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작은 남자들

남자들이 맹목적으로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것처럼, 여자들도 무조건 키가 큰 남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키가 작아서 더 매력적인, 키가 작아서 더 사랑스러운 남자들에게 바치는 뜨거운 고백.

제임스 맥어보이, 반전의 치명적인 멋
얼마나 작아야 작은 걸까? 세상 모든 숫자라는 게 상대적이지만 특히 남자 키에 대해서라면, 여자들 저마다의 기준이 다를 것이다. 남자 키에 대한 내 기준은 다른 여성들에 비해 관대한 편이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배우 제임스 맥어보이의 이름을 네이버 검색창에 써넣으면, 프로필 사진 옆에 뜨는 키가 170cm다. 진짜 170인지, 혹은 168.3cm쯤 되는데 대충 올리고 퉁친 건지, 깔창을 깔았을 때 170인지는 모르겠지만 또래 남자 배우들과 비교해서 아담한 건 분명하다(맥어보이는 1979년생이다). 동갑내기 크리스 프랫이 188cm, 두 살 많은 마이클 패스밴더가 183cm이니까. 명백히 작은 남자지만 내 눈에는 멋지다. 이런 비논리적인 매혹의 과정은 ‘키가 작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장점이 많으니까 극복하고 좋아할 수 있어’보다는 ‘그래? 그 사람 키가 작았어?’에 가깝다. 작은 키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를 영화 <어톤먼트>에 주인공 로비 역으로 캐스팅한 감독 조 라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이언 매큐언의 원작 소설에는 로비를 그린 수많은 묘사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낙관의 눈’을 가져야 했다는 것이다. 제임스를 뽑은 이유는 그 투명한 눈 때문이었다.” 낙관의 눈, 생기 있는 표정, 붉은 입술, 고민할 때 생기는 미간 주름, 짧지만 단단한 팔다리…. 네 감독님, 저도 맥어보이를 캐스팅하겠습니다! 키 작은 남자가 아담하고 귀여워서 좋다고 말하는 여자들도 있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명백히 키가 작은 어떤 남자에게서 키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는 건, 그 명백함을 덮어 보이지 않게 하는 매력과 더불어 작은 키에 주눅들지 않는 자신감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래서 키 작은 남자가 멋지면 더 멋지고, 키 작은 남자가 남자다울 때 더 남자답다. 체구와 상관없이 큰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경계하면서 말해보자면, ‘키 큰 사람이 싱겁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키 큰 남자도 멋지지만 그들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건, 허를 찌르고 예상을 뛰어넘는 반전의 치명적인 멋이다. – 황선우( 피처 디렉터)

메시,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압도하는 순간 
“키 작은 애들은 뭐든 열심히 해. 그래야 키 큰 애들보다 뭐라도 더 얻을 수 있거든.” 대학생 시절 177cm의 한 남자 선배가 그랬다. ‘키 큰 놈치고 싱겁지 않은 놈 없다’는 말, 다 조상들이 경험해온 통계 결과라고. 174cm이하 키의 남자를 만나면 뭐 하나라도 제대로 잘하는 놈이 걸린다고. 공부를 잘하건 운동을 잘하건 하다못해 제 여자한테 잘하기라도 한다는 그런 말이었다. 20대 중반 이후, ‘피크’를 달린 나의 소개팅 시즌을 훑어보건대, 틀린 말은 아니다. 

키 작은 남자가 매력적인 건, 200%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압도하는 순간이다. 대표적으로 축구선수 리오넬 메시가 그렇다. 스포츠에 문외한이라도 그의 발놀림을 단 10초만 보면, 얼이 나간다. 이 한 사람을 막기 위해 4~5명의 수비수가 몰려가는 꼴을 종종 본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그는 남미 예선 14경기 동안 10골을 가볍게 쏟아냈다. 한 해외 축구 전문 매체의 기사에 따르면, 그의 지난해 공식 총 수입은 1천5백만 유로의 연봉 외에도 광고 등 별도 수입만 해도 2천6백만 유로다. 둘을 합치면 한화로 571억원쯤 된다. 만약, 메시가 축 처진 눈에 기다란 코, 키 169cm에 축구가 취미인 말수 적은 남자에 그쳤다면 이토록 끌렸을까? 훨씬 섹시한 외모에 연봉도 조금 더 높다는 호날두보다 파파라치 컷 한 번 걸린 적 없이 성실한 메시에게 더 끌린다. 연관 검색어도 무슨 ‘스포츠카’, ‘여자친구’ 이름이 아니라  ‘선행’으로 이어진다. 포상금 10만 유로쯤 바로 쾌척했다는 뉴스는 익숙하다. 희귀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의 수술을 지원하고, 고향 땅 아르헨티나에 장학금을 퍼부으며, 장애인들이 뛰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등 하나같이 구체적이고 꾸준하다. 메시는 D&G 슈트를 말끔하게 입고 <로피시엘 옴므>의 표지에 나선 적도 있다. 단신을 고려한 상반신 위주의 컷이었고 팔이 짧아 옷은 주글주글했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사람의 시선을 부드럽게 빨아당기는 카리스마를 갖고 있다. 축구선수로서 어쩌면 단점일 수 있는 키를 재능과 성실로 극복해낸 자신감이 그런 식으로 풍긴다. 그의 ‘퍼펙트 골’은 마무리까지 완벽하다. 철든 20대, 87년생 메시는 무명시절을 함께 보낸 첫사랑과 살고 있다. – 김미한(<머니투데이> 기자)

