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요원의 영화 이야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던 밤, 이요원은 붉은 입술로 비밀스럽게 말했다. 자신을 사랑한 남자와 자신을 쫓는 남자. 그리고 사소하게 시작된 듯했지만 이 영리한 여배우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헌신과 성숙을 요구했던 <용의자 X>에 대해서.
<용의자 X>는 의도치 않게 범죄를 저지른 한 여자와 그녀를 지키고 싶어서 완벽한 알리바이를 계획하는 수학자, 그리고 사건을 파헤치려는 형사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예리하게 그린 탁월한 미스터리 작품이죠. 책도 있고, 이미 일본에서 만들어진 영화도 있어요. 원래 이 작품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
시나리오를 보고 원작을 보게 되었어요. 그 전엔 몰랐죠. 일본 원작 영화에서는 남자 주인공만 보였어요. 아마 그 영화를 본 많은 사람이 그렇게 기억할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 영화에서는 여자 주인공이 좀 더 보여요. 원작이 수동적이라면 우리 영화에선 좀 더 능동적인 여자죠.
결말을 알고 있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함께 영화를 보러 간다면 어떨까요?
그래서 우리는 결말보다 어떻게 풀어내는지가 중요한 영화라고 말해요. 스포일러에 대한 마케팅도 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원작과 이번 영화가 어떻게 다를지, 모두 그게 제일 궁금할 거예요.
내용이 많이 달라요. 원작은 스릴러에 중점을 두고 있잖아요. 두 남자의 싸움이죠. 한쪽은 사건을 밝히려 하고, 한쪽은 발각되지 않으려 하고요. 반면 우리 영화는 왜 이 남자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줘요. 특히 제가 맡은 여자 캐릭터, ‘화선’이 많이 다르고요.
스릴러보다 멜로의 비중을 높였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하지만 화선도 그 남자의 사랑을 처음부터 느끼지 못해요. 그 전에는 왜 이 남자가 나를 도와줄까, 혼란스러워하죠. 설마 나를 좋아할 거라는 생각도 못하고요. 그래서 류승범 씨와는 계속 낯선 남자처럼 낯설게 촬영을 했고요. 조진웅 씨와는 그에게 내 비밀을 들키면 안되니까 또 긴장 모드 고요. 그래서 두 분 다 답답하게 촬영했어요.
수학자인 류승범과 형사 조진웅, 그 배우의 역할이 바뀌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한데요. 어때요?
책 속 이미지를 생각하면 좀 그렇죠? 하지만 류승범 씨가 역할에 정말 잘 어울렸어요. 제가 이 작품 제의를 받았을 때 류승범 씨 캐스팅은 정해진 상태였는데, 진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조진웅 선배도 워낙 연기를 잘하고, 우리 영화에서 유일하게 팔딱팔딱 뛰는 살아 있는 연기를 하죠.
당신은 그게 누구든 남자 배우와 늘 좋은 호흡을 보여주죠. 흔히‘케미스트리’라고 부르는 것. 비결이 있어요?
모르겠어요. 내가 여기저기 가져다 놓아도 잘 어울리나 봐요.
사실 관객에게는 그 ‘케미스트리’가 중요하거든요.
그게 생각보다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처음에 딱 봐서 둘이 진짜 안 어울린다 생각이 들면 아무리 둘이 사랑을 해도 이입이 안 되니까요. 저도 승범 씨랑 처음에는 되게 안 어울렸어요.
정말 그랬어요?
모니터로 봤는데 정말 안 어울리더라고요. 그런데 안 어울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 남자는 정말 자기랑 어울리지 않는 여자를 사랑하는 거예요. 천재 수학자가 호스티스 출신에 아이도 딸린 옆집 아줌마를 사랑하니까. 오히려 약간은 안 어울리는 듯한 게 괜찮겠다 싶었는데, 점점 촬영할수록 나름 괜찮아 보이더라고요. (스태프에게)나름 괜찮았지? 류승범 씨와 친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 연기도 낯설고, 실제로도 낯설고 그랬어요.
그 낯선 분위기가 연기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해요?
승범 씨는 멜로적인 요소가 조금만 들어가면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 같았어요. 본인이 막 어쩔 줄을 몰라서, 저한테 이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고요. 저는 또 막 터트리고 분출하는 연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승범 씨가 그걸 너무 잘하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 앞에서 하려니까 더 창피한 거예요.
