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히티에서 온 편지

여행 작가 손미나와 사진가 권영호가 신비로운 섬을 찾아 떠났다. 화가 고갱이 사랑하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먼 길을 떠나는 그곳. 진한 티아레 꽃향기를 닮은 타히티에서 보내온 편지.

1 타히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래톱으로 생성된 작은 무인도. 2 요트에서 시간을 보내는 손미나. 3 에어 타히티 누이의 작은 비행기와 승무원. 4, 5 공항에 도착한 여행자를 위해 환영의 춤 타무레와 파오티를 추는 터히션. 6 하늘에서 내려다본 모레아 섬.

17세기, 타히티를 처음 발견한 유럽인들은 이곳을 ‘천상의 낙원’, 또는 ‘비너스의 섬’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후로 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파라다이스’라 불릴 만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우리에게는 프랑스의 후기 인상파 화가 고갱이 머무른 곳 정도로 알려진 섬, 그러나 쉽게 떠날 엄두는 나지 않는 섬나라인 이곳은 흔히 ‘타히티(Tahiti)’라 불리는데, 정확한 국가명은 프렌치 폴리네시아(French Polynesia)이고 총 118개 섬으로 이루어진 이 군도에서 가장 큰 섬이 바로 타히티다. 수세기가 지나도록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완전히 잃지 않은 신비로운 모습의 타히티. 독특한 지형 조건과 환상적인 산호 등으로 이루어진 이 나라의 100여 개 섬은 거대한 바다 세상을 아우르며 흩어져 있다. 그 섬들은 소사이어티 군도, 오스트럴 군도, 말퀴세스 군도, 투아모투 군도 등 5개 군도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타히티나 보라보라 등의 섬들은 모두 소사이어티 군도에 속해 있다. 프렌치 폴리네시아가 영원히 베일에 가려진 곳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왠지 지구상에서도 가장 먼 어딘가에 위치해 있을 것만 같은 낯선 느낌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타히티까지의 여정은 그리 부담스럽지 않았다. 일본 도쿄를 거쳐 단 한 번 비행기를 갈아타고 11시간 하늘을 날면 타히티의 수도 파페에테(Papeete)에 도착한다. 도쿄 나리타 공항에서 타히티까지 우리를 데려다준 것은 바로 타히티 국적의 항공사 에어 타히티 누이(Air Tahiti Nui)였는데, 열대의 섬으로 출발하기도 전에 이미 그곳의 향기를 가득 품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 알록달록한 꽃무늬 유니폼, 한쪽 귀에 커다란 꽃을 꽂고 함박웃음을 짓는 승무원들은 고갱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타히티의 여인들처럼 고혹적이었다. 비행기의 좌석과 쿠션, 담요, 안대까지도 타히티의 눈부신 바다를 상징하듯 짙은 푸른색이 주를 이루고 좌석 위에 얌전히 놓인 물품들 사이에는 작은 티아레 꽃이 한 송이씩 꽂혀 있었다. 그 꽃을 머리에 꽂고 타히티에 대한 온갖 무지개를 그리는 사이, 우리 일행을 태운 비행기는 그토록 상상해마지 않던, 지상 최후의 낙원이라는 타히티에 다다랐다.