박재범, 환성적인 활배근이 있다면 키쯤이야
지구 여자들 대부분은 이왕이면 큰 키를 선호한다. 미국 유타대학교 데이비드 캐리어 박사님도 이런 주제로 연구를 하셨다. 결과는 ‘여자들은 진화론적으로 자기와 아이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남자를 선호한다. 키 큰 남성들이 이 부분에서 더 유리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는 것. 물론 우리 주변엔 키가 작은 남자와 결혼한 여자가 수두룩하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머리로는 이해하나 가슴으로 이해할 수 없는 카테고리라고 할까. 살면서 한 번도 178cm 이하의 남자와 사귀어본 적 없고, 심지어 177cm라는 이유로 소개팅을 파기한 적도 있는 나라는 여자는 혹자에게 ‘꼴값’이라는 말을 들어도 싸다. 정작 나는 대한민국 여자의 평균키를 훨씬 밑도는 150cm대 ‘키작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나 같은 여자야말로 유전자적 진화가 절실하다고. 그렇기 때문에 한 번도 작은 남자에게 반한 적 없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생겼다. 깔창 포함 170cm일 것이 뻔한 박재범의 활배근에 ‘심쿵’한 이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남자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갖가지 근육 가운데 단 한 개의 근육을 편애하는 건 순전히 개인적인 페티시이므로 부연 설명은 하지 않겠다. 활배근성애자의 눈에 우연히 들어온 박재범의 ‘그것’을 본 건 한 연예뉴스에서 무방비 상태로 송출한 콘서트 영상에서였다. 키가 작다는 이유로 한 번도 눈여겨본 적 없던 한 남자가 얇고 하얀 티셔츠 쪼가리를 벗어 던지는 순간, 화면을 가득 채운 그의 등 그리고 두터운 팔뚝과 예각을 이루는 겨드랑이 부분에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는 그 엄청난 활배를 보는 순간, 어느 막장 드라마에서 쏟아내던 주스처럼 먹던 라면을 후루루 쏟아내고 말았다. 게다가 박재범은 작은 남자가 가졌을 법한 가벼움이 없다. 어떤 자리에서건 침묵을 지키고,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그리고 입을 열 땐 무게감 있는 한 방이 있다.  고정 크루로 보여주는 능청스러움조차 묵직한 추 하나가 달려 있다. 무엇보다 무대 위의 박재범을 보게 된다면 어떤 여자라도 그 막강한 케미스트리를 거부하기 힘들 것이다. 그 뜨거운 눈동자엔 오직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하는 듯하다. 몸과 정신의 모든 것을 탈탈 털어 소진하는 박재범에게 아낌없이 반해버린 건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이다. 이후로 나는 작은 남자에게도 이성적인 화학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됐다. 오직 키 때문에 중성화시켜버린 남자들을 다시 보고, 가까이 보고, 어여삐 보게 됐다. 이 모든 게 박재범이 한 일이다. 키로 남자를 판단하는 편협한 여자들에게, 작다는 이유만으로 기회를 박탈당하는 남자들에게 혁혁한 공을 세운 셈이다. – 나정원(<보그걸> 피처 디렉터) 

