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스타일의 시대라지만, 자신만의 삶을 꾸려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나의 철학으로 진짜 삶을 만들어가는 남지현의 이야기.

 

남지현

4년 전까지 <얼루어 코리아>의 패션 디렉터로 뜨겁게 살아온 남지현은 조금 숨을 돌리기 위해 쉼을 선택한다. 그 무렵 유방암 판정을 받고 항암치료를 견디며 그의 일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악순환에서 선순환으로 삶을 변화시킨 건 결국 고통이었어요.” 남지현의 말이다.

 

몇 년 전까지 <얼루어 코리아>의 패션 디렉터였습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나요? 
고됐어요.(웃음) 회사 일이 벅차서 힘들었다기보다 제 정신 상태가 그랬어요. 마치 안전장치 없이 암벽을 오르는 모습이 떠올라요. 멈추자니 힘이 더 빠질 것 같고 기를 쓰고 올라가긴 하는데 어디로 가는지 명확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안전장치가 있어요. 그래서 올라가다 힘들면 바람을 느끼며 땀도 식히고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가 생겼어요. 그리고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확실히 알고 있으니 과정이 고될지언정 불안하진 않아요.

사랑과 에너지를 쏟았던 일을 그만두었을 땐, 어떤 마음이었어요? 
몸이 분명하고 절박하게 쉬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어요. 저는 싱글 워킹맘이고, 일년에 열두 번의 마감을 하고, 야근이 잦은 일을 하다 보니 몸이 어느 시점에서 고갈된 거죠. 마침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시기여서 아이에게 좀 더 집중할 시간도 필요했기에 퇴사를 결심했어요.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매체를 떠날 때 두려움은 없었나요? 
<얼루어 코리아> 전에 <하퍼스 바자 코리아>에 있었는데, 그사이 프리랜서로 일을 해봤기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어도 굶어 죽진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육아를 위해 일을 내려놓는 게 아니라 지금 더 중요한 것들은 우선에 둔다 생각하니 그냥 자연스러웠어요. 커리어가 뒤로 밀리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데 삶이라는 균형을 두고 봤을 때에는 오히려 지름길인 경우도 있더군요.

그후 프리랜서 패션 디렉터로 지내다 유방암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야기를 해줄 수 있나요?
퇴사 후 그럭저럭 잘 지내다 우연히 가슴에서 콩알처럼 딱딱한 무언가가 만져졌죠. 직감적으로 암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억울하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펑펑 울었던 게 기억나요. 정확한 진단이 내려졌을 땐 스스로 놀랄 만큼 오히려 담담했어요. 수술한 후 한 달이 지나면 치료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각 분야 교수들과 모여 회의를 하는데, 웃으며 인사하고 들어가니 담당교수가 저한테 그렇게 웃을 상황 아니라면서, 항암 해야겠어요 라고 말하는 거예요. 항암은 안 할 줄 알았거든요. 근데 항암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그날 밤 딱 하루 울고 그 다음 날 가발 사러 갔어요.

이왕이면 시간을 들여 예쁘게 먹는다. 꽃을 넣어 얼린 얼음.

늘 곁에 두는 요가 매트.

치료 과정은 어땠어요? 
다행히 1기였지만 나이가 젊은 편이라 암세포의 성장속도가 빠르고 3중 양성 유방암이어서 수술 후 4번의 항암, 방사선 그리고 18번의 표적치료를 했어요. 작년 여름에 모든 치료가 끝나고 지금은 추적 관찰을 하며 지내고 있어요. 수술이나 다른 치료는 어렵지 않았는데, 고작 4번이었던 3개월간의 항암은 진짜 아프더라고요.

항암치료 과정은 정말 악명이 높죠. 
멀쩡하던 몸이 항암제 한 방이면 속수무책으로 부스러져요. 항암주사는 암세포의 성질과 같은 성장 속도가 빠른 세포를 다 같이 박멸하죠. 점막세포와 백혈구가 희생돼요. 입에서부터 항문까지 이어지는 소화기 전체를 구성하는 점막 세포가 죽으니 물을 마실 때도 속이 불타올라요. 머리카락도 다 빠져요. 특히나 여성호르몬 암의 항암제는 백 퍼센트 탈모 증상을 동반해요. 머리가 그냥 빠지는 게 아니라 두피가 벗겨지고 모낭염이 돋아 진물이 나요. 난소 기능도 정지되니 갱년기 증상으로 밖으로 열이 오르고 감정기복도 제멋대로죠. 게다가 투여받은 항암제의 주 부작용이 근육통과 신경통이었어요. 뼈가 으스러지는 듯하고 신경이 뾰족하게 곤두서 끊어질 것 같은 몸살, 몸 안과 밖이 활활 타오르는 감각은 불지옥 같아요. 면역 체계의 고장으로 혈관 부종이 생겨 장기와 손가락이 부어오르죠. 이토록 섬세하게 생생한 통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채소가 중심인 저탄고지 식단을 유지한다. 일명 #nj의 용감한 식단.

그 후로 많은 것에 변화를 꾀한 것으로 압니다. 먼저 음식을 바꿨다고요? 
항암 부작용을 겪으며 몸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항암은 지금 의학기술이 할 수 있는 최선일 뿐 정답은 아니라는 걸 치료 과정을 통해 배웠어요. 암은 정복하는 게 아니라 잘 타일러 같이 사는 거라는 말이 정말 와 닿았어요. 우리 몸은 각자 세심하게 작성된 사용 설명서가 있어요. 모든 사람이 유기농과 무항생제를 먹어야 해가 아니라 유전적으로 질병에 취약하여 건강하지 못하다면 내 몸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먹는 것과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해요.

