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은 겉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사람의 마음을 훔치고, 심리적인 긴장을 풀어주기도 하고, 공간에 오래 머물도록 만든다. 향이 마케팅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브랜드 속에 파고든 향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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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엄마 화장대에서 맡았던 분 냄새와 햇볕에 말린 보송보송한 이불에서 나던 깨끗한 비누 향처럼 누구에게나 잊고 있던 추억을 소환하는 향 하나쯤은 있을 거다. 향은 이처럼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기도 하고, 사람의 감정을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향의 이러한 특별한 능력은 후각의 특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 몸의 다른 감각들과 달리 후각은 여러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영역으로 연결돼 무의식적으로 감정과 기억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연히 맡은 향으로 잊었던 기억을 떠올리고, 특정한 장소와 대상을 순식간에 기억해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향의 이러한 특별한 능력은 수많은 브랜드들 틈에서 특정 브랜드를 사람들의 뇌리 속에 각인시키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는데, 이를 가리켜 ‘향 마케팅’ 혹은 ‘향기 마케팅’이라고 부른다.

화장품 시장의 향 마케팅
향 마케팅은 다양한 분야에서 널리 쓰이는데, 가장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분야 중 하나가 바로 화장품 시장이다. 최근 합성향료에 함유된 일부 화학 성분이 두통이나 현기증, 발진 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무향에 가까운 제품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긴 했지만 소비자들이 화장품을 구매할 때 향은 여전히 중요한 고려 대상 중 하나다.

글로벌 뷰티 브랜드들 역시 화장품의 섬세한 텍스처와 더불어 은은하고 세련된 향이 브랜드 고유의 색깔이자 그 제품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라고 여겨 향을 선별하고 담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특히 화장품뿐 아니라 매장에도 동일한 향을 풍겨 브랜드만의 고유한 향을 브랜드를 각인시키는 ‘후각적인 로고’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러쉬다. 러쉬 매장에 가면 특유의 달콤하고 이국적인 향이 느껴지는데, 향만으로도 주변에 러쉬 매장이 있음을 바로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브랜드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강력한 요소다. ‘카마’라고 불리는 러쉬의 시그니처 향은 오렌지 껍질과 파촐리를 베이스로 한 향으로, 향수를 비롯해 보디 솝과 버블 바, 보디 크림 등 다양한 제품으로 출시되고 있다. 러쉬만큼이나 강력한 시그니처 향을 가진 브랜드로는 아베다를 꼽을 수 있다. 아베다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상쾌한 허브 향의 정체는 바로 샴푸어™아로마다. 유기농 라벤더와 페티그레인, 일랑일랑을 비롯한 스물다섯 가지 꽃과 식물에서 추출한 에센스를 조합한 향으로, 아베다 보태니컬 아로마 연구소에서 탄생해 1989년 브랜드 창립 이후로 줄곧 브랜드의 시그니처 향으로 사랑받아왔다. 허브 농장에 와 있는 듯 기분을 상쾌하게 하는 샴푸어™아로마는 소비자들에게 아베다를 자연친화적인 브랜드로 인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샴퓨어™ 라인 제품들뿐 아니라 전 세계 아베다 매장과 살롱의 향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조 말론 런던 역시 수많은 향수 라인 중 바질 앤 만다린 오드코롱을 브랜드의 시그니처 향으로 활용하고 있다. 전 세계 모든 매장에서 제품을 포장할 때 사용하는 검은색 습지에 바질 앤 만다린 오드코롱을 뿌리기 때문에 어느 매장에서나 향긋한 시트러스 향을 맡을 수 있다. 이솝은 각 지역의 특색을 반영한 개성 있는 인테리어만큼이나 매장에 들어섰을 때 숲을 거니는 듯한 싱그러운 향이 나는 걸로 유명하지만, 모든 매장에서 공통으로 쓰는 향이 어떤 향인지는 아직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다. 브랜드 고유의 향이 특급 기밀에 해당할 정도로 브랜드의 중요한 자산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샤넬이나 디올, 겔랑, 끌레드뽀 보떼 같은 럭셔리 코스메틱 브랜드의 에센스나 크림에도 고유한 향이 담겨 있지만 구체적인 향의 정체는 역시 비밀에 부쳐져 있다.

