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하우스에서 전하려는 메시지를 예술적 영상미에 고이 접어 보내는 2024 패션 필름 레터.

샤넬이 영화 <프리실라>를 위해 특별 제작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배우 케일리 스패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이 의상 감독으로 참여한 영화 <챌린저스> 스틸컷.

시대별 영화 패션을 재창조하다

1930년 가브리엘 샤넬은 프로듀서 새뮤얼 골드윈의 영화 의상을 제작하기 위해 할리우드로 건너갔다. 이 인연은 영화계에 몸담은 감독과 기관을 친구로 두고 후원하는 코코 샤넬의 멋진 전통으로 자리매김했다. 최근에는 하우스 앰배서더이자 칼 라거펠트의 샤넬 시절부터 창조적 우정을 맺어온 감독 소피아 코폴라의 새 장편영화 <프리실라>의 든든한 후원자로 나섰다. 6월 19일 국내 개봉한 이 영화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삶을 함께한 프리실라 보리우의 회고록 <엘비스 앤 미>를 원작으로 한다. 프리실라의 감각적인 스타일에서 큰 영감을 받은 소피아 코폴라는 캐츠아이 아이라이너, 부팡 헤어스타일, 시프트 드레스 등 그의 로큰롤적 우아함을 영화 속에서 그대로 오마주하길 원했다. 그리하여 전속 의상 디자이너 스테이시 배탯은 마지막 촬영 날까지 바느질을 하며 의상 120벌을 특별 제작해야만 했다. 하지만 프리실라 이야기의 정점인 결혼식만큼은 샤넬 아틀리에가 만들길 권했고, 감독과 샤넬은 이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샤넬 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버지니 비아르는 프리실라 역을 맡은 케일리 스패니의 캐릭터를 위해 실제 결혼식 날 찍은 역사적인 사진에 기반해 자신만의 해석을 곁들인 룩을 새롭게 디자인했다. 이렇게 완성한 웨딩드레스는 샤넬 2020 S/S 오트 쿠튀르 컬렉션에 모티프를 두고 몽텍스 자수 공방에서 수놓은 아름다운 레이스로 장식됐다.

영화 <프리실라> 속 주목할 또 다른 의상은 발렌티노의 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엘파올로 피촐리가 극 중 엘비스 프레슬리로 변신한 제이콥 엘로디를 위해 특별 제작한 커스텀 룩 두 벌이다. 디자이너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상징적 스타일로 역사를 고증하는 대신 극 중에 친숙하게 녹아들면서도 청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일종의 마법을 부렸다. 시대를 반영한 컬러 팔레트를 중심으로 메종의 장인정신과 테일러링이 돋보이는데, 스리피스 모헤어 슈트, 캠프 칼라 셔츠와 팬츠 등 모든 제품에는 손으로 꿰맨 ‘Valentino for Jacob Elordi’ 태그를 장식해 특별한 조우를 기념한다.

영화 의상부터 위트 있는 바이럴까지

“도대체 ‘I TOLD YA’가 뭐야?” SNS를 비롯해 각종 미디어를 떠들썩하게 만든 바로 그 티셔츠. 로에베와 JW앤더슨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이 처음으로 이탈리아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의 영화 <챌린저스>에 의상 디자이너로 참여하며, 로에베에서 출시한 스페셜 에디션이다. <챌린저스>는 젠데이아 콜먼, 조쉬 오코너, 마이크 파이스트가 주연을 맡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테니스 스포츠를 주무대로, 청춘들의 농밀한 삼각관계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아주 평범하지만 섹시하고, 규율이 엄격한 테니스 복장을 에지 있는 프레피 룩으로 승화한 조나단 앤더슨의 천재적 아이디어로 넘실대는 131분의 러닝타임! 주인공 젠데이아는 영화 속 몇몇 장면에서 ‘I TOLD YA’라는 문구가 볼드하게 새겨진 스웨트 셔츠를 입고 등장했는데, 조나단 앤더슨은 이를 현실로 소환했다. 그뿐 아니라 영화를 홍보하며 배우는 물론, 감독도 이 티셔츠를 계속 입었다.

