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인생

그는 들떠 있었지만 이 현상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일찍 어른이 된 서인국이 늦지 않게 자신을 보여줘서, 그런 그를 알아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인생이 정말 재미있다’ 라고 말하는 그의 단단하고 깊은 눈을 오랫동안 들여다봤다.

코트는 Z 제냐(Z Zegna).

코트는 Z 제냐(Z Zegna).

눈은 충혈되었고 피곤한 얼굴이지만 행복한 에너지가 마구 느껴져요.
네. 요즘은 잠을 못 자도 행복해요. <응답하라 1997>의 윤윤제라는 캐릭터를 만나면서 뭔가 새로운 인생을 사는 기분이에요. 많은 분들이 사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얼마 전 종방연이 있었죠. SNS에 올라온 배우들의 사진을 보니 흐뭇하더라고요.
마지막 촬영 날은 서운하기도 하고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이 컸는데 종방연 자리는 마냥 신나고 즐거웠어요. 그동안 고생한 모든 사람을 위한 자리였죠. 정말 끝났나, 싶기도 하고 기분이 좀 묘했어요.

뜨거운 여름을 함께했으니 맘껏 취해도 좋은 날이죠.
네. 정말 다 같이 정신 놓고 마시고 즐겼어요. 1차에서 삼겹살과 모든 종류의 술을 마시고 2차는 노래방으로 갔어요. 그날이 마침 화요일이라 다 같이 본방 사수하려고요. 하필 그날 저와 시원이의 키스신이 나와서 잠시 민망한 순간도 있었죠. 어깨동무하고 노래 부르고 감자탕집으로 가서 새벽 4시까지 놀았어요. 다음 날 아침에 스케줄이 있어서 일찍 끝낸다고 한 게 그 시간이에요.

처음부터 당신이 윤윤제였던 건 아니라고 들었어요. 오디션을 볼 때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신원호 감독님과 저의 인연부터 말해야 해요. 데뷔 후 꽤 힘든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손을 내밀어주신 분이 바로 신원호 감독님이에요.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되나 생각했었는데 또 저를 부른 거예요. <사랑비>를 마친 뒤라 시놉시스가 꽤 많이 들어왔고, 막 작품을 고르려던 차였지만 감독님이 시키는 거라면 뭐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어요. 미팅 자리에서 준희, 학창, 성재 등 남자 역할을 다 해봤어요. 마지막에 감독님이 ‘혹시 이거 한번 해볼래?’ 하고 준 게 윤제의 대사인 ‘만나지 마까’였어요. 그래서 했더니 톤이 딱이라면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거예요 . 스태프들과 회의를 하더니 저한테 윤제를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서인국이 연기하는 준희나 학창, 성재는 상상하기 좀 어렵긴 해요. 감독님의 제안에 쾌재를 불렀겠네요.
아니요. 처음에는 안 한다고 했어요. “감독님 저 못해요. 감독님한테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저는 윤제를 못합니다” 그랬어요. <응답하라 1997>에서 윤제는 너무나 중요한 역할이잖아요. 저보다 훨씬 유명하고 멋있는 배우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니가 자신 있다고 말 해주면 너 믿고 가겠다” 고 하시는 거예요. 솔직히 말해서 역할을 소화해 낼 자신은 있었어요. 단지 두려웠던 건 제가 드라마 주인공을 맡았을 때의 시청자들의 반응이었어요. 더 이상 제안을 거절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번 해보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윤윤제가 제게 왔어요.

스웨터는 Z제냐. 팬츠는씨와이초이(CY Choi).

스웨터는 Z제냐. 팬츠는
씨와이초이(CY Choi).

꼭 당신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감독님은 뭐라 설명하던가요?
제게 직접 말씀하시지는 않았고 최근에 감독님이 인터뷰를 한 내용을 봤어요. ‘왜 하필 서인국이 그 대사를 잘했을까, 차라리 그 대사를 못했다면’이라고 말씀하셨더라고요. 그 대사가 가장 중요한 대사인데 그걸 살린 사람이 저밖에 없었대요. 그래서 캐스팅 칠판에 제일 먼저 올라간 이름도 서인국이었다고 하더라고요. 덕분에 윤제의 별명도 ‘개새’가 되었고요.

주연 배우들 대부분이 연기 경험이 많지 않다는 데서 오는 불안함은 없었나요?
제가 배우 출신이 아니다 보니 여자 주인공은 배우였으면 하고 바랐는데 연기 경험이 전무한 정은지 씨가 성시원이 된 거예요. 사실 걱정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죠. 그런데 첫 리딩하고 마음을 놓았어요. ‘어, 이 정도면 내가 지겠는데? ’ 라는 생각까지 들면서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더라고요. 다른 분들도 생각 이상으로 너무 잘해줬고요.

