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 빠진 독

미스터리로 가득한 잔고를 보는 일도 질렸다. 새는 구멍을 막으면 좀 낫지 않을까? 그런데 대체 그게 어디길래?

연말정산 결과가 나왔다. 본래의 목적은 정확한 세금 납부에 있지만 한 해의 총소득과 총지출이 떡하니 적혀 있는 것을 보니 마치 지난 1년간의 소비생활 성적표를 받은 듯했다. 분명 벌긴 벌었는데 남은 게 없다. 반대로 쓰기도 썼는데, 이 또한 남은 게 없다. 종자돈을 모으겠다는 포부를 안고 주택청약도 들고 적금도 들고 나름대로 한 달의 예산을 정해놓고 썼는데 왜 이렇게 되었나. 푼돈을 모아 목돈이 되기도 전에, 푼돈부터 줄줄 새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썼지만 나도 모르게 쓴 내 돈의 출처를 찾아보기로 했다.

어른의 일

시대와 세대를 막론하고 지출 분석의 중심에는 늘 가계부가 있다. 쌈짓돈처럼 모아온 영수증을 펼치며 매일 수기로 기입하면 살과 뼈에 새기듯 모든 소비가 기억에 남아 효과적이라고는 하지만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 시대, 나에겐 가계부 앱이 있다. 사용한 지 1년 남짓 되어가는 ‘뱅크샐러드’는 누적 다운로드 수만 850만이 넘는, 가계부 앱을 검색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다운로드해봤을 법한 앱이다. 여러 은행의 계좌와 카드, 보험 등을 연동해 한눈에 자산을 조회할 수 있으며 통장 입출금, 카드 지출 내역에 따라 자동으로 가계부가 작성된다. 하지만 앱의 기록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당장 이번 주의 내역만 거슬러 올라가도 카드이체 대신 네이버 페이, 카카오 페이, 핸드폰 결제로 구매한 것은 제대로 된 카테고리로 기록되지 않았다. 카드로 계산한 내역 또한 두루뭉술하긴 마찬가지다. 대부분 온라인쇼핑으로만 크게 잡히며, 사용처가 애매할 경우엔 미분류로 남겨지는 게 태반이다. 이 상태로는 지출 분석을 해보아도 식비 30%, 온라인쇼핑 30%, 교통비 10%, 미분류 30% 따위의 의미 없는 데이터만 도출될 뿐이다.

“정확한 지출내역 분석을 위해서는 카테고리 설정부터 섬세하게 해야 합니다. 기본 설정에서 자신의 소비 패턴에 맞춰 어떤 분류는 빼고, 더해보세요. 카페 이용이 잦다면 카페라는 대분류에서 더 들어가 커피, 베이커리, 디저트, 도넛 등으로 세분화하는 거죠. 번거롭더라도 상세한 기록은 분석을 배신하지 않아요. 이후 ‘데이터 내보내기’를 통해 정리된 모든 내역을 엑셀 파일로 받아보세요.” 뱅크샐러드 고객감동팀의 말이다. 앱을 1년 동안 이용하면서도 ‘데이터 내보내기’라는 기능이 있는 것을 처음 알았다. 당장 실행해보니 최근 1년의 현금흐름을 달별로 정리한 엑셀 파일이 메일로 들어왔다. 월수입 총계와 월지출 총계, 순수입 총계까지 정작 나는 모르고 있던 나의 현금 흐름이 한눈에 보였다. 집세, 관리비, 보험료 등 고정적으로 지출되는 비용과 달에 따라 널뛰듯 변동적인 비용이 구분되었다. 변동 비용이 큰 달은 순수입이 고작 2만7천원에 그칠 정도로 심각했는데, 이제 어디서부터 어떻게 지출을 막아야 하는 걸까?

