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 파괴, 1980년대 과감하고 낙낙한 실루엣의 파워 슈트가 돌아왔다.

‘젠더리스’ ‘앤드로지너스’라는 수식어 아래 복식 개념이 여성과 남성의 구별을 초월하는 옷차림은 이제 우리에게 익숙하다.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나 뮤지션 해리 스타일스 등 유명인이 스커트를 입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지만, 이미 오래전에 여성이 슈트를 입은 순간 성별의 구분은 무의미해졌다고 할 수 있다. 여성이 슈트를 입기 전까지, 날렵하게 재단한 재킷이나 코트, 베스트 같은 테일러드 실루엣과 핀 스트라이프, 글렌 체크 같은 패턴 등은 남성의 옷장을 채우기에 바빴으니까. 이번 시즌, 많은 디자이너가 담합이라도 한 듯 중성적이면서도 파워풀하고 볼드한 오라를 갖춘 파워 슈트를 대거 선보이고 있다. 이는 어깨에 대형 패드를 부착하고 더블브레스트를 즐겨 입던 1980년대의 과감하고 낙낙하던 실루엣을 연상시킨다.

성별의 경계가 사라진 자리는 고급스러운 소재와 타임리스한 스타일링이 더해져 전체적인 룩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힘을 보탰다. 가장 먼저 샤프한 어깨선이 돋보이는 볼드한 블레이저의 스커트 슈트를 선보인 생 로랑을 꼽을 수 있다. 생 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토니 바카렐로는 2023 F/W 컬렉션을 소개하며 특정 여성상을 구현하는 대신 “정교하고 감성적이면서 무게감 있는 생 로랑 스타일에 자신만의 스타일과 모던함을 조합해 새로운 실루엣을 선보이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완성된 것이 바로 컬렉션에서 반복적으로 보이는 구조적인 스커트 슈트다. 그는 성별의 경계를 지우기 위해 날카로운 테일러링과 남성복에서 주로 사용하는 패턴을 적극 차용했다. 이는 시그너처 스카프와 시어한 스타킹, 블라우스, 스커트, 팬츠 등과 충돌하며 때로는 모던하게 때로는 화려하게 쿠튀르적인 심상을 완성한다.

지난 시즌, 거센 논란에 휘말린 직후 기본에 충실한 컬렉션을 선보인 발렌시아가에서 선택한 ‘본질’ 역시 오버사이즈 테일러링 슈트다. 뎀나 바잘리아가 이끄는 발렌시아가는 매 시즌 독특한 마케팅으로 흥미를 끌었으나 넘지 말아야 할 도덕적 선을 넘는 바람에 거센 역풍을 맞았다. 이번 시즌에는 어떤 퍼포먼스도 없이 차분한 가운데 런웨이를 치렀는데, 그래서인지 의상이 더 돋보였다. 로고도 슬로건도 없이 오로지 실루엣과 패턴, 스타일링을 부각한 의상들. 테일러링이 탁월한 발렌시아가의 유산과 언밸런스한 커팅, 유니크한 패턴의 초기 베트멍의 매력이 조화를 이뤄 남녀 구분 없이 뎀나 바잘리아의 추종자를 다시 열광시켰다.

아방가르드한 체크 패턴의 파워 슈트를 선보인 루아르와 크래프트맨십을 더한 파워 코트를 소개한 톰 브라운. 팬츠리스 소녀미에 파워 재킷을 더한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미우미우, 1980년대를 지나 90년대로 넘어가는 오버사이즈 슈트의 보테가 베네타와 구찌의 더블브레스트 코트도 시선을 모은다. 당장 신상 아이템이 없다면, 옷장 안에 잠자고 있는 엄마 아빠의 낡은 코트, 남자 친구의 낙낙한 재킷을 눈여겨보라. 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시어한 스타킹이나 펜슬 스커트, 캐시미어 니트 팬츠, 혹은 바닥까지 끌리는 트랙 슈츠가 어울릴지도 모른다. 남과 여, 신상과 빈티지, 포멀과 캐주얼, 아름다움에는 경계가 없으므로 파워풀하게 입으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