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구본창의 미공개 작업
사소하게 버려진 사물에 애정을 쏟아 자기만의 시선으로 간직하는 사진가 구본창이 그린 얼루어를 위해 보내온 미공개 작업.
3·1문화상 수상을 축하드려요.
올해로 63회째니까 유서 깊은 상이죠. 그게 참 쉽지 않 은 일일 텐데 묵묵히 해왔다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 다양한 영역의 인물에게 주어지는 상인데요. 예술 분야 에서 사진가가 받은 건 내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의미 가 있어요. 영광스럽죠. 얼마 전 돌아가신 이어령 선생 도 수상한 적이 있으니 왜 안 그렇겠어요.
상이 주는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어때요?
상을 바라고 작업을 하는 건 아니지만요. 내가 하는 건 그냥 하는 거니까요. 다만 나서지 않고 내 할 일을 해왔 는데 관심을 가지고 알아봐준 사실이 내게 큰 힘이 실 리는 느낌이더군요. 사진계에 어떤 방식으로 보답을 해 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계기가 될 것 같고요.
3년 만에 온 분당 작업실의 풍경이나 온화한 말투, 여전한 그 모습이 좋네요.
그래도 시간이 흘렀으니 여러 일이 있었고 변한 것도 있을 테죠. 모처럼 연락이 와서 ‘그린 얼루어’에 관한 과 제를 내준 거잖아요.(웃음) 잘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요 며칠 고민을 했어요. 예전 작업까지 다 끄집어내서 어떻 게 하면 취지에 맞게 내 작업을 잘 연결할 수 있을지 애 를 썼죠. 나름대로는 신선한 시간을 보냈어요. 역시 이 렇게 숙제를 받아야 하게 된다니까.(웃음)
지난 인터뷰에서 이것저것 수많은 작업과 자 료를 꺼내 보여주신 모습이 선해요. 세상이 알고 있는 ‘구본창의 사진’은 빙산의 일각이 라는 걸 알게 됐고요.
하나하나 작품으로 볼 수도 있지만, 스케치라고 하면 어 떨까 싶네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한 준비 작업 같은 거 죠. 스케치를 정말 많이 하는 편이에요. 그게 모여서 시 리즈가 되기도 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기도 하죠. <얼루어>에 보낸 사진들은 따로 모아서 발 표한 적이 없는 사진들이에요. 기회가 된다면 이렇게 한 번 묶어서 보여줘도 좋겠다 싶었던 것들이죠.
시간이 켜켜이 쌓인 물건을 찍은 사진이 인 상적으로 남았어요. 너무 쉽게 쉽게 버리는 세상이잖아요.
난 너무 아끼고 너무 안 버려요. 30년 된 와이셔츠는 기 본이고 젊은 시절 독일 유학 때 입던 옷도 그대로 가지 고 있어요. 존재 자체를 아끼니까 못 버리는 거예요. 자 기 나름대로 쓰임새가 있던 물건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 각해요. 하다못해 이런 옷걸이도 그래요. 그냥 보면 아 무것도 아니지만, 가냘픈 라인이 가지고 있는 정서가 있 어요. 나는 그런 걸 봐요. 그럼 쉽게 버릴 수가 없게 돼 요. 아끼게 되고 들여다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애틋해지 거든요. 모든 물체는 생명력을 지닌 채 지속가능한데 우 리는 너무 쉽게 폐기처분하는 것 같아요.
구본창의 사진이 그렇지만 아름다우면서도 애틋한 정서가 스며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내가 찍은 정물 사진에 묘한 서글픔 같은 정서가 있다고들 하죠. 내가 그런 사람이라서 그런 거겠죠.
이 사진들은 ‘그린 얼루어’와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까요?
자연을 구해야 한다는 직접적인 메시지가 담긴 건 아 니에요. 그런 의도로 찍은 것도 아니고요. 나는 원래 세 월의 흔적이라든가 시간의 축적, 이런 거에 워낙 관심 이 많은 사람이에요. 새것보다는 손때 묻은 오래된 물건 을 좋아해요. 거기에서 의도하지 않은 아름다움과 존재 감을 찾아내는 걸 즐기고 또 잘하죠. 사진 속 물건이라 는 게 남들이 보면 그냥 쓰레기잖아요. 사용되고 남겨진 것, 쉽게 버려진 것들이란 말이죠.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어야 마땅한 물건을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고, 아름다 움을 찾아낸 작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직접적인 발언보다 은유가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가 있죠.
뭘 살 때 애정을 가지고 오랫동안 쓸 수 있을지 없을지 고민하는 태도가 필요할 것 같아요. 내 물건에 애정을 가지고 오래 잘 쓰면 쓰레기가 생길 일도 없어지는 거 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이 사진들이야말로 ‘그린 얼루 어’의 메시지를 잘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내 삶 의 태도이기도 하고요. 지구본이 새까맣게 불탄 사진을 봐요. 상징적이지 않나요?
기후위기를 떠올리게 해요. 그 문제에 대해 서도 생각하세요?
그레타 툰베리 같은 활동가의 주장을 공감하고 지지해 요. 나도 그런 쪽에 관심이 많아서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챙겨 보는데요. 요즘 전 세계적으로 산불과 홍수 같은 이상 기후가 빈번하잖아요. 빙하는 녹아내리고 있고요. 발등의 불로 안 느껴지니까 그렇지, 큰 문제라는 걸 인 식하고 있어요. 기후위기 활동가들의 주장은 일회용 빨 대 하나 안 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거잖아요. 아 주 거대한 인식의 전환과 실천이 뒤따라야 하는데 글쎄 , 그게 쉽게 될까요? 인류는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하 는 존재잖아요. 애초에 모르고 살면 모르고 산다지만 그 맛을 알아버렸는데 멈추거나 거꾸로 가는 일은 생각보 다 쉽지 않을 거로 생각해요. 그게 참 문제예요.