보복소비의 말로

<나는 퇴사하고도 월 100만원 더 모은다>의 저자 민선은 가계부를 쓰는 것만으로 자산관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가계부를 쓰더라도 그 목적과 의미를 확실히 알고 쓰는 것이 중요해요. 지출을 줄일 의지로, 지난 내역을 보며 철저히 분석하고 반성해야 하죠.” 저자의 말에 따라 나의 지출 내역을 조금 더 의식적으로 들여다보았다. 지금 당장 줄일 수 있는 새는 돈으로는 구독 서비스가 있었다. 통신비와 미분류 내역 중 매달 동일하게 지출되는 내역을 확인하니 현재 넷플릭스, 왓챠, MS오피스, 애플뮤직, 멜론, 산돌구름 폰트, 쿠팡 멤버십 ‘로켓와우’, 영상 편집 앱인 비디오리프를 구독하고 있었다. 이 중 사용빈도가 낮거나 현재 필요하지 않은 서비스만 해지하더라도 월 2만1천5백원을 절약할 수 있었다. 카페 이용 내역 중에서는 특히 주말마다 디저트 소비가 높았고 회당 평균 2만원에 육박하는 비용을 지출하고 있었다. 아예 안 먹는 것은 아닐지라도 횟수 또는 비용을 줄이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들여다 보니 특이한 점은 또 있었다. 병원비 지출이 있는 날, 쇼핑 비용이 덩달아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는데 실제로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마다 보상심리로 쓸데없는 쇼핑을 하는 습관이 있다. 이달만 하더라도 충동적으로 구매한 인센스 스틱과 러쉬의 밸런타인 한정 샤워젤, 이토준지 걸작선 모음이 있다. 비용만 본다면 새는 돈이라고 하기엔 크지만, 나도 모르게 지출한다는 점에서 가장 강력하게 새는 구멍이다. 흐린 눈으로 잔고만 보며 발을 동동 굴리던 때와 달리, 최소한 어디에서부터 지출을 줄여야겠다는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제 예산을 재정비하고 실행에 옮길 때다. “예산을 수립할 때는 생활비 총액만 정하기보다는, 가계부의 카테고리별로 편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난 6개월의 지출 분석 자료를 토대로 월평균을 내보세요. 거기에서 5~10% 삭감한 정도로 목표 예산을 잡습니다. 처음부터 무리해서 예산을 축소하면 높은 확률로 예산을 초과하기 마련이고 그럼 그때부터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더 써버릴 수도 있거든요.” 작가 민선이 전하는 예산 정하기 팁이다.

바윗돌 깨뜨려 모래알

마지막으로 누수 지출을 막을 전략을 얼추 세웠다면, 보다 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계획을 도울 환경을 조성해보자. 바로 통장 쪼개기다. 습관적으로 자신의 소비를 돌아보며 내역을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처음부터 새어나갈 구멍 자체를 최소한으로 만드는 것이 효율적이다. 큰 통장 하나만 사용할 때는 지출이 전부 섞여 있어 정확한 누수 지점을 찾기가 어렵다. 기본적으로 급여통장, 생활비통장, 비상비통장으로 나누고 필요에 따라 하나 더 추가해 운영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급여통장에는 고정적으로 지출되는 금액만 남기고 생활비통장에 예산만큼의 돈을 옮긴다. 비상비 통장은 소득의 5~10%를 추천하는데 단, 병원비나 경조사 등과 같이 비상시에 대한 기준을 정확히 정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보상을 위한 충동구매용 통장이 되기 십상이다. 여기에서 남는 금액은 자유 입출금 방식의 적금을 들어 저축하면 빈틈없이 자산을 관리할 수 있는 3통장 체계가 완성된다. 3통장이 효과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무조건 체크카드를 사용해야 한다. 정해진 예산을 초과한다면 생활비통장은 가차없이 ‘잔고 부족’의 경고를 보낼 테니 말이다. 나는 약간의 타협을 거쳐 4통장 체제에 정착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충동적 누수 소비를 일삼았던 스스로의 경향을 알기에, 생활비 예산은 15% 삭감하되 소득의 5% 한도 내에서 욕망소비 통장을 하나 더 만들 생각이다. 충동을 조절할 수 없다면 충동의 한도를 정해놓는 것이다. 통장 하나를 개설하는 데 한 달이 소요되니 욕망소비 통장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무소유의 30일을 보내고자 한다. 부디 평화롭기를.

에디터
정지원
포토그래퍼
GETTYIMAGESKOREA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