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세움과 베네치아 광장, 트레비 분수만이 다가 아니다! 옛 것과 새것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도시, 로마. 는 꽤 흥미롭다.

 

1 펜디의 새로운 사옥, 팔라초 델라 치빌타 이탈리아나에서의 실비아 벤츄리니 펜디. 2 로마의 전통 가정식을 맛볼 수 있는 이탤리언 식당, 세티미오 알 펠레그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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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디 가문이 운영하는 호텔인 빌라 라에티타의 복원된 천장.

“2004년, 이 호텔을 사들인 어머니는 이곳 특유의 빛바랜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고자 하셨어요.” 19세기에 제작된 금박 의자 끝에 걸터앉아, 커피를 마시던 실비아 벤츄리니 펜디가 말했다. 그녀는 테베레 강가에 위치한 아르누보풍 호텔, 빌라 라에티타(Villa Laetita)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과한 리모델링만큼 나쁜 건 없죠. 우리는 예스러운 멋이 감도는 호텔을 원했어요. 로마가 추구해온 목표기도 해요. 옛 것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일 말이에요.”

그것이 자신의 철학이자 곧 로마의 철학이라 말하는 실비아는 펜디의 액세서리 라인을 책임지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다. 펜디의 팬츠 슈트를 입고, 갈색의 클로그를 신은 그녀의 손가락에서 딸인 델피나 델레트레즈가 디자인한 반지가 빛났다. 트레이드마크인 그녀의 룩은 여전했다. 눈에 띄는 변화는 헤어 스타일! 하이힐을 신고서 유럽과 미국의 사교계를 누벼온 그녀의 윤기 넘치던 긴 금발 머리는 보이시한 쇼트 커트로 바뀌어 있었다. 호텔의 투숙객들은 화려하게 장식된 벽과 천장, 뚜렷한 대비를 이루는 컬러 블록의 아름다움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우리의 곁을 지나갔다. 그녀는 이처럼 강렬한 시각적 대비 효과를 사랑한다고 털어놨다. 그녀가 살고 있는 도시이자 사랑하는 도시, 로마의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풍경이기도 하다. “오스티엔세 공업지구의 미술관 몬테마르티니 센터(Centrale Montemartini)를 예로 들어보죠.” 대화 중 무의식적으로 양손을 한데 모으는 그녀의 습관은 상대방에게 허락을 구할 때 쓰는 이탤리언 특유의 제스처다. “발전소였던 건물을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몬테마르티니 센터는 정말 아름다워요. 계기판과 발전기처럼 공간이 간직한 세월 속에 예술작품이 잘 어우러졌기 때문이에요. 놀라운 시각적 대비 효과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죠.” 그녀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의자에 몸을 기대어 미소를 지었다. “로마라는 도시가 그래요. 옛 것과 새것이 팽팽한 미적 긴장 관계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어요. 선뜻 어느 쪽이 더 좋다고 하기 어려울 만큼 말이에요. 흥미롭지 않나요?”

실비아는 올해로 쉰넷이 되었다. 집 밖에서 일하는 여자를 반기지 않던 1952년, 실비아의 할머니 아델은 작은 가죽 상점을 차렸고, 다섯 딸인 파올라, 앨다, 프란카, 카를라, 안나의 도움을 받아 탄탄한 액세서리 사업체로 성장시켰다. 1965년, 자매는 젊은 독일인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를 채용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칼 라거펠트가 론칭한 기성복 라인은 브랜드에 비약적 성장을 안겨주었다. “다섯 자매 중에서 뛰어난 센스를 지닌 사람은 안나, 내 어머니였어요. 이 호텔은 어머니의 미적 감각에 대한 증거예요. 인테리어, 디자인, 패션 모두 어머니의 손길을 거쳤죠. 이 모두를 성공적으로 일궈내는 건 어려운 일이잖아요. 확고한 자신감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에요.” 로마의 최고 명문가로 손꼽히는 펜디 집안에서 태어난 실비아는 어릴 때부터 화려한 상류 사회와 소박한 분위기의 아틀리에 사이를 오가며 성장했다. 그녀의 어머니 안나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어린 딸들을 펜디의 아틀리에로 데려갔다. 바비인형보다 아틀리에의 장인을 더 좋아했던 아이는 자라서 펜디에 합류했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었다. 그녀가 디자이너로서 확고한 신념과 돌파구를 갖게 된 것은 1997년의 일. ‘최초의 잇 백’이라고 불릴 만한, 바게트백을 선보이면서부터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 브래드쇼가 강도에게 맞서 필사적으로 지키고자 했던 바로 그 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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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무솔리니 통치 시절인 1930년대에 건설된 경기장, 스타디오 데이 마르미의 대리석 조각상. 5 아티스트 소피 토이베르 아르프가 펜디의 2015/16 가을/겨울 컬렉션을 위해 선보인 작품.

