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벌 차림에 대하여
‘한 벌로 빼입는다’는 말이 부끄럽던 때가 있었다. 그건 마치 ‘저는 옷을 입을 줄 모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시즌, 한 벌 차림은 나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가장 확실한 옷 입기가 되었다.
봄이면 돌아오는 꽃무늬, 에너제틱한 네온 컬러 등 2013년 봄/여름 시즌의 런웨이는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단어들로 트렌드 리스트를 채워나갔다. 그런데 그런 중에 의외의 키워드가 하나 있다. 바로‘한 벌 차림’이다. 어린 시절 엄마가 입학식, 명절 등 좋은 날에만 곱게입혀주던 꼬까옷이 생각나기도 하고, 면접 때 입은 펜슬 스커트 투피스가 떠올라 왠지 세련된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그 옷차림이 런웨이에서는 화려한 색상을 입은 ‘원 컬러(One-colored) 룩’, 매력적인 프린트로 무장한 ‘올 오버 프린트(All-over Print)룩’으로 거듭나며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이번 시즌 런웨이를 보자면, 매뉴얼대로 입는 게 그리 촌스러운 일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트렌드와 상관없이 한 벌 입기를 꾸준히 실천해온 브랜드는 단연 샤넬이다. 하우스의 대표적인 아이템인 트위드 스리피스 슈트(Three-piece Suit)는 토털 룩으로 입었을 때 가장 예쁘기 때문에 아무리 해체주의와 스트리트 룩이 유행해도 소재와 색상만 바뀔 뿐 꾸준히 한 벌로 선보여왔다. 이번 시즌도 마찬가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기존의 스리피스가 투피스로 바뀌었다는 것, 그리고 트위드 대신 니트나 신소재를 사용해 일렉트릭 블루, 레드, 체크무늬 등 트렌디한 컬러와 패턴으로 선보인다는 것이다. 다른 브랜드에서도 한 벌 입기를 제안했다. 발렌시아가는 파스텔 톤 색상의 팬츠 슈트, 재킷과 미니스커트로 이루어진 트위드 투피스 슈트를 선보이는 대신, 이너웨어로 배꼽이 드러나는 짧은 상의를 매치해 한 벌 차림이 주는 나이 든 느낌을 피해갔다. 엘리 사브에서는 셔츠와 팬츠, 스커트는 물론, 신발과 가방 등 액세서리까지 모두 같은 색으로 통일하는 완벽한 모노크로매틱 (Monochromatic) 룩을 선보였다. 드라마틱한 스타일링이지만 셔츠 단추를 푼다든가, 짧은 스커트를 매치해서 맨살을 적당히 노출하면 충분히 시도해볼 만하다.
발맹과 카르벵에서는 프린트를 적용한 팬츠 슈트를 제안했는데, 할리퀸을 연상시키는 발맹의 기하학 프린트는 1980년대를 휩쓴 멤피스(Memphis) 룩을 연상시키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반면 카르벵의 서정적인 프린트는 어떤 상의를 받쳐 입느냐에 따라 캐주얼부터 포멀한 스타일까지 고루 소화할 수 있다. 또 루이 비통과 프라다에서 등장한 앙상블 룩은 1960년대 숙녀들의 스커트 슈트에서 영감을 받았다. 상·하의에 연관성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세트로 입었을 때 세련된 느낌을 주는 게 특징이다. 같은 한 벌 차림이라도 영감과 분위기는 천차만별인데, 이렇게 매력적인 ‘한 벌’을 두고 우리는 왜 지금까지 한 벌 입기를 거부해왔을까?
시대에 따른 개성 표현의 차이
지난 20년간 우리는 개인의 특성과 현실에 맞게 옷차림을 조율하는 시대를 살았다. X세대로 대변되던 1990년대의 모토는 ‘난 나야’였고, 스트리트 스타일이 급부상한 2000년대는 리얼웨이, 곧 리얼리티의 가치가 존중받았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한 벌이 아닌 다양한 옷을 섞어 입는 건 개개인의 표현력과 미적 감각, 그리고 진취성을 살펴볼 수 있는 바로미터와도 같았다. 나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했고, 같은 옷을 입은 사람과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고가와 저가 브랜드를 섞어 입었고, 최신 유행 룩에 빈티지 아이템을 매치하며 누가 봐도 ‘따로 구입해서 내 개성대로 연출한 룩’을 추구했던 것이다. 수지 버블(Susie Bubble)이나 브라이언 보이(Bryan Boy)같은 ‘셀프메이드(Self-made) 패셔니스타’도 그렇게 탄생했다. 거침없는 표현력과 창의력, 정보력으로 무장한 이들은 블로그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채널을 통해 자신을 알렸고, 독창적인 옷 입기로 네티즌을 사로잡았다.
