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 가까이
두 에디터가 안성의 유기견 보호소와 노원구의 다운복지관으로 봉사 활동을 다녀왔다. 버려진 강아지와 고양이, 지적 장애인과 함께했던 조금은 특별했던 하루의 시간을 담았다.
언젠가 우리의 반려견
설레기도 했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잠을 설치고 아침 일찍 나섰건만 안성 평강공주보호소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꽤 길었다. 한 시간 반 가까이 쉬지 않고 달리다, 가까이에서 어마어마한 ‘짓는 소리’가 들려와 무의식적으로 차를 세웠다. 조심스럽게 대문 앞으로 다가서자 서너 마리의 강아지가 벌써 낯선 사람의 냄새를 맡고 몰려들었다. 마침 근처에 있는 한 봉사자가 문을 열어주어 안으로 들어섰다. 보호소를 둘러보기도 전에 내 무릎과 허리에 앞다리를 올리며 반가운 내색을 하는 아이들과 먼저 인사를 나누었다. “아, 네가 ‘웰시’고, 네가 ‘쫑교’구나.” 목에 이름표를 걸고 있는 것도 아닌데 아이들의 이름을 금방 알아낸 건 이곳에 오기 전, 평강보호소 홈페이지를 들락날락하며 그 얼굴을 익힌 덕분이었다. 준비한 작업복을 가져와 갈아입고 운동화 대신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었다. 조금 있으니 김자영 소장과 미리 도착한 봉사자들이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그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음료를 나눠 마신 후에 커다란 컨테이너 안에 있는 견사로 이동했다. 소장은 양동이와 쓰레받기, 빗자루를 쥐어주며 오늘 하루 내가 해야 할 일을 설명했다. “견사 안에 있는 문으로 이동하면서 양동이에 배설물을 담고, 밥과 물이 부족하지 않은지 챙겨주면 돼요. 물은 호스에서 받아 담으면 되고 사료 통은 안쪽에 있어요. 가끔씩 애들이 잡은 쥐나 벌레가 보여도 놀라지 마세요. 배설물 외에 다른 쓰레기는 양동이에 담지 말고 따로 모아서 버리면 돼요.”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씩씩하게 했지만 생각보다 엄청난 견사의 규모와 그 안에 있는,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 많은 강아지와, 엄청난 배설물의 냄새를 맡으며 ‘결코 만만치 않은 시간이 될 것’임을 예상했다. 조심스럽게 첫 번째 견사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귀는 잘려 있고, 눈은 빨갛게 충혈된 시루가 옆으로 다가와 애교를 부렸다. 어떤 연유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귀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고 눈은 또 왜 이렇게 아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이 덜컹거렸지만 감상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당장은 이 아이의 배설물을 치워주고 밥을 챙겨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작은 견사 안에 두세 마리의 강아지가 함께 지내고 있었고, 몸이 좋지 않거나 무리와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들은 간혹 독방을 쓰기도 했는데, 희한한 건 견사 안에 들어가기 전에는 사납게 짖어대다가도 안으로 들어서면 가까이 다가와 애교를 부린다는 거였다. 가끔은 혹시나 자신의 주인이 아닌지 여기저기 살펴보는 것 같은 아이들도 있었고, 상처 때문인지 잔뜩 겁을 먹고는 견사 가장자리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늦지 않게 맡은 구역의 청소를 끝내야 해서 만나는 강아지마다 안아주고 쓰다듬어 줄 수는 없었지만 앞에 씌어 있는 그들의 이름을 보고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다. 그런데 두 시간 정도 지나고 작업에 속도가 붙을 때쯤,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아 청소를 하고 있던 견사 안의 강아지 한 마리가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강아지는 복도를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복도 사이를 왕복하며 뭔가에 홀린 것처럼 무섭게 뛰어다녔다. 그 모습에 자극을 받은 강아지들이 흥분해서 짖기 시작했고, 한순간에 패닉 상태가 되었다. 어찌해야 하나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다행히 다른 봉사자들이 복도로 나와 집 나간 강아지를 한 방향으로 몰아주었다. 금세 안정을 되찾은 강아지는 큰 반항 없이 견사안으로 들어갔다. 원인 모를 질주가 멈추자 다른 아이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평정심을 되찾았다. 보호소 밖이 바로 큰 도로와 이어져 있기 때문에 행여라도 강아지가 보호소를 나가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때문에 문 단속은 특히 강조하는 항목인데 그만 놓쳐버리고 말았으니 초보자 티 한번 제대로 낸 거다. 청소를 끝내고 다시 바닥에 톱밥을 뿌려준 후에야 비로소 오늘의 임무가 끝났고, 그제서야 보호소를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유난히 나를 따르는 웰시와 함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고양이들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 쪼그리고 앉으니 사람의 손이 그리웠는지 다가와 얼굴을 비비며 아는 척을 한다. 