불에 탄 지구본도 그렇고 사진 속에 등장하 는 물건은 어떻게 만나게 된 것인가요?
다 우연히 만나게 되죠. 일부러 찾아 나서면 절대로 만 날 수 없거든요. 대부분 누가 버린 건데 길에서 만나면 뛰어가서 가지고 오고 그래요. 첫눈에 반한다고 하잖아 요. 물건도 그래요. 반짝거리지도 않고 값어치도 없는데 길 위에서 애틋한 눈길을 보내는 것들이 있어요. 늘 보 던 건데 그날따라 다르게 보이는 경우도 있고요. 그날 내 심정이나 기운, 날씨 같은 게 함께 작용하면 그래요.
그 물건은 바로 카메라 앞에 서게 되나요? 아니면 몇 날 며칠 두고 보나요?
바로 찍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작업실 한쪽에 두 고 이렇게 계속 보죠. 관찰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내 마 음이 다시 움직일 때 촬영을 해요. 어떤 건 1 0년째 보고 있는 것도 있답니다.(웃음)
버려진 물건이 작품이 되는 순간이네요.
작가는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걸 끊임없이 들여다보 고 그 안에서 새로운 걸 발견해내는 사람이에요. 그런 눈썰미와 태도가 필요해요. 고된 일이지만 그게 작품 하 는 맛이죠. 사람들이 공감해준다면 신이 나고요.
잡지 에디터에게도 필요한 태도가 아닐지, 그런 생각이 드네요.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개인 작업도 하지만 매체 작 업도 많이 했으니까 잡지의 시스템도 잘 알아요. ‘그린 얼루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환경을 보호하자는 의미 없는 외침에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식상하잖 아요. 매년 진행하는 거라면 좀 길게 보고 가는 장기적 인 프로젝트를 진행해도 좋지 않을까요? 뭐가 될진 모 르겠지만 그런 게 더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잖아요.
잡지를 말할 때와 작품을 말할 때의 표정이 나 태도가 달라요. 잡지를 좋아하시죠?
잡지처럼 매력적인 매체가 또 없죠. 요즘은 디지털도 중 요하겠지만, 인쇄물이 주는 대체 불가능한 힘이 있잖아 요. 한 장 한 장 넘겨 보는 그 행위가 특별하다고 생각해 요. 매달 많은 사람에게 보이고 리액션을 확인하는 건 아주 큰 자극이 되잖아요. 국내외의 좋은 잡지를 버리지 못하고 아직 모아두고 있고요. 전에도 잔소리처럼 말했 겠지만, 버리고 싶지 않은 잡지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죽어 있는 페이지가 있으면 안 돼요.
‘죽어 있는 페이지’를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해외 전시나 여행을 통해 얻는 영감도 상당 할 텐데 요즘은 어떠세요?
그러니까 답답하죠. 지금 중국에서 큰 전시가 있는데 갈 수가 없으니 안타까워요. 전시장도 둘러보고 전시를 본 사람들과 교류할 기회가 없어졌으니 재미가 없죠. 줌 같 은 영상 통화로 뭘 하긴 하는데 내 성에는 안 차고요.
요즘은 뭘 하며 지내세요?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그동안의 작업과 자료를 정리하면서 스스로를 다시 캐낸다고 할까요. 인 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으로 소통을 하기도 해요. 소셜 미디어가 불필요하다는 사람도 있지만 난 좀 달라요. 잘 사용하면 다양한 세계의 사람들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되더라고요. 흥미로워요. 바깥으로 다닐 때 느끼는 재미 나 자극과 또 다른 걸 느끼고 배우게 되는 것 같아요.
며칠 전에는 소셜 미디어에 비무장지대에서 발굴한 전쟁 유품을 담은 시리즈와 함께 ‘ No More War!’라고 올리셨더군요.
참담해요. 무고한 사람이 죽고 다치는 전쟁은 반대해요 . 아주 나쁜 거라고 생각해요. 막 화가 나더라고요. 내 방 식대로 목소리를 내고 싶어서 그렇게 한번 올렸어요. 작 은 목소리이겠지만 주변 동료들이 공감해주기를 바라 는 마음에서요. 같은 하늘 아래 그 참상이 벌어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견딜 수 없이 슬프더군요. 인 생이라는 게 왜 이렇게 전부 모순 덩어리인가 허탈한 심정이에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모순된 인간의 삶을 작업으로 표현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끊임없이 고민하고 질문하고 찾아내는 것처 럼 보이네요. 그게 작가의 삶이겠죠?
이제 내가 일흔이 다 되어가는데 어떤 면에서는 두려운 게 없어요. 내 안에 확신이 있다면 끝까지 밀어붙여야 죠. 아직 지치거나 식지 않았어요.
이 생크림 케이크는 조금만 드셔야 할 것 같 은데요?
글쎄, 단것을 좋아하는데 이제 건강을 조심하긴 해야죠 . 아직 정리해야 할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지만, 그 래도 뭐 때가 되면 떠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그 것도 잘 준비해야겠죠. 호텔 체크아웃 일정은 내가 선택 할 수 있지만 죽음은 그게 아니잖아요. 언제 체크아웃 당할지 아무도 몰라요.(웃음) 그러니까 그날그날 열심히 사는 게 최선인 것 같아요. 좋은 생각을 많이 하면서.
- 에디터
- 최지웅
- 포토그래퍼
- KOO BOHNCH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