을 고른다. 별다른 뜻 없이, 그저 기분 전환용으로. 야한 속옷을 입은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며 이런 생각이 스쳤다. ‘참 괜찮아 보이네’. 동시에 이 생각이 이상한 걸까, 피식 웃음도 나온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는 미국의 심리학자 앨버트 밴듀라가 말한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의 미시적인 작동이다. 내가 나를 어느 정도 통제하고 다룰 수 있다는 감각은 자존감과 정서적 안정의 핵심이라는 것.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속옷을 통해 스스로를 긍정하는 행위는, 타인의 시선 없이도 내 몸과 기분을 스스로 관리하고 있다는 믿음에 가깝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봐도 흥미롭다.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컷은 타인의 기대에 맞춘 ‘거짓 자아’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참된 자아’에 대해 설명한다. 누군가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을 때 문득 느껴지는 만족은 자기 일치의 상태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들보들한 브라렛을 입고 거울 앞에 선 스스로에게 ‘멋있다’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그 순간은, 타인의 시선에서 한 발 물러나 나 자신에게 건네는 따뜻하고 솔직한 인정이다. 지난 3년간 연이어 세 번 출산한 리한나는 임산부 패션의 새로운 룰을 만들었다. 그는 사랑으로 부풀어 오른 배를 숨기지 않은 채, 관능적인 란제리 룩을 연출했다. 란제리 브랜드 새비지×펜티(Savage×Fenty)를 이끄는 사업가로서 그는 획일화된 미의 기준과 사이즈 규범을 뚫고, ‘모든 몸은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직접 증명해 보인다. 이는 단순히 도발적인 제스처를 넘어선다. 그동안 임신한 몸은 늘 편안한 옷, 넉넉한 실루엣 뒤에 가려져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만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임신한 몸을 패션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리한나의 선택은 마음을 움직이며, 출산과 욕망 그리고 모성과 관능이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저는 어떤 여성이든, 특히 엄마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함부로 판단하지 않아요. 생명을 세상에 데려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죠. 임신 중에도 계속 일하기로 한 여성을 진심으로 존경해요. 섹시함이든 자신감이든, 그건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어요.” 이 같은 리한나의 말에서도 느껴지듯, 섹슈얼리티는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서 비롯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임신했다고 해서, 엄마가 되었다고 해서, 더 이상 관능적일 수 없다는 생각은 정말 시시하니까. 섬세하게 변화하는 여성의 몸과 의식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기에, 나는 오늘도 속옷 유목민의 타이틀을 내려놓지 못한다. 릴스를 돌아보며 질이 좀 더 좋고 편안하며, 동시에 나를 더 우아하게 가꿔줄 브래지어를 찾아 나선다. 서랍 한편에 차곡차곡 모은 야한 브래지어의 부피만큼, 내 자존감도 단단하고 충만해지는 걸 느낀다. 

    포토그래퍼
    임유근
    모델
    이서연
    헤어
    이혜진
    메이크업
    김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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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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