이마와 배를 만져주니 금방 골골 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캣타워와 바닥을 청소하고 마당으로 가니 작업을 마친 다른 봉사자들도 모여 쉬고 있었다. 금요일마다 이곳으로 봉사를 하러 온다는 한 봉사자는 5년 전 유기견을 입양해 키우게 되면서부터 꾸준하게 보호소를 찾고 있다고 했다. 나 역시 몇 년 전부터 강아지를 키워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동네 애견숍을 수도 없이 찾았지만 예쁘게 미용을 하고 쇼윈도에 진열된 아이들을 볼 때마다“ 사지 마세요. 입양하세요”라는 문구가 머릿속에 맴돌았던 게 사실이다. 반드시 반려견을 찾겠다는 다짐으로 보호소를 찾은 건 아니었지만 언젠가 반려견과 함께하게 된다면 분명 이 아이들 중에 하나일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한쪽의 작은 컨테이너에서 김자영 소장이 젖은 이불을 들고 나왔다. 그곳은 그녀의 생활 공간이자 아프고 나이 든 아이들을 보살피는 공간이기도 하다. 밥을 먹이고 청소하는 일부터 시작해 아픈 아이들을 병원에 데려가고 때로는 새 생명을 받아내거나 생명이 다한 아이를 떠나보내는 일까지, 그녀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은 끝도 없었다. 누군가는 버리고 누군가는 거두는 일. 누구도 그들에게 버릴 수 있는 권한을 준 적이 없고 누구도 그녀에게 거두어 키우라는 책임을 준 적이 없는데, 그 결과만이 실재하는 그 곳에서 하루를 보내는 동안 뿌듯함보다는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컸다. 행동이 아닌 말은 아무 소용이 없어 보였다. 자주 오겠다는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건네고 오늘의 일을 누군가에게 나누자 하기에 한 번의 경험은 너무 짧았다. 웰시는 보호소 대문을 나서는 나를 가장 마지막까지 배웅했다. 웰시의 뒤뚱거리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 오는 것으로 첫날은 충분했다.
어느 비장애인의 하루
대부분의 비장애인이 그러하듯, 나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다. 내가 그들을 가까이에서 만났던 경험은 중학교 1학년 때 다녀온 ‘지적 장애인을 위한 캠프’가 유일할 정도다. 15살 미만의 지적 장애인들과 함께 보낸 2박 3일의 캠프 기간 동안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건 아이들이 생각보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훨씬 더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었다. 화장실에 가는 것부터 옷 입는 것, 숟가락질, 산책 등 모든 과정 동안 보호자는 그들에게 눈을 뗄 수가 없었고, 기분에 따라 소리를 지르거나 울기라도 하면 달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괴로웠다. 나야 캠프가 끝나면 그만이지만 저들을 계속 돌봐야 하는 가족들은? 부모나 가족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나이를 먹고 이 아이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생활하게 될까? 그 이후 장애인, 특히 지적 장애인에 관한 문제나 뉴스를 대할 때 마다 난 그냥 눈을 돌렸다. 불편했다. ‘함께 사는 사회’,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같은 말이 세상에서 가장 공허하게 들렸다. 캠프가 끝난 후, 내가 사는 비장애인의 세상에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다운복지관을 찾은 것은 10년 넘는 시간 동안 내 안에서 자라난, 지적 장애인을 향한 비뚤어진 시선을 깨뜨리고 싶어서였다. 2003년에 문을 연 다운복지관은 다운증후군을 포함한 지적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다. 또래교실과 체육교실 등의 교육 프로그램과 함께 직업 훈련이 이루어지고, 장애인의 부모를 위한 모임과 가정 방문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지속적으로 재활을 돕고 장애인의 사회 적응을 지지하는 이른바 ‘평생 학교’다. 내가 오늘 참여할 프로그램의 이름은 바로 ‘토요예술학교’. 지난 4월에 처음으로 시작한 토요예술학교의 프로그램은 탭댄스와 판소리, 그리고 학생들이 직접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는 소울 포토(Soul Photo)까지, 총 세 가지 수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한민국 탭댄스협회의 전승호 회장과 전문 소리꾼인 한정이, 사진가 김문정이 각각의 수업을 진행한다. 진짜 프로들에게 수업을 맡겼다는 것이 학생들에 대한 굉장한 존중처럼 느껴졌다. 각각의 수업은 재활의 과정이기도 하다. 탭댄스를 추며 학생들은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고, 판소리는 발성과 발음 교정에 도움이 된다. 직접 사진을 찍는 소울 포토는 매우 주체적인 경험이다. 하지만 토요예술학교의 꿈은 그보다 더 크다.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꾸준히 연습해 공연을 완성하는 것이 최종 목표다. 공연을 하는 게 이들의 직업이 된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어떤 공연이 될지 내가 선뜻 그림을 그리지 못하자 토요예술학교를 담당하는 강기근 사회복지사가 설명을 곁들였다. “공연의 주제는 빛과 소리예요. 