진품의 가치를 아는 도시
현재 실비아는 가족 중 펜디를 위해 일하는 유일한 멤버다. 그녀는 펜디의 정신적 근간인 수공예적 장인 정신에 힘을 쏟는다. 변화를 거듭하는 트렌드의 물결 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수공예 작품에서 영감을 얻는다. 실비아는 로마에서 가장 좋아하는 동네로 오스티엔세(Ostiense)를 택했다. “중요한 장소들은 변함없이 예전과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요.” 로마의 역사지구나 그녀의 다섯 자매가 컬렉션 전시회를 열었던 시네시타(Cinecitta) 못지않게 오스티엔세는 인생의 주요배경에 속한다. 실비아의 딸 델피나 역시 이곳에 산다. 그녀는 일요일마다 펜디 가문의 삼대가 즐겨 찾는 단골 식당이자, 101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트라토리아인 알 비온도 테베레(Al Biondo Tevere)에서 식사를 한다. “아기 때부터 가던 가게라 이젠 주방에도 몰래 들여보내줘요. 테이크아웃도 가능하답니다.” 벽에는 유명인들의 기념 사인이 붙어 있고, 풀이 듬성듬성 나 있는 레스토랑 앞마당에는 플라스틱 의자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전통적인 이탤리언 스타일의 내부와 지나치게 밝은 조명이 눈에 띈다. “그래도 이곳의 단순한 스타일이 좋아요! 플라스틱 의자도요. 언제나 변함없이 자리를 지켜온 물건이니까요. 진품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이죠.”

그녀는 남들이 쉽게 눈치 채지 못하는 로마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큰 기쁨을 느낀다. 파시스트 정권이 로마 교외에 세운 건축물 팔라초 델라치빌타 이탈리아나(Palazzo della Civilta Italiana)가 바로 그 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랫동안 버려진 건물을 복구한 펜디는 올해 2월, 로마 중심가에서 이곳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우리는 이 건물을 건축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해요.” 식견이 부족한 사람들을 눈앞에서 내쫓기라도 하는 듯, 손가락을 바깥쪽으로 튕기는 전형적인 이탤리언의 제스처를 반복하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본사 이전 이야기만 나오면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지지만, 건축 그 자체로 정말 뛰어나거든요. 키리코의 그림과 꼭 닮은 형이상학적인 분위기가 멋지죠. 사실 본사 이전은 펜디의 회장이자 CEO인 피에트로 베카리의 아이디어였어요. 처음 이야기를 꺼낸 당시만 해도 지금 이 사람이 제 정신인가 싶었죠. 하지만 공간을 찬찬히 둘러보고 나서야 가치 있는 일이란 걸 깨달았어요. 건물에 깃든 빛과 에너지가 정말 환상적이라는 걸요! 6층짜리 건물이지만, 언덕 위에 있기 때문에 전망이 뛰어나요. 로마에서 가장 높은 건물일걸요? 카라라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 외관은 또 어떻고요! 너무나 순수하고, 아름다워요.”

실비아와 함께 보낸 시간은 그녀가 진품의 가치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이러한 생각은 이탈리아의 장인정신을 다룬 저서 <The Whispered Directory of Craftsmanship>에 그대로 녹아 있다. “취향은 보편적인 것이 되었어요. 도쿄에서도 시칠리아의 모디카 초콜릿을 살 수 있는 것처럼 세계 어디서나 원하는 제품을 구할 수 있죠. 이제 사람들은 제품의 유래까지 알고 싶어 해요.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요. 브랜드의 역사가 중요한 시대가 된 거죠.” 책장을 넘기던 그녀의 손길이 아동용 의류 부티크, 라보리 아르티지아날리 페미닐리(Lavori Artigianali Femminili)를 소개하는 페이지에서 멈췄다. 그녀의 표정이 부드러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활짝 미소가 번졌다. “내가 태어난 바로 그날, 이곳에서 옷을 맞췄어요. 딸 델피나도 그랬고, 손녀인 엠마도 그랬죠. 어린 시절, 내 옷의 치수를 쟀던 부인 중 몇 분은 여전히 이 곳에서 일하고 계세요.” 로마에는 역사와 전통을 지닌 상점이 무수히 많다. “로마 사람들은 오래된 상점을 통해 감각을 길러요. 어려서부터 물건에는 역사와 전통이 담겨 있다고 배웠고요.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감각을 익히는 거예요.” 그렇다면 로마에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름다움을 구분하는 감별 능력을 갖고 있어요. 우리 핏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죠. 그럼에도 우리는 아름다움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아요. 고대의 돌 위를 걷는 일이 우리에겐 평범한 일상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녀는 책장을 넘기다가 귀퉁이가 접혀 있는 페이지에서 눈길을 멈췄다. “조만간 이런 책을 한 권 더 써야 할 것 같네요. ” 이탈리아의 장인 정신을 다룬 책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은 더없이 맑고 순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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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합경기장인 피시나 데이 모사이치(Piscina dei Mosaici)의 수영장. 1985년 펜디는 업계 최초로 경기장에서 컬렉션을 개최했다. 2 펜디의 컬렉션이 열렸던 옛 모직공장, 라니피초 쿠치나의 벽면을 장식한 앤티크 자전거 바퀴. 3 파스티체리아 친퀘 루네에 진열된 과일 젤리들.