스킨십 때문이 아니라 눈빛이나 두 사람에게 머무는 공기에서 긴장감이 확실히 느껴졌어요. 결국 스캔들까지 터졌고요.
카메라가 없어도 사투리를 쓰면서 윤제, 시원으로 놀았어요. 우리가 그걸 원했어요. 촬영장 오자마자 은지 씨와 친해지려고 노력한 건 남녀의 ‘케미스트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기 때문이에요. 드라마를 볼 때 커플의 케미스트리가 안 보이면 아무리 스킨십이 잦아도 불편하고 어색해요. 근데 그게 있으면 둘이 아무 짓도 안 해도 보는 제가 막 미칠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그걸 느꼈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어요 .

스캔들까지 났으니 성공한 셈이죠. 당신을 만나면 ‘윤제야’라고 불러보고 싶었어요. 그건 아마 윤제가 되어버린 서인국이 충분히 보였기 때문일 거예요.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힘든 건지 즐거운 건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어요. 꿈을 이뤘기 때문에 힘들어도 즐거운 건가 보다 했어요. 그런데 적응이 되는 순간부터 조금씩 시야가 넓어졌고, 주위를 둘러보니 너무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뭔가 자꾸 쌓이기만 하고 표출할 길이 없었어요. 그때 <사랑비>라는 작품에 들어가고 연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동안 누르고 있던 게 다 풀려나가는 느낌을 받았어요. 연기에 재미를 붙이고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니까 빠른 시간에 연기가 는 것 같아요.

당신과 그가 가장 달랐던 지점은 뭔가요?
저는 그렇게까지 순종적이지는 않아요. 그리고 개구리를 무서워하지도 않아요. 거의 막 자지러지잖아요. 제가 개구리를 되게 잘 잡거든요. 다른 사람이 되어서 놀란다는 건 다른 근육을 쓴다는 건데 그 장면을 위해서 수 십번을 뛰고 놀라고 하는 게 힘들었어요. 더운데 코트까지 입고 뛰었으니 온 몸에 땀이 나고 목도 아프고 그날 진짜 쓰러지는 줄 알았어요.

스웨터는 구찌(Gucci).팬츠는 노앙(Nohant).

스웨터는 구찌(Gucci).
팬츠는 노앙(Nohant).

개구리한테 놀란 후로 시원이의 가슴에 손을 얹는 장면이 있었잖아요. 쓰러질 정신이 없었을 것 같은데요?
만진 것 같죠? 근데 안 만졌어요. 다 방법이 있어요. 자세히 설명을 드리자면 은지 씨가 재킷을 입고 있잖아요. 재킷을 이만큼 띄워서 공간을 만들고 이렇게 손을 동그랗게 마는 거죠. 은지 씨가 20살 아이돌인데 제가 그러면 큰일나죠.

실제로도 그렇게 순정남인가요?
원래는 여자친구에게 올인하는 스타일이었어요. 좀 유치한데, 여자친구가 생기면 여자인 친구들 번호도 다 지우고 그랬어요. 그런데 사회 생활을 하고, 가수로, 배우로 활동하면서 좀 더 융통성이 생긴 것 같아요. 팬들한테 닭살 돋는 멘트도 잘하고요. 팬들과 연애하는 식으로 트위터에 글도 올리고 그래요. 마지막으로 연애한 게 4년 전이니 다시 연애를 하게 되면 조금 다를 수도 있겠죠.

4년 전, 사랑에 빠진 당신의 모습은 어땠나요?
애교가 정말 많아요.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앙탈부리고 그랬어요. 한번은 길거리에서 사랑한다고 말해달라 했는데 여자친구가 부끄럽다고 안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안 해주면 안 갈 거라고 길바닥에 주저앉은 적도 있어요. 여자친구 앞에서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이렇게 당신을 보는 눈과 찾는 곳, 해야 할 일이 많아질수록 외로움이 더 커지지는 않나요?
혼자 살다 보니까 사람에 대한 외로움이 늘 있어요. 혼자 술을 마시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외롭다기보다는 술을 좋아해서 그런 거고요. 가끔씩 진짜 사람이 고프다고 해야 할까요? 그럴 때는 좋아하는 친구들, 형들 만나서 속 마음을 이야기하는 편이죠.

최근에는 누구를 만나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나요?
드라마 하면서 배우들과 많이 친해졌고 촬영장 밖에서도 자주 모였어요 . 특히 호야, 시언이 형과 자주 만났어요. 호야는 동생이지만 굉장히 어른스러워요. 시언이 형은 워낙 성격이 좋아서 나이 차이가 좀 있는데도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요. 형은 원래도 분위기 메이커지만 술을 마시면 말이 더 많아지는 스타일이고, 호야는 조용히 술을 잘 마셔요. 많이 마신다는 게 아니라 페이스 조절을 잘해요. 저는 기분파라서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고 목소리도 커지는 편이에요. 오래오래 가까이 지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서 기뻐요.