음, 서로 전공이 바뀐 셈이군요!
그랬던 거죠. 승범 씨는 또 그런 장면이‘ 하나도’ 없거든요. 늘 냉철하고 담담한 역할이니까 그 앞에서 제가 막 날뛰는 연기를 하려니까 창피했어요. 게다가 오빠면 좀 편했을 텐데 나이도 딱 동갑이고요. 그래서 더 의지하고 대화 많이 하면서 호흡을 맞춘 것 같아요.
목표가 명확한 두 남자 캐릭터와 달리 당신이 연기한 화선은 복잡한 인물이죠. 아주 무거운 죄를 짓지만 또 순수한 영혼이기도 해요. 어느 쪽에 무게를 두었어요?
음… 그냥 이 여자는 관객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여자에게 감정이입이 되어서 형사에게 안 들켰으면 좋겠다, 이 남자와 행복했으면 좋겠다라는 감정이 들었으면 해서 그렇게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연출은 맡은 방은진 감독은 여자 감독이면서 배우 출신 감독이기도하죠. 당신과 교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어요?
그렇죠. 많이 배웠어요. 원래 여자 감독님은 남자 감독님보다 더 디테일해요. 배우 출신이라는 점이 더 부담스러운 건 있었어요. 여배우 입장에서 많이 생각해주시고, 여배우가 돋보이게 해주세요. 그래서 어느 것 하나도 그냥 넘어가는 게 없었어요 한 번도.
어떤 점이 가장 부담스러웠어요?
제가 기존에 해왔던 연기가 아니라 좀 다른 길로 인도하시려고 했던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좀 많이 힘들었죠.
다른 길이라고 하면?
표현 방법이나 대사하는 거나 굉장히 디테일하게. 예를 들자면 ‘안녕하세요’라고 하면, 그걸 제가 말하는 방식이 있는데 자꾸 다르게 해보라고 하시는 거죠. ‘안녕…하세요’라거나 ‘안녕하세, 요’라거나. 제 목소리 톤이나 걸음걸이 같은 것도 전혀 다르게 요구하시는 거죠.
그렇게 반복하면서 연기하면 체력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훨씬 힘들었겠는데요?
우선 이게 안 되니까, 내 자신이 너무 답답한 거예요. 무슨 말인지는 알지만, 내 몸이 10년 넘게 연기한 걸 기억하고 있잖아요? 머리는 알겠는데 내 몸은 안 따라주고… 다르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어떤 사람은 똑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래도 결국엔 제가 하는 거니까.
그럼 그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했어요?
휴… 스트레스를 뭐 어떻게 풀 수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계속 안고 갔어요. 처음 이 작품이 왔을 때는 왜 나한테 주는지 알겠다 싶었어요. 그냥 제 이미지에 맞는 그런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남자들이 봤을 때 보호해주고 싶은 그런 인물이라든지요. 그런데 감독님은 이 역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거죠. 저도 쉽게 들어갔다가 완전히 힘들었고. 캐릭터 때문에도 힘들었고. 진짜 힘들게 촬영했던 것 같아요.
캐릭터는 어떻게 당신을 힘들게 하던가요?
화선과 저는 닮은 점이 없어요. 이 여자는 호스티스 출신이거든요. 과거를 깨끗이 버리고 조카와 서울에 올라와서 새 사람으로 살아가려 했는데. 전남편이 들이닥치면서 인생이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죠. 현실에서 본 적 없는 여자라 처음에는 공감할 수가 없어요. 호스티스 출신을 본 적도 없고, 사람을 죽여본 사람을 만난 적도 없고.
그 간극을 어떻게 메웠어요?
감독님만 믿고 따라갔죠. 감독님이 원하는 대로 하려고 노력했고, 그러면서 조금씩 현장에 적응했어요. 저는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타입이에요. 사람이랑 친해지는 데도 시간이 걸리고, 그 배역에 빠지는 데에도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에요. 그게 좀 단점인 것 같아요.
현장에서도요?
네. 저는 딱 가서 딱 한 번에 변신을 잘 못해요. 낯가림도 심하고요. 현장에 가면 다 모르는 사람인데, 그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도 싫고, 거기서도 내가 아닌 낯선 사람을 연기해야 하니까 그 과정은 시간이 지나야만 되더라고요.