최근에는 글로벌 뷰티 브랜드뿐 아니라 국내 브랜드 중에서도 브랜드만의 시그니처 향을 개발해 제품과 매장에 사용하는 예가 많아지고 있다. 대표적인 브랜드는 바로 설화수다. 설화수는 소나무의 청량한 향을 담은 고유의 향인 ‘윤조지향’을 만들어 브랜드의 시그니처 제품인 윤조에센스에 담을 뿐 아니라 향초와 향낭, 포푸리로도 제작해 판매도 하고 있다. 윤조지향 외에도 설화수의 또 다른 상징인 매화 향을 담은 ‘매화지향’, 백단 향을 담은 ‘백단지향’ 등을 개발하기도 했다. 도산공원과 마주한 설화수의 플래그십 스토어에 들어서면 코끝에서 은은한 꽃향기가 느껴지는데, 바로 이 향이 매화지향이다. 또 플래그십 스토어에 자리한 스파에서는 트리트먼트를 받기 전 윤조지향과 매화지향, 백단지향, 솔지향을 담은 네 가지 향유 중 한 가지를 직접 선택할 수 있다. 헉슬리 역시 론칭 전부터 브랜드의 시그니처 향을 찾기 위해 공을 들였다. 90년 전통의 스위스 향료회사 루지사와의 협업을 통해 시그니처 향을 개발해 전 제품에 사용하고 있다. 깨끗하고 상쾌한 느낌을 주는 이 향은 브랜드의 핵심 원료인 선인장 오일과 투명하고 모던한 패키지와 어우러져 헉슬리만의 브랜드 이미지를 소비자들에게 성공적으로 각인시키는 데 일조했다. 지난해 이마트에서 론칭한 화장품 브랜드 센텐스는 향을 브랜드와 화장품을 차별화하는 부가적인 요소가 아닌 브랜드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로 적용한 사례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베스트셀러 향수들을 탄생시킨 세계적인 조향사에게 협업을 의뢰했을 정도로 조향에 특별히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했다. 라이프스타일과 스킨케어를 접목한 올리브영의 PB 브랜드 라운드어라운드 역시 향수와 디퓨저, 룸스프레이에 메종드파팡의 향수 컨설팅을 통해 탄생한 브랜드만의 시그니처 향을 담았다. 올리브영은 그린 플로럴 계열의 ‘올리브영’이라는 이름의 향을 룸스프레이 형태로 만들어 한시적으로 올리브영 매장의 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향기를 입은 패션 브랜드
향을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례는 패션업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러쉬만큼 강력한 향을 풍기는 패션 브랜드로는 아베크롬비 앤 피치를 들 수 있다. 아베크롬비 앤 피치는 매장 건너편에서도 특유의 시원한 향이 느껴질 만큼 향이 강렬하기로 유명하다. 향의 발원지는 아베크롬비 앤 피치 피어스 오드코롱이다. 2000년대 초부터 매장 안에 공기 중으로 향을 분사하는 기계를 설치해 전 세계 어느 매장에서나 동일한 향을 맡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향수로도 출시돼 베스트셀러로 사랑받고 있다. 파리의 편집숍 콜레트 역시 공간에 고유의 향을 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매장 문을 열고 들어서면 무화과 잎의 신선한 향이 코끝을 스치는데, 프랑스어로 ‘콜레트의 공기’라는 이름으로 향수뿐 아니라 향초, 아로마 오일로도 출시됐을 만큼 인기다. 반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스트셀링 향수를 가지고 있는 패션 브랜드들은 매장을 위한 향을 따로 만드는 대신 시그니처 향수의 향으로 공간을 채운다. 캘빈 클라인은 씨케이 원 오드뚜왈렛을, 샤넬은 샤넬 넘버 5나 넘버 5 로를, 끌로에는 끌로에 오드뚜왈렛을, 톰 포드는 화이트 스웨이드 오드퍼퓸이나 블랙 오키드 오드뚜왈렛을 주로 사용한다.

최근 몇 년간 니치 향수와 향초를 비롯해 향 전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해외뿐 아니라 국내 패션 브랜드에서도 향 마케팅을 차츰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마트 자체 SPA 브랜드인 데이즈는 얼마 전, 스타필드 하남에 단독 매장을 열면서 그린과 우디, 플로럴 향을 섬세하게 조합한 시그니처 향을 개발했다. SPA 브랜드지만 고급스러운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이탈리아 전통 클래식 브랜드와 협업한 정장 라인을 선보이기도 한 데이즈는 시그니처 향 역시 클래식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향조를 택했다. 넓은 공간에 향을 미세하고, 균일하게 분사하기 위해 고가의 전용 분사기를 설치했을 만큼 공을 들였다고. 데이즈 같은 대형 브랜드뿐 아니라 규모가 작은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 중에서도 시그니처 향을 도입하는 경우가 하나 둘 늘고 있다. 고엔제이의 정고운 대표는 가로수길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면서 향수 컨설팅을 받아 브랜드 고유의 향을 개발했다. “파리의 콜레트나 더 브로큰 암이라는 카페에서 느꼈던 공간의 향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사람들이 고엔제이 하면 떠올릴 수 있는 향을 만들고 싶었죠. 향수 컨설팅을 하는 지인과 제가 평소 좋아하는 향수와 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위스키와 앰버, 머스크의 향을 담은 중성적인 향을 만들었어요. 디퓨저로 만들어 공간에 향이 은은하게 퍼지게 하고, 패브릭 스프레이로 제작해 포장지에 향을 뿌려서 옷에도 향이 자연스럽게 배도록 하고 있어요. 향을 맡고 직접 구매하는 분들도 있는데, 의외로 남자분들이 좋아하세요.”

이처럼 국내에도 향 마케팅을 도입하는 경우가 늘어나고는 있지만 일본이나 미국처럼 향 마케팅에 과감한 투자를 하는 경우는 아직까지 드물다. 기존에 만들어진 향료를 받아 쓰거나 유명 향수를 모방한 ‘카피 향’을 만드는 건 쉽지만 전혀 새로운 향을 만들기 위해서는 IT산업처럼 연구 개발에 많은 인력과 비용이 투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센텐스와 데이즈의 향 컨설팅을 담당했던 메종드파팡 김승훈 대표는 향 마케팅의 한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세계적인 마스터 조향사뿐 아니라 향료 회사와의 긴밀한 파트너십이 필요한 조향 산업의 특성상 웬만한 투자 비용과 생산 규모를 갖추지 않고서는 직접 새로운 향을 만들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그래서 대부분은 유명한 향수를 모방한 향료를 공급받아 사용하고 있죠. 최근 몇 년간, 국내 화장품 브랜드나 패션 브랜드로부터 고유의 향을 만들고 싶다는 제의가 많이 들어오지만 실제로 성사되는 사례는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매우 적은 편이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향 마케팅의 앞날은 밝은 편이다. 흔하지 않은 향을 찾기 원하고, 원하는 향을 갖기 위해 과감하게 투자하는 이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니치 향수’의 뜻도 정확히 모르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굳이 외국에 나가지 않더라도 전 세계의 수많은 니치 향수 브랜드를 만나볼 수 있게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개성보다 유행을 중시하는 시대에, 브랜드 고유의 색을 입힌 변치 않는 향이 있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