로마에 간다면, 여기부터!
실비아가 알려주는, 로마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장소들.

| SHOP |
볼페티(Volpetti)
“볼페티는 최고급 식료품점이에요. 햄, 치즈, 올리브오일, 와인, 파스타, 잼 등 이탤리언의 정수를 다루죠. 두 곳이 있는데 테스타치오의 첫 번째 상점에 들러야 해요. 나머지 하나는 주로 관광객을 상대하거든요. 여기서는 유리병에 담아 파는 구운 아티초크 뿌리를 즐겨 사요.” www.volpetti.com
파랄루미 L.A.R.(Paralumi L.A.R.)
“1938년 문을 연 전등 상점이에요. 할머니는 파랄루미 L.A.R.에서 내 어머니와 이모를 위한 전등 갓을 구입하셨어요. 어머니와 나도 아이들을 위한 전등 갓을 여기서 골랐죠. 가게에 들어서면 예술가의 공방에 온 듯한 기분이 들 거예요. 전등 하나하나가 조각품처럼 아름답거든요.” www.paralumi.it
캄포 메르카티 마켓(Campo Mercati Market)
“시장 구경은 여행에 재미를 더해주지 않나요? 안타깝지만 로마의 작은 시장은 점점 줄고 있어요. 테스타치오에 새로 생긴 시장은 꽤 훌륭하지만요. 내가 즐겨 찾는 시장은 피아자 몬테도로의 캄포 메르카티 마켓이에요. 훌륭한 채소와 신선한 생선을 구할 수 있는 전통 시장이죠.” www.mercatidiroma.com
빈첸초 피오바노(Vincenzo Piovano)
“조각가인 빈센초 피오바노는 이제 몇 남지 않은 모자이크 장인이에요. 로마의 뛰어난 공예가의 대다수가 이곳 비아델 오르소 거리에 모여 있어요. 금속공예가 마시모 마리아 멜리스(Massimo Maria Melis)도 이 거리에서 만날 수 있죠. 트레비 분수에서 걸어서 10분 남짓 걸리니까, 들러보세요!” Piovano Via dell’Orso, 26, Roma

| EAT |
파스티체리아 친퀘 루네(Pasticceria Cinque Lune)
“나보나 광장의 모퉁이를 돌면 보이는 디저트 가게예요. 이곳의 전통 캔디와 케이크는 고대 로마인이 맛보던 그 맛일 거예요! 페이스트리는 달지 않아서 즐겨 먹어요. 리코타 치즈와 계피 등을 넣어서 만드는데 그중에서도 무화과로 속을 채우고 월계수 잎을 얹은 빵을 좋아해요.” www.5lun.net
세티미오 알 펠레그리노(Settimio al Pellegrino)
“밖에서 보면 식당이 맞는지 의심스럽겠지만 벨을 누르면 식당 주인인 마리오가 나와요. 당신의 인상이 마음에 드는 경우에만 마리오의 아내 테레사가 준비한 오늘의 메뉴를 맛볼 수 있죠. 보통은 파스타 두 종류, 고기와 생선 요리를 각각 하나씩 준비해요. 운이 좋다면 최고의 계란 수프, 스트라치아텔라를 만날 수 있어요. 로마의 완벽한 가정식 요리랍니다.” Via del Pellegrino, 117, 00186 Roma
라니피초 쿠치나(Lanificio Cucina)
“로마 근교에 지어진 낡은 19세기식 모직 공장 건물이에요. 1990년대 초에는 이곳에서 펜디의 컬렉션을 열기도 했어요. 현재는 레스토랑과 바가 들어섰지만 건물 구조는 예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요. 기존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는 걸 로마인들은 그리 좋아하지 않거든요. 이처럼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건 앞으로 로마가 나아갈 방향이죠. 가끔 저녁 식사를 하러 들르는데, 맛도 좋아요.” www.lanifici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