의외예요. 모든 배우는 인터뷰할 때 다들 현장을 사랑하고, 서로 친하게 지냈다고 하니까요.
현장 분위기는 좋을 때는 좋고 예민할 때는 예민해요. 영화가 밝으면 밝고 유쾌하고, 영화가 예민하면 또 그런 분위기가 있고요. 영화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우리 영화는 내용도 어둡고 조명도 어둡고 뭔가 갇혀 있고 답답한 분위기니까요. 또 겨울에 촬영했고 밤 신도 많았어요.
팬들도 배우의 성향을 많이 따라간다고 하던데, 당신의 팬들도 조용한 타입이 많아요?
네! 오래된 팬들이 많고요, 가끔 새로운 작품 촬영을 시작할 때 단체로 오곤 하는데 사진을 찍으려고도 안 해요. 제가 같이 찍자고 해도 다 안 한다고 해요. 저처럼 다 시니컬하고 그렇죠.
스스로 시니컬하다고 생각해요?
저요? 좀 까칠하죠. 다정다감한 성격은 아니죠. 저는 친한 사람에게 딱딱 쏘아붙이고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게 친하다는 표현이에요.
작업이 힘들었다고 하니, 관객으로서는 더 기대가 되는군요. 이 작품은 배우 이요원에게 어떤 작품이 될까요? 아주 오랜만에 복귀하는 영화니까요. <화려한 휴가> 이후 겨우 두 번째 영화예요.
좀 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 됐으면 좋겠어요. 감독님도 원숙미를 원하셨던 것 같아요. 제게는 아직 그런 게 없어요. 감독님은 화선이라는 여자가, 대사 한마디를 해도 과거가 묻어 나오는 그런 연륜을 원했는 데 문제는 제가 그런 이미지가 아니니까.
타고난 이미지를 연기로 바꾸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방법을 찾았어요?
저 나름대로 계산하고, ‘이런 여자라고 해서 무조건 다 그렇게 원숙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나름대로 상상하면서 제 이미지와 좀 맞춰갔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좀 더 성숙해진 것 같아요.
<용의자 X>는 한동안 <완전한 사랑>이란 이름으로 불렸었죠. 어떤 제목이 더 마음에 들어요?
<완전한 사랑>은 관객들이 봤을 때 ‘아 이건 그냥 멜로 영화인가 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게다가 제목이 너무 많은 걸 설명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저는 <용의자 X의 헌신>이란 이름이 더 마음에 들어요. 원작도 바로 알 수 있고요.
스릴러지만 이 영화의 가장 큰 동기는 사랑이죠.
우리 영화는 오히려 원작을 더 현실적이게 만든 것 같아요. 전혀 다른 색깔의 사랑이잖아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종류의 사랑이 아니니까, 그런 것을 보여주려 한 거 같고, 류승범 씨도 그래서 이 작품을 선택했다고 했거든요.
이 영화가 사랑에 대해 취하고 있는 태도가 흥미로웠어요. 사랑엔 무조건적인 믿음이 필요한 걸까요?
제 생각은 별로 안 해봤고 화선의 입장에서는 많이 생각해봤죠. 정말 그 마음을 알 것 같았어요. 나중에 그의 마음을 다 알고 나서요. 그 사람의 순수한 사랑을 알 것 같아요.
사실 정말 행복한 여자 아닌가요?
그렇죠. 다른 것도 아니고 ‘그것’까지 대신 해준다는 것은 말이에요. 가족도 못해주는 일을 전혀 낯선 사람이 해주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 말이죠.
물론 극단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무조건적인 사랑을 이야기하죠. 무조건적인 사랑이란 이 세상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만 존재한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사랑을 꿈꾸죠.
아플 때도 떠나지 않고.
아플 때도 떠나지 않고, 내가 아주 큰 잘못을 하더라도 말이에요.
그래서 타이거 JK 랑 윤미래가 예뻐 보이지 않아요? 정말 진정한 사랑 같아요. 뭔가 힘든 상황이 오면, 사랑이 더 커지는 것 같기도 해요. 그동안 몰랐던 사랑을 아는 거죠.
- 에디터
- 허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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