이번 여행은 예술에 종사하는 몇몇 지인이 휴식도 취하고 영감도 얻을 겸 떠난 것이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얻어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곳을 미리 다녀온 여행 고수들의 입을 통해서도 “제대로 묘사할 적절한 표현이 없다. 세상 그 어떤 섬들과도 ‘다르다’라는 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말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다다. 그러나 타히티는 비행기가 착륙을 시도하는 순간부터 기막힌 프로그램을 이용해 포토샵을 한 듯한 빛깔의 하늘과 바다색으로 우리 모두의 넋을 빼놓았다. 첫 모습만으로도 우리 모두는 느꼈던 것 같다. 타히티는 단순히 영감을 받는 곳이 아니라 일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이하고도 남을 만한 충격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많고 많은 섬을 보고, 온갖 바다의 모습을 다 만났지만, 그토록 짙고도 선명한, 내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비현실적이고 오묘한 색을 띤 하늘과 바다는 처음이었다. 그 사이로 황금색 폭포처럼 쏟아지는 햇살이 우리를 반겨주었고 공항 청사에 들어서자 맨발의 터히션(Tahitian)들이 원주민의 혼이 담긴 춤을 추었다. 1분에 200번 이상 엉덩이를 흔들어댄다는 ‘타무레’를 추는 여인들, 흡사 마오리 전사들을 보는 듯한 건장함으로 무장된 ‘파오티’를 추는 남자들, 그들이 흔들어대는 붉은색의 탐스러운 술과 현란한 깃털 장식들 사이로 뜨거운 열대의 기운이 흘러나와 심장을 두드려댔다. ‘드디어 왔구나, 타히티에….’ 여행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1, 4, 5 일요일을 맞아 교회를 찾은 타히티 사람들. 꽃목걸이와 꽃으로 장식한 모자 등으로 한껏 멋을 냈다. 2 타히티에서 문신은 전통과 정체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의식이다. 3 다양한 해양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타히티의 바다. 6 타히티의 특산물인 바닐라빈. 태양 아래 건조시키는 바닐라빈의 향기를 어디서든 맡을 수 있다. 7 타히티의 바다와 조개가 함께 길러내는 또 다른 특산물 흑진주. 8 르 타하아 아일랜드 리조트&스파의 워터 빌라 위로 석양이 진다.

온통 꽃의 섬
“이아 오라 나(Ia Ora Na~).”

타히티의 인사다. 한창 춤을 구경하고 있을 때 이름 모를 타히티 여인이 다가와 하얀 티아레 꽃으로 만든 목걸이를 걸어주며 인사를 건넸다. 타히티에서는 누군가를 만날 때 반갑다는 표시로 꽃목걸이를 건네고, 이별을 앞두고는 추억을 잊지 말라는 의미로 조개나 소라로 만든 목걸이를 선물한다. 타히티의 국화이기도 한 티아레는 예쁘기도 하지만 햇살을 잔뜩 머금은 독특한 향기를 지녔다. 사랑의 언어를 대변하는 중요한 매개체이기도 한 티아레를 빼고는 타히티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기 힘들 것이다. 노래처럼 멜로디를 지닌 타히티의 언어, 남태평양의 파도처럼 멀리 퍼져나가는 타히티 여인의 미소와 티아레 향기가 어찌나 마음을 흔들어대는지, 파페에테 공항에서 다시 한 번 비행기를 타고 첫 목적지인 타하아(Tahaa) 섬으로 가는 내내 꽃목걸이를 소중히 떠받들었지만 얼마 후 타히티에서는 흔하디흔한 것이 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타하아 섬에 도착해 숙소인 워터 방갈로의 문을 여는 순간 나도 모르게 터져나온 감탄사. 방은 온통 꽃으로 뒤덮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침대 위에도, 테이블 위에도, 세면대와 욕조, 심지어 화장실 변기 위까지 수많은 꽃이 놓여 있었다. 나는 곧 코를 찌를 듯한 강렬한 꽃향기에 기분 좋게 취해버렸다. 꽃으로 뒤덮인 침대 밑으로는 투명한 바닥을 통해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모습이 보이고 발코니를 향해 몸을 던지면 곧바로 입수 가능! 형언하기 어려운 빛깔의 바닷물이 서서히 석양에 물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앉아 있었다. 이곳이야말로 천국이 아니고 무엇일까.