그들이 패션을 사랑하는 평범한 블로거에서 파리 컬렉션의 프런트 로에 앉는 셀러브리티로 거듭나는 건 시간 문제였다. 패스트 패션의 등장도 이 현상에 기여했다. 개성 넘치는 옷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는 SPA 브랜드들은 누구나 직접 자신만의 스타일리스트가 되어 마음에 드는 옷을 부담 없이 수집할 수 있게 했고, 우리는 마치 부속품을 갈아 끼우듯 마음대로 아이템을 바꿔 옷차림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다 패셔니스타가 될 수 있는 시대였다.
반면 SPA 브랜드의 등장으로 인해 인스턴트화된 패션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로 하여금 한 벌로 입는 옷을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소모적인 패션과 트렌드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다른 성격의 옷을 섞어 입는 행위는 더 이상 개성적이라고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 아무렇게나 입을 수 있는 조악한 품질의 옷보다 한 가지 무드를 위해 정성스레 만든 옷을 입는 것이 패션계의 새로운 럭셔리로 떠올랐다. 한때 존 갈리아노 같이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디자이너들이 다양한 아이템으로 구성된, 스타일링에 중점을 둔 컬렉션을 선보였다면, 요즘 디자이너들은 좀 더 단순해진 주제 안에서 옷차림 하나하나의 완성도와 임팩트에 집중하는 컬렉션을 내놓고 있다. 한 벌 차림도 그런 맥락에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한 벌로 차려입는다는 것은 곧 하나의 태도를 선택하는 것을 뜻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의 무드, 하나의 컬러 혹은 하나의 프린트로 통일하겠다는 것만큼 강렬한 패션 메시지가 또 있을까?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한 가지 스타일을 뚝심 있게 고집하는 것은 시대가 변하면서 나타난 새로운 방식의 개성 표출이다. 옷을 입을 줄 몰라서 주어지는 대로 입는 것이 아니라 한 벌로 옷을 맞춰 입음으로써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태도와 무드를 완성도 있게 연출하는 것이다. 패션 쇼장에 나타날 때마다 코스프레에 가까울 정도의 토털 룩을 선보이는 안나 델로 루소(Anna Dello Russo)나 샤넬, 지암바티스타 발리와 디올 등 쿠튀르 하우스의 룩을 완벽한 한 벌 차림으로 추구하는 다이앤 크루거(Diane Kruger) 같은 셀러브리티가 유독 주목을 받는 이유 또한 옷차림의 완성도에 깃든 그녀들의 강력한 패션 메시지가 우리에게 와 닿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위치가 확고한 알파 걸일수록 옷을 더 잘 차려입을 필요가 있기에, 한 벌을 입는다는 건 디자이너와 입는 사람의 의도가 고스란히 담긴 완성도 높은 옷차림을 연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완성도와 조화로 만드는 한 벌 차림
한 벌 차림을 추구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실제로 한 벌의 옷을 구입하는 것보다 옷차림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다. 한 벌이 아닌 옷으로도 얼마든지 완벽한 조화의 옷차림을 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만 신경 쓰자. 먼저 상의와 하의의 색을 통일하는 원 컬러 룩은 화려한 원색을 선택할수록 트렌디하다. 로열 블루, 새먼 핑크 등 현재의 색상 트렌드에 촉각을 세우자. 액세서리까지 같은 색으로 통일해도 좋다. 하지만 과감한 색상을 소화할 자신이 없다면 올 화이트 룩, 혹은 올 블랙 룩부터 시도해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가지 패턴으로 통일하는 원 패턴 룩은 키가 작거나 통통한 체격을 가진 사람에게 매우 유리한 옷차림이다. 시선을 분산시키기 때문이다. 반면, 지나치게 산만한 옷차림을 피하기 위해 존재감은 확실하되 디자인이 최대한 간결한 액세서리를 고르자. 패턴의 크기가 잔잔한 옷일수록 리얼웨이에서의 활용지수가 올라간다.
특별한 패턴이나 눈에 띄는 컬러 없이 단지 소재와 디테일만으로 한 벌을 이루는 앙상블 아이템은 자칫 나이 들어 보일 수 있다는 함정이 있다. 이럴 때는 그 옷이 전달하고자 하는 무드를 파악해 그에 맞는 액세서리를 매치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네이비 블루 컬러의 트위드 투피스 슈트가 있다면 편안한 줄무늬 티셔츠와 에스파드리유 샌들, 캔버스 천으로 만든 가방을 매치해 마린 룩을 연출하는 식이다. 다소 평범해 보이는 옷이라면 나름의 캐릭터를 부여하고 그에 맞는 액세서리로 스타일링하는 것이 옷 차림의 밋밋함을 보완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한 벌 차림은 결코 옷 입을 줄 모르는 사람들의 종착역이 아니다. 패션의 원래 목적인 ‘차려입다(Dress up)’라는 개념으로의 회귀이자옷을 누구보다 잘 입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천군만마보다 든든한 스타일링 전략이다.
- 에디터
- 박정하
- 포토그래퍼
- KIM WESTON ARNO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