사실 해당 디자인은 지금은 고인이 된 존 F. 케네디 주니어가 1960년 그의 아버지 존 F. 케네디의 대통령 취임식을 기념하는 ‘I TOLD YA(내가 말했지)’ 티셔츠를 입은 모습이 파파라치에게 포착되며 세간에 유행한 것이 시초다. 조나단 앤더슨이 영화 속 스타일을 창조하며 존 F. 케네디 주니어의 상징적 룩을 차용한 건 다분히 의도적이었는데, 그는 테니스계에서 큰 스타가 아니었던 영화 속 등장인물이 외모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고 느꼈고, 이를 뭐든 입을 수 있었지만 무심했던 존 F. 케네디 주니어의 80년대 스타일에 근간을 뒀다. 영화 속 캐릭터의 외모는 관객에게 통찰력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감독과 디자이너가 패션을 이용해 작품을 알리는 재치 있는 방법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올 하반기에는 조나단 앤더슨과 루카 구아다니노가 합작한 두 번째 영화 <퀴어>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윌리엄S. 버로우 작가의 동명 소설을 각색했으며, 다니엘 크레이그와 드류 스타키가 주연을 맡은 새로운 작품에는 얼마나 섹시하고 위트 있는 스타일이 담길지 기대를 모은다.

 

다큐멘터리 영화 <디젤: 비하인드 더 데님>에서 ‘레이저 에칭 머신’을 소개 중이다.

파타고니아의 다큐멘터리 영화 <쓰레기 시대>의 도입부 장면.

생 로랑 프로덕션에서 기획한 감독 파올로 소렌티노의 장편영화 [파르테노페] 스틸컷.

에르메스가 연작 중인 다큐멘터리 시리즈 [세상에 남긴 발자국] 중 중국 홍콩에서 촬영한 ‘#10 럭셔리는 고칠 수 있는 것이다’의 한 장면.

지속가능한 다큐멘터리 영화

HERMES

1837년부터 이어진 지속가능한 유산을 담담한 영상미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세상에 남긴 발자국>으로 소개하는 에르메스. 영화는 감독 프레데릭 라퐁이 인간적인 시선으로 따라나선 지속가능한 발자취를 담았다. 프랑스 마을 빌렌 레 로쉐의 바스켓 위빙 장인 이야기, 어머니가 쓰던 켈리 백을 물려받은 일본 도쿄에 사는 한 여성의 이야기 등 2018년부터 꾸준히 제작해왔으며, 현재 각기 다른 스토리 15편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에는 에르메스가 한국의 문화재청과 함께 기획해 2015년부터 후원한 ‘한 문화재 한 지킴이’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대한민국 서울에서 전통 가구를 제작하는 장인들이 조선 왕조 작품에 경이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작업 과정을 찬찬히 감상해보길 바란다.

DIESEL

1978년 렌조 로소가 설립한 이래 ‘데님’으로 온갖 마법을 부리는 디젤은 ‘데님’으로 인해 붉어지는 환경문제를 해결하려고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이 같은 노력을 좀 더 재미나게 소개하고자 5부작 미니 다큐멘터리 시리즈 <디젤: 비하인드 더 데님>을 공개한 디젤. 지속가능성 컨설팅 회사인 크리에이트 서스테인과 협력하고 <i-D> 매거진의 레아 오군라미가 전체 시리즈의 호스트로 마이크를 잡은 이 다큐멘터리는 솔직하고 유머러스한 태도로 “지속가능성은 섹시합니까?” “순환성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같은 다소 민감한 질문을 이어간다. 이 시리즈는 현재 에피소드 3편까지 공개, 10월과 11월에 나머지 에피소드가 디젤 소셜 채널과 디젤닷컴(Diesel.com)에서 차례로 오픈될 예정이다.

PATAGONIA

파타고니아는 전 세계 환경단체가 진행하는 여러 활동을 지지하며 더 많은 이들과 그 취지를 나누고자 다큐멘터리 필름을 제작한다. 최근에는 소비주의에 대항하는 ‘언패셔너블’ 운동 론칭과 함께 <쓰레기 시대>를 공개했다. 감독 데이비드 바이어스가 연출한 <쓰레기 시대>는 싸구려 잡동사니의 시대로 관객을 초대해 무분별한 소비 습관을 인류학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충동 조절 능력 부족의 세포적 기원부터 자본의 이름으로 중추신경계가 해킹당한 방식을 살펴보며 모든 것이 어떻게 쓰레기로 변하는지, 소비 충동이 왜 우리 모두를 파괴하는지 잔인할 정도로 객관적인 시각으로 관찰한다.