해안선의 모양이 히비스커스 꽃잎을 닮은 섬. 터키시 블루와 코발트 블루가 미묘하게 뒤섞인 그곳의 바다. 사방천지 햇살 아래 널어놓은 바닐라 열매 때문에 은은한 바닐라 향이 곳곳에서 감돈다. 마오리족이 일찍이 영혼의 고향 ‘하바이’라고 믿었다는 라이아테아 섬을 거쳐 배를 타고 한참을 가서야 만날 수 있는, 그야말로 현실과 한 걸음 떨어진 느낌을 주는 별천지, 타하아. 누군가 그 섬을 본 첫인상을 내게 묻는다면 아마도 이렇게 답했으리라. “너무 아름다워서, 이토록 지독히 아름다운 것이 눈앞에 있는데 영원히 볼 수 없는 잔인한 현실에 오히려 슬퍼지는 기분. 도착하는 순간부터 이 절경을 뒤로하고 본래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두렵게 만드는 절대적인 아름다움…. 아, 어쩌면 좋지?”

타히티의 섬들에서는 타하아뿐 아니라 어디에서든, 새벽녘 잠결에 들려오는 오묘한 노랫소리에 잠이 깬다. 언뜻 들으면 노랗고 붉은 부리의 새들이 재잘대는 소리로 느껴지지만 사실 새들은 타히티의 여인들과 함께 노래하며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고갱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연상케 하는, 다소 굵은 허리와 시원한 웃음, 묘한 눈빛과 초콜릿빛 피부, 어깨 아래로 칠흑 같은 머리카락을 길게 땋아 내린 타히티 여인들은 해가 떠오를 무렵이면 맨발로 섬을 돌아다니며 꽃을 따 모은다. 한쪽 옆구리에 바구니를 끼고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온갖 향기로운 꽃을 딴 다음에는 그 꽃으로 목걸이와 화관을 일 삼아 만든다. 그리고 가장 아름답고 싱싱한 꽃 한 송이를 한쪽 귀에 꽂고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이들은 티아레 한 송이로 말을 건넬 줄도 안다. 왼쪽 귀에 티아레를 꽂은 여인은 ‘난 지금 누군가와 달콤한 사랑에 빠져 있어요’라고, 오른쪽 귀에 티레를 꽂은 여인은 ‘난 지금 특별한 누군가를 찾고 있어요’라고.

낙원의 사람들
타히티 여성들이 조개에서 방금 꺼내놓은 흑진주처럼 신비로운 매력을 지녔다면 타히티의 남성들은 정글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야성미가 철철 넘친다. 건장한 근육질 체구, 초콜릿빛 피부, 짙은 눈썹과 다부진 턱. 웬만한 타국의 남자가 옆에 서면 모두 비실비실한 어린아이처럼 보일 정도로 그들이 지닌 카리스마와 남성미는 강렬하게 느껴진다. 그에 한몫하는 타히티의 오랜 전통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문신이다.

‘타투(Tattoo)’라는 영어 단어의 어원 자체가 타히티어인 ‘타타우(Tatau)’에서 왔다. 타타우란 폴리네시아 언어로 두드리거나 때리는 것을 의미하는 어근 타(Ta)에서 온 것이라는데 아마도 동물의 뼈 등에 염료를 찍어 피부를 콕콕 찔렀던 것에서 유래된 말이지 싶다. 타히티에서, 특히 고대 타히티에서의 문신은 단순한 기호나 몸에 문양을 새겨 넣는 행위와는 거리가 멀다.

과거 타히티인들에게 문신은 각 부족의 특징과 정체성을 표현하는 의식이었고 사회적 신분의 증명과도 같았다. 또한 부와 힘의 상징, 그리고 고통을 참아내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명예 같은 것이기도 했다. 타히티에서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의 몸에서도 문신을 흔히 발견할 수 있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여자들에게 있어 문신은 용맹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 소녀가 드디어 성인 여성으로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희한하게도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이유 있는’ 전통이어서인지 타히티 여자들의 몸에 새겨진 문신에서는 왠지 모를 경외감과 우아함마저 느껴진다. 아무튼 이러한 세기를 거스르는 전통은 지금까지도 계속 유지되고 있어서 타히티에서는 여전히 몸의 일부를 문신으로 장식한 사람들을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 처음엔 좀 놀라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고 나면 그 문양들을 해석하는 것이 재미있어진다. 티키상은 ‘보호’의 의미를, 거북이는 ‘왕성한 생식력’을, 돌고래는 ‘지혜’를 상징한다는 것 등을 알고 난 후 누군가의 몸에서 그 문신을 발견한다고 상상해보라!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이야기들을 몸에 새겨 넣기도 하고, 자기 가족을 상징하는 문양, 누군가에 대한 약속과 맹세, 사랑하는 이의 이름, 희망하는 일들, 좋아하는 동물까지도 몸에 그림으로 지니기를 원하기 때문에 문신만 잘 살펴보아도 그 사람의 취향은 물론이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그들의 문신은 어떤 것을 설명하고 기억한다기보다 그들의 삶 자체인 것이다.