태양, 길이보다 태도 
주변 지인들이 남자의 키를 논할 때 가장 첫 번째로 언급하는 이가 한 명 있다. 빅뱅의 태양. 173cm로 알려진 프로필상의 키는 팬이 봐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하지만 태양과 관련된 인터넷 뉴스에 달린 남자들의 댓글만 읽어봐도 키가 전혀 문제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작은 키를 지적할 수 없는 ‘키 까임 방지권’을 갖고 있다. 무미건조하고 매력 없는 180cm 남자들은 가뿐히 제압할 수 있다. 여기서 태양의 탁월한 보컬과 퍼포먼서로서의 능력은 배제하겠다. 그건 일반 남자가 갖기 힘든 ‘아티스트’로 타고난 능력이니까. 태양은 데뷔 이후로 지금까지 작은 키가 왜소해 보이지 않도록 끊임없이 근육질 몸매를 가꿔왔다. 섹시함을 물씬 풍기는 몸매를 만들어오지 않았다면 여전히 해맑은 미소를 짓는 소년의 이미지가 강했을 것이다. 가무잡잡한 보디 피부 컬러와 어우러진 탄탄한 몸에 자리 잡은 근육은 자연스레 섹슈얼한 분위기를 완성했고, 위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드러냄으로써 폭발력을 더했다. 최근 솔로 앨범 타이틀 곡 ‘눈, 코, 입’ 뮤직비디오에서도 3분 가까이 화려한 세트 없이 상의를 탈의한 채 노래에 집중하는 태양의 모습만 찬찬히 훑어가며 보여준다. 힙합과 R&B, 그가 추구하는 장르에 어울리는 분위기인 동시에 스스로 어떤 매력을 부각시켜야 할지 태양은 진작에 깨달았다. 키보다 더 근사한 건 ‘내 키가 대체 무슨 문제야?’ 하는 듯,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것 같은 그의 태도다. 남자는 키가 콤플렉스임을 억지로 감추거나 이걸 극복하고자 외양으로 오버 액션을 취할 때, 오히려 키가 더 명확히 드러난다. 태양은 자신의 일터인 무대 위에서 최고치의 매력을 발휘하고, 외양을 완성하는 패션에서도 억지로 키가 더 커 보이려 하지 않는다. <보그 코리아> 커버를 장식했을 때 분명 자신보다 10cm는 더 키가 큰 여자 모델들 사이에 서 있었지만 그의 존재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스스로 키를 문제 삼지 않음으로써 태양은 더 멋진 남자가 됐다. -고현경(<셀러브리티> 피처 기자)

디오, 모성애를 자극하는 남자
대한민국 남자의 평균 신장이 높아지고 있다지만, 30대가 되면서 주위에(정확히 말하자면 소개팅에 나오는 남자 중에) 키 큰 남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일찍 장가를 갔거나, 징병에 끌려갔거나, 단체로 지방 파견을 받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만나는 내 눈앞의 남자들과 달리, TV 속엔 키 큰 남자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다 매력적이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깡마른 채 키만 멀대같이 크거나, 어울리지도 않는 근육을 팔다리에 장착한 아기 얼굴의 근육남들이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저럴 바엔 적당히 크고 단단한 게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 건 그때부터였다. 그러던 중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아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엑소의 디오다. 떼거지로 나와 으르렁거리는 ‘키큰남’ 사이에서 유난히 작고 밤톨 같은 남자. 밀가루로 반죽한 듯한 하얀 얼굴, 웃을 때 ‘데렛’ 하고 소리날 것만 같은 하트 입술,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디오는 다른 아이돌과는 확실히 다른 노선에 서 있었다.

또래 친구들과 달리 튀는 옷을 좋아하지 않는 디오는 멤버들로부터 옷을 가장 못 입는 멤버로 꼽힌 적 있다. ‘스위트한’ 얼굴과는 달리 스위트한 걸 좋아하지 않아 싫어하는 것이 뭐냐는 질문에 ‘이모티콘’이라는 엉뚱한 대답을 내놓기도 한다. 큰 눈을 유독 더 크게 뜨곤 하는데, 그래서 붙은 별명은 ‘흰자 부자’. 특유의 포스 때문에 ‘상남자 디오’라는 별명까지 가진 무한대의 매력남이 바로 디오다. 하정우와 톰 하디 등 ‘내가 남자다’라고 키와 몸으로 외쳐대는 이제까지의 이상형을 떠올려볼 때 그가 내 마음속으로 들어온 건 꽤 놀라운 일인데, 그것은 급기야 이제껏 소개팅 전에 남자의 키를 묻던 내 자신을 원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했다. 많은 누나들이 그러했듯 디오에 대한 감정의 포텐이 터진 건 <괜찮아, 사랑이야>의 한강우를 만나면서부터다. 무대에서의 디오가 남달랐다면 배우로서의 디오는 온전히 하나였다. 영민한 노희경 작가는 한강우라는 맞는 옷을 입혀주었고, 디오는 옷매무새를 스스로 완벽하게 정리했다. 장재열의 엄포에 울먹거리고, 몸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하고, 좋아하는 여자 이야기를 할 때 붉어지던 양 볼은 진짜였다. 장재열과 한강우의 달리기 신에서, 비현실적으로 크고 마른 조인성과 달리 단단하고 야무진 두 다리를 움직여 나아가는 한강우의 포지션은 돋보이기까지 했다. 피가 철철 흐르는 맨발을 하고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지, 얻어맞기는 또 얼마나 얻어맞는지, 디오는 내게도 ‘모성애’라는 감정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한 처음이자 유일한 남자다. ‘남자 사람’에게 모성애를 느낄 때, 그 섹시함이란 더 농후해진다. 디오는 내게 그걸 알려줬다. – 조소영(<얼루어> 피처 에디터) 

    에디터
    피처 에디터 / 조소영
    Illustration
    Kim Eun H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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