진정한 애주가의 포스가 느껴져요. 같은 소속사의 성시경 씨가 주당이잖아요. 한번 붙어보는 건 어때요?
선배는 당해낼 수가 없어요. 한번은 집에 있는데 나오라고 해서 나갔더니 늦게 왔다고 잔에 맥주를 채워서 삼배주를 벌잔으로 주는 거예요. 평균 소주 서너 병은 마시는데 아침까지 먹고 나와서 햇빛을 보는 순간 바닥에 쓰러졌어요. ‘나 안 가’ 하고 바닥에 누워버렸대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이더라고요. 혼자 집에 찾아온 게 신기해요.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성격이라 친구가 많을 것 같아요.
낯도 안 가리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긴 한데 마음을 쉽게 열지는 않아요. 빨리 친해지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까지만 친해지는… 그래서 사람들이 저보고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말해요. 정말 친한 사람에게는 모든 걸 다 주는데 그만큼 친한 사람이 많지는 않아요. 제가 눈이 진하고 인중이 짧아서 무표정하게 있으면 화나 보이는데 웃으면 애 같은 얼굴이 있잖아요. 얼굴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좀 반전이 있어요.

코트는 노앙. 톱은 겅트(Gunt).팬츠는 씨와이 초이. 슈즈는닥터마틴(Dr.Martens).

코트는 노앙. 톱은 겅트(Gunt).
팬츠는 씨와이 초이. 슈즈는
닥터마틴(Dr.Martens).

예의가 바르고 마주 앉은 사람을 편하게 하는 데에는 반전이 없는 것 같네요.
제 행동이 곧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애늙은이 같다, 넌 도대체 몇 살이니, 이런 소리 많이 들어요. 어머니 일을 어릴 때 부터 도와드렸고 어머니가 어른들에게 어떻게 하는지 보고 자라서 자연스럽게 제 행동에 묻어 나오는 것 같아요.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에게 ‘너는 연예인이 아니야’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던데, 어떤 사연이 있는 건가요?
장이 안 좋아서 화장실을 자주 가거든요. ‘화장실 다녀오겠습니다’ 하면 장난처럼 저한테 ‘너는 연예인이 아니야’ 그러셨죠. 하하. 그리고 감독님, 스태프들이 저를 연예인으로 보고 대하는 게 싫어서 일부러 더 장난도 많이 치고 농담도 건네고 그랬어요. 촬영 마지막 날에 카메라 감독님이 오시더니 제 손을 잡고 ‘너라는 동생을 알게 되어서 기쁘다’라고 하시는데 울컥하더라고요. 촬영장에서 저는 여러모로 연예인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좋았고요.

곧 방송되는 <아들 녀석들>에서는 천하의 바람둥이가 될 거라죠? 지금의 이미지를 좀 더 가져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나요?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에요. 그런데 이 드라마에 나문희 선생님, 박인환 선생님, 이성재 선배님이 나오신다는 거예요. 언제 또 이 분들과 함께 연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 드라마를 끝내고 좀 더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50부작의 드라마를 이 분들과 함께하고 나면 제가 또 얼마나 성장해 있을지 궁금해요. 바람둥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가 될 수 있도록 제가 잘해야죠.

<슈퍼스타 K>를 통해 이미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는 걸 경험했어요. 하지만 지금의 감정이란 그때와는 또 다른 것이겠죠?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고 지금은 어느 정도 시스템을 아는 상황이라 적응이 빨랐어요. 어떤 시스템인지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의 차이는 크잖아요. 이제는 뭘 해도 잘할 자신이 있어요.‘이 를 갈았다’ 그런 게 아니고요. 한 발짝 떨어져서 보는 여유가 생긴 거예요.

연기를 하고 다른 사람으로 사는 동안에도 무대는 항상 그리울 테죠?
무대 위에 있을 때 느끼는 희열은 뭐라 설명하기 힘들어요. 그 위에서 팬들이 저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 표정을 보고 함성 소리를 듣는다는 건 어떤 것과도 비교가 안 되요. 조만간 또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 같아요. 생각만 해도 설레고 항상 그리운 곳이죠.

어릴 적 꿈인 가수가 되었고 연기에 도전하면서 당신의 또 다른 가능성이 온 세상에 드러났어요. 모두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지만 당신의 인생은 정말 드라마틱해요.
맞아요. 정말 그래요. 그래서 저는 제 인생이 정말 재미있어요. 어릴 때부터 파란만장했어요. 공장일도 하고 용접도 하고 호프집에서 서빙도 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슈퍼스타 K>에서 1등을 했고 가수로 데뷔했어요. 그러다가 높은 벽에 부딪히고 연기를 하게 되었고 윤윤제를 만났고 지금 이렇게 인터뷰를 하고 있어요. 앞으로 제 인생에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대가 돼요.

스웨터, 셔츠, 재킷은 모두프라다(Prada). 모자는 씨와이초이. 팬츠는 닐바렛(Neil Barrett).

스웨터, 셔츠, 재킷은 모두
프라다(Prada). 모자는 씨와이
초이. 팬츠는 닐바렛(Neil Barrett).

    에디터
    조소영
    포토그래퍼
    유영규
    스탭
    스타일리스트 / 채한석, 헤어:강호(레드카펫), 메이크업 | 유진(레드카펫)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