조명과 함께 사진작업물을 무대 배경처럼 띄우고 판소리와 탭댄스 공연을 중간중간에 가미하는 거죠. 일반인도 누군가는 춤을 잘 추고, 누구는 노래를 잘하는 것처럼 지적 장애인들도 성향과 능력이 다양하거든요. 잘하는 누군가는 독무나 독창을 할 수도 있겠죠. 다 똑같아요.” 물론 무대를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가늠할 수가 없다. 오늘 하루 내가 할 일은 일일 선생님이 되어 이들과 함께 춤을 추고, 판소리를 하고, 사진을 찍는 일이었다. 민망할 정도로 쉬운 일이었지만 강당에서 열 명 남짓의 학생들을 마주하는 순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몸을 휘감았다. 다운증후군은 보기 드문 장애가 아니고, 나는 다운증후군의 외모적 특징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모습이 낯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서로 고추를 걷어 차며 노는 남학생들, 그들의 자꾸 내려가는 바지를 보는 일은 민망했고 이제 좀 익숙해졌다싶으면 이번에는 아마도 가려워서 마구 긁는 바람에 생겼을 시뻘겋게 벗겨진 피부의 상처가 보여 눈을 질끈 감았다.
전환점은 수업의 시작과 함께 찾아왔다. 몸치인 나는 도무지 춤의 순서를 외울 수가 없었다. 학생들에게 동작을 가르치는 것이 내 임무이거늘, 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건 오히려 나였다. 잘 보이지 않는 무대 위의 선생님을 보려고 낑낑대던 나는 결국 내 앞에 선 학생을 따라 동작을 외우기 시작했다. 탭댄스 슈즈의 앞굽 부분을 정확하게 마룻바닥에 부딪치며 신이 나서 춤을 추는 그녀를 보며 덜컥, 내 오랜 관념 중 하나가 벗겨졌다. 이들의 삶이 마냥 의존적일 것이라는 오래된 생각 말이다. 근처의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던 길에는 이들이 횡단보도를 건널 줄도, 대중교통을 이용해 집에 갈 줄도 안다는 사실을 배웠다. 어떤 학생들은 글을 읽고 정확하게 판소리를 따라 했고, 핸드폰으로 MP3를 듣는 학생도 있었다. 복지관의 사람들과 학부모들이 바라보고 있는 가능성이 어떤 건지 희미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일반인과 차이는 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면 지적 장애인들도 충분히 나아질 수 있다는 사실, 그 사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사진 수업까지 모두 마칠 무렵, 나는 학생들의 이름을 거의 다 외웠다. 그동안 ‘지적 장애인’이라고 통틀어 칭한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외운 것은 첫 경험이었다. 수업 내내 활발했던 영주 씨는 얼마 전부터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내가 캠프에서 만난 아이들도 당시에는 어려서 ‘덜’ 학습된 것이었을 뿐 지금은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근사하게 춤을 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 검색창에 ‘다운증후군’을 쳐봤다. 다운증후군의 또 다른 이름은 ‘천사병’이라고 한다. 이들 대부분이 인내심이 강하고 애정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나를 비롯한 여자 선생님들에게 계속 “예뻐요” 하고 칭찬을 하던 미정 씨를 떠올리며 다시 스크롤을 내렸다. ‘다운증후군은 출생 후에 장기 이상이나 심장병, 정신박약 등의 증상을 가지고 있어서 일반인보다 수명이 짧은 편입니다.’ 오늘 만난 사람들 중에도 이렇게 몸이 불편한 사람이 있었을까? 수명이 짧다면 얼마나 짧은 거지?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끼며 검색창을 살피던 중 한 게시물이 눈에 띄었다. 다운증후군으로 판명 난 태아를 지우고 왔다는 글이었다. ‘태어나도 놀림받고 힘들 거예요’라고 달린 산모를 위로하는 댓글을 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난, 그리고 명백히 사랑받고 있는 기철, 종석, 지유 등 오늘 내가 만난 모두를 생각했다. 어릴 때의 짧은 경험으로 ‘그들의 삶은 이러할 것이다’라고 재단하고 모른 척 살아온 내가 지적 장애인을 놀리고 괴롭히는, 그래서 결국 부모로 하여금 낙태를 고려하게 만들기도 하는 사람들과 얼마나 다를까. 내가 사는 세계에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내가 그들의 삶에 대해 전혀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게 더 사실에 가까웠다. 무관심. 내가 그들을 볼 때 줄곧 불편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조금 더 뛰어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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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조소영, 피처 에디터 / 이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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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형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