 

구찌의 아이코닉한 뱀부 백을 소재로 한 단편영화 <카구야 바이 구찌>의 한 장면.

생 로랑 프로덕션에서 기획하고 ‘제77회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감독 자크 오디아드의 장편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컷.

생 로랑의 영화 , 칸을 홀리다 

“좋은 영화는 10년을 넘어 30년 뒤에도 볼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영화가 시즌 컬렉션보다 영향력이 더 클지도 모른다.” 영화의 영속적인 면에 매혹당한 생 로랑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토니 바카렐로는 수년간 자신에게 영감을 준 영화계 인재에게 플랫폼을 제공하기 위해 업계 최초로 영화 제작사 ‘생 로랑 프로덕션’을 출범했다. 의상이나 브랜드를 소재로 한 단발적 협업이 아닌, 대중적인 예술로서 브랜드 영역을 확장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해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두 편의 작품으로 데뷔한 후, 지난 5월 2024 ‘제77회 칸영화제’에서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더 슈라우즈>,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파르테노페>, 자크 오디아드 감독의 <에밀리아 페레즈>까지 장편영화 세 편을 초연했고, 모두 황금종려상 경쟁에 나섰다. 여기서 안토니 바카렐로는 공동 제작자이자 의상예술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비록 황금종려상의 영예를 누리진 못했지만,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가 심사위원상을 받았고, 해당 영화에 출연한 배우 조 샐다나,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 셀레나 고메즈, 아드리아나 파즈는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했다.
생 로랑 프로덕션이 제작한 영화 속에서 바카렐로는 장면에 필요한 모든 옷을 제공한다. 하지만 오프닝 시퀀스에 YSL 로고 가방을 넣거나 극 중 대사에서 브랜드를 언급하는 일은 없다.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 1967년 영화 <세브린느>에서 여배우 카트린 드뇌브를 위해 영화 의상 전체를 디자인한 하우스 창립자의 열정처럼, 생 로랑을 홍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영화를 이용하기보다는 폭넓은 예술적 감성과 뉘앙스를 강조하려는 굳은 철학을 진지하게 고집한다.

스크린을 통해 흡수하는 하우스의 DNA

2년 전 구찌 하우스는 1947년 탄생해 오랜 시간 사랑받은 ‘뱀부’ 백 75주년을 맞이해 감독 나가히사 윤이 연출한 단편영화 <카구야 바이 구찌>를 선보였다. 일본 고전 이야기인 ‘담쟁이 이야기’에 기원을 두고 최신 테크놀로지를 결합한 환상적 영상미로 당시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겼다. 브랜드의 아이코닉한 ‘뱀부’ 컬렉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6분 남짓한 하나의 단편 영상으로 뇌리에 각인시켰기 때문이다. 이처럼 브랜드의 이슈를 독창적 시각으로 연출해 구찌의 세계관을 경험케 하는 시도는 올해 또 한 번 이어졌다. 하우스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사바토 데 사르노의 취임, 그리고 그의 첫 컬렉션인 ‘구찌 앙코라’ 쇼의 탄생 비화를 담은 다큐멘터리 <구찌의 이야기, 사바토 데 사르노는 누구인가?>를 공개한 것. 브랜드 앰배서더인 배우 폴 메스칼의 내레이션으로 약 20분 동안 플레이되는 이번 다큐멘터리에서 사바토 데 사르노의 열정과 비전뿐 아니라 그의 개인적 경험까지 공유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쉽게 접할 수 없는 런웨이 너머의 순간을 탐험하며 매력적인 패션계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창작 과정 뒤에 숨은 공동의 열정과 헌신, 팀워크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구찌의 새로운 다큐멘터리 단편영화는 스트리밍 플랫폼 ‘무비(Mubi)’를 통해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