어떤 음식을 먹고 있어요? 
인스턴트 식품은 되도록 먹지 않아요. 암 세포는 탄수화물을 먹이로 삼기 때문에 정제 탄수화물과 당을 줄였어요. 호르몬 암이니 호르몬을 교란시킬 수 있는 항생제가 많이 들어간 식재료와 유제품은 되도록 삼가고요. 당근이나 셀러리를 착즙으로 마시고 질 좋은 지방을 에너지원으로 삼으려고 해요. 미네랄과 비타민 섭취를 위해 영양제도 먹죠. 그런데 절대적으로 지키지 않아요. 채식주의자도 아니고요. 작정하고 어떤 주의가 되겠다고 하니 금세 지치고 그 자체가 강박이 되더군요. 삶은 장기전이잖아요.

지난해부터 ‘호기’란 이름으로 일러스트를 그리기 시작했다.

음식 외에 가장 큰 변화는 뭐였나요? 
커피를 끊고 보이차를 마시기 시작했고 유해한 화학제품이 들어간 화장품, 세제를 바꾸고 일주일에 3일 이상 꼭 PT와 요가를 하고 산책을 하죠. 살아가는 태도,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뀐 게 가장 큰 변화예요. 내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는데 나는 나아지고 있어요. 죽었다 살아났다고 할 만큼 아팠으니까 예전의 삶에서 없던 한 가지,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지금도 여전히 예민하고 스트레스에 취약한데 감사가 끼어드니까 바닥까지 내려가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여유가 생기고 덜 지치고 덜 아프고 그래서 더 여유가 생겨요.

의학적 치료 외에 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삶에 대한 의지요. 암병동에서 지내면서 이게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구나 알았어요. 어떤 중년 여성은 재발해서 들어왔는데 항상 과자를 먹었어요. 암 걸리면 어차피 다 죽는다면서요. 또 어떤 사람들은 아픈데도 눈빛이 살아 있고 얼굴이 선해요. 자신의 몸에 대해 공부하고 대체 치료 방법을 알아내고 식습관을 고치는 이런 모든 행동이 다 살겠다는 의지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그건 단순한 긍정적 사고나 낙천적인 성격으론 안 돼요. 내가 치열하게 내 삶을 사랑하겠다고 마음먹어야 해요.

최근에 작업한 <아 요가> 매거진 vol.2.

작년 창간한 <아 요가> 매거진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어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전부터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선배가 콘텐츠를 같이 만들자고 제안했었어요. 그때는 제가 요가를 하지 않던 때라 단순히 선배 일을 도와주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러다 항암 후 선배 집에서 지인들과 소그룹 요가를 시작했죠. 민머리인 데다가 면역력이 약할 때라 집에만 있기 답답해서 사람들도 만나고 할 겸 시작했는데 해보니 좋았어요. 실제로 대체 의학에서도 요가를 권해요. 암세포는 산소를 싫어하거든요. 요가는 호흡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의학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몸을 이완하는 훌륭한 운동이에요. 매트 위에선 자기 자신을 가장 적나라하게 마주하게 돼요. 내 몸의 소리를 진짜로 들을 수 있는 시간이죠. 제 회복 시기와 선배가 매거진을 준비하는 시기가 잘 맞았고 그렇게 함께하고 있어요. 처음엔 ‘더미’ 만들 듯이 한번 해봤는데, 협업 제품도 만들고 두 번째 매거진도 나왔어요.

<아 요가>는 누구를 위한 매거진이고, 어떤 이야기를 담으려고 하나요? 
<아 요가>는 보통의 모든 사람을 위한 매거진이에요. 요가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해야 하죠. 두 번째 <아 요가>의 주제는 ‘Yoga is for Everybody’였어요. 일상적인 요가, 우리 주변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으려고 해요. 도시에서 스트레스를 마주하고 긴장이 팽팽한 삶 속에서 찾는 균형이 정말 균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지나치게 종교적이지 않고 지나치게 무겁지 않게, 그것 역시 균형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잘하는 것, 위트 있고 야릇하게요.

직접 그린 <아 요가>의 ‘2021 날마다 아사나’ 캘린더.

커피 대신 보이차를 마신다.

지금은 일과 삶의 밸런스를 어떻게 유지하고 있나요? 
이번 달은 너무 바빠서 균형이 무너졌어요.(웃음) 아프면서 매일매일 아무 일도 없이 지낼 때는 제가 득도한 줄 알았는데 다시 일을 하다 보니 ‘난 그냥 나였네’ 라는 자괴감이 들 때도 있어요. 일 때문에 일상이 휘둘리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일에 휘둘려 요동치는 마음도 있어야 평온한 날에 감사가 있어요. 그래도 달라진 점은, 무의식적으로 여유를 찾으려고 해요. 바쁜 와중에도 차를 우린다거나 반려견과 산책을 나가는 제 자신에 놀라요.

일은 어떤 활력을 주고 있나요? 
일은 선택일 수 없어요. 전 우리 집의 가장이니까요. 예전엔 잘할 수 있는 것, 좋아하는 것을 찾으려고 노력했다면 요즘은 내가 죽기 전에 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요. 저는 누구나 사명이 있다고 믿어요. 목숨 걸 만큼 대단한 일을 하자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대단히 필요한 사람이고 싶어요. 지금 일은 그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의 접점이에요.

회복의 힘은 어디서 온다고 생각하나요? 
삶을 사랑해보려고 작정하는 마음.

반려견 땅콩. 유기견을 입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