타히티, 타하아, 보라보라…. 프렌치 폴리네시아에서의 꿈같은 시간은 단지 고갱이 머무른 섬으로만 알려진 곳의 숨은 얼굴들을 하나씩 발견하는 기쁨으로 가득 차고도 넘쳤다.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경비행기 아래로 펼쳐진 그림 같은 풍경, 신비로운 바다와 태양을 마주하고 맞이한 아침, 아름다운 여인들의 콧노래와 티아레 향기, 타투로 장식된 근육질의 몸으로 바나나를 나르고 뱃일을 하는 타히티의 남자들, 인적 없는 작은 섬 모투에서의 프라이빗 런치와 바닷속에서 코코넛을 갈라 마신 기막힌 추억, 배 타고 돌아온 애인을 기다리는 푸른 눈과 검은 긴 머리 소녀의 사랑을 노래하며 우쿨렐레를 연주하던 섬 청년들, 폭포처럼 쏟아질 듯 밤하늘을 가득 메운 무수한 별들, 시간도 공간도 아득하게 세상과 분리된 듯 완벽한 평화를 선사해준 매 순간들과 심장의 두근거림. 떠나지 않는 자에게 여행이란 성가시고 소비적인 행위에 불과하지만 길 위에 나서본 이들은 안다. 여행이야말로 우리에게 새로운 우주를 열어주는 여정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우주를 통해 우리는 때로 삶의 진리를 발견하고,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이하며, 사소한 일상에 감사하게 된다. 타히티라는 우주를 발견하고 돌아온 서울에서 나는 어느새 천천히 가는 삶, 버리고 비우는 철학을 실천하기 위해 주변을 정리하고 있다. 이번 여행이 내게 준 값진 선물이다. 아마도 오래도록 나의 삶에 여운을 남길 것이다.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티아레의 향기처럼.

HOTEL
르 타하아 아일랜드 리조트&스파(Le Tahaa Island Resort & Spa – Relais & Chateaux) 흑진주 양식과 무성한 바닐라 농장으로 유명한 타하아 섬에서 배를 타고 5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르 타하아 아일랜드 리조트&스파는 아름다운 작은 섬에 위치해 있다. 2002년 7월 오픈했으며 2012년 1월에는 여행지 <콘데나스트 트래블러> 선정 최고 숙박시설 리스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힐튼 보라보라 누이 리조트&스파(Hilton Bora Bora Nui Resort & Spa) 보라보라 남서부의 작은 섬인 모투 투프아에 위치해 있으며, 공항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럭셔리 리조트다. 프렌치 폴리네시아 리조트 중에서 가장 넓고 긴 백사장(약 800m)을 가지고 있으며 감탄을 자아내는 라군을 조망할 수 있다.
인터컨티넨탈 모레아 리조트&스파 (InterContinental Moorea Resort & Spa) 테마에 공항에서 24.5km, 바이아레 항구에서 약 30km 떨어져 있는 열대 정원에 둘러싸인 모레아 리조트는 특히 165종의 나무와 꽃으로 가득한 정원이 아름답다. 잘 정돈된 144개의 룸과 방갈로 및 스윔업 바를 구비하고 있으며 현지 음식과 세계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손미나
    Photogrpahy
    Kwon Young 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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