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가장 따뜻한 바다
“그럼, 부산.” 마음의 거리가 한 뼘으로 줄었다. 땅끝처럼 멀게만 느껴졌던 부산이 하릴없는 주말, 약속 없는 휴가에 마치 양평으로 차를 몰듯 그렇게 떠날 수 있는 곳이 되다니. 너무 추워서 어디를 가야 할지 모르는 겨울날도 부산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12월에도 노랑 은행잎이 여유를 부리던 부산으로 떠난 겨울 여행. 철들고 두 번째로 찾은 부산과 이만큼 더 친해졌다.
범어사 속 휴휴정사
부산역도 아니고, 해운대도 아니고, 부산의 첫 걸음은 범어사에서 시작 되었다. 바다는 보이지 않았지만 넓고 깊은 부산은 도시 한쪽에 크고 멋진 절도 가지고 있다. 아직 단풍의 끝이 머물러 있는 구불구불한 언덕을 오르면 범어사가 나타난다. 범어사는 7세기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지은 절이다. 해인사, 통도사와 함께 영남지역 3대 사찰로 손꼽히는 큰 절이고, 영남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사찰이기도 하다. 화엄 사상을 널리 퍼뜨린 열 개 사찰, ‘화엄십찰’ 중 하나로 손꼽히던 곳으로 한번 소실된 것을 조선시대 때 복원해 지금에 이르렀다. 범어사라는 이름은 신라 흥덕왕의 꿈에 신이 나타나 금정산에 화엄을 외우고 기도하면 왜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했다는 설화에서 기원했다. 산을 따라 겹처마와 맞배지붕이 이어지는 사찰은 층층이 아름답고, 겨울의 한기 속에서도 소나무와 대나무의 푸르름은 여전하다. 범어사는 템플 스테이 프로그램이 잘되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누구든 차별하지 말고 문을 지나라는 뜻의 ‘불이문’을 지나 언덕을 더 오르면 템플 스테이가 이루어지는 휴휴정사가 있다. 본래 스님들이 수행하던 곳을 이곳을 찾는 속세인에게 내준 곳이다. 쉴 휴(休)가 무려 두 번이나 반복되는 이곳에, 붐비는 마음과 머리를 잠시 내려두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참선’을 중심으로 한 사찰 예절, 예불, 발우공양, 108배 체험을 할 수 있다. 휴휴정사 옆 하늘 높이 솟은 감나무에는 여전히 붉은 감이 잔뜩 남아 있다. 새들과 숲과 나눠 먹기 위해서 스님들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감을 그대로 두었다.범어사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등나무 군락이 있다. 여름이면 무성한 잎사귀를 드리웠을 등나무도 겨울에는 다른 나무와 다르지 않다. 범어사 외에도 부산 곳곳에 작은 사찰이 있다. 기장에 있는 용궁사는 암자로 유명하고, 태종대에 있는 태종사는 초여름에 열리는 수국 축제가 유명하다. 어느 산속이나 가장 풍경이 좋은 곳에는 사찰이 있다. 우리가 지금 숨쉬며 살고 있는 이곳이 극락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풍광 좋은 곳에 절을 세웠다는 말처럼, 계절마다 사찰은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며 ‘현세론’을 펼쳐 보인다. 겨울인 지금은 조용한 공기 속에서 대나무를 흔드는 바람과 청명하게 울리는 풍경소리만이 이따금 들린다.
숨은 그림 찾기
처음 부산을 찾았을 땐 돌아다니기 바빴다. 국제시장, 깡통시장을 분주히 오갔고 야구도 봐야지, 해운대에서 일광욕도 해야지, 밤에 달맞이공원에서 달맞이체조도 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낭만적인 부산을 알아보기로 한다. 바다와 산 위로 달이 뜨는 풍경이 근사해서 ‘문탠로드’라는 별명을 가진 달맞이언덕에는 예전부터 갤러리가 많았다. 작고 매력 있는 새로운 갤러리도 속속 생겨났다. 바다를 뒤로한 기찻길 옆 노랑 갤러리, ‘바나나롱갤러리’도 새로 생긴 갤러리 중 하나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소속 작가 이홍석의 전시가 열리고 있는 바나나롱갤러리는 한눈에도 범상치 않다. 문 앞에는 입장료 5천원이 써 있다. 그냥 오며 가며 발도장 찍는 사람이 아니라 작품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만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입장료를 예고하지만, 또 예고 없이 메뉴를 내밀어 놀라게 하는 곳이다. 갤러리에 들어오면 커피와 허브차 등 원하는 음료를 마실 수 있다. 워낙 바람이 불고 추운 날씨라 반갑게 애플시나몬 홍차 한 잔을 주문해 받아 들었다.
흰 벽마다 작품이 걸려 있는 아늑한 공간. 점잖은 견공 ‘콜라’는 갤러리의 살아 있는 오브제처럼 앉아서 이따금 방문객들을 돌아보고, 기차가 지날때면 가벼운 진동도 느껴진다. 심리치료와 미술치료를 공부한 관장은 그래서 외벽을 노랗게 칠했다고 한다. 달맞이언덕에는 갤러리뿐만 아니라 추리문학관 겸 카페 ‘셜록의 집’도 있다. <여명의 눈동자>를 쓴 김성종 작가가 운영하는 곳이다. 입장료 5천원을 내면 원하는 커피나 차 한잔과 함께 이곳에서 소장 중인 4만 권의 추리문학을 자유롭게 볼 수 있다. 1층부터 3층까지 층마다 다른 분위기가 펼쳐지고 모든 층에서 바다가 내려다 보여 전망이 매우 좋다. 평화로운 곳에서 서스펜스와 미스터리 가득한 추리소설을 읽는 기분도 제법 멋질 것이다.
해운대에 있는 고은사진미술관도 꼭 둘러봐야 할 갤러리다. 해운대에 본관, 수영만 요트경기장 근처에 신관이 있는 ‘고은사진미술관’은 부산에 최초로 생긴 사진전문미술관으로 이곳에서는 항상 좋은 사진전이 열리고 있으며, 입장도 무료다. 본관에서는 요즘 활발히 활동 중인 젊은 작가의 <사물의 목록> 전시가, 신관에서는 중견 사진작가들의 인물 사진전인 <직면> 전시가 한창이었다. 지금 부산에 가야 할 이유는 또 있다. 아시아 최대 국제영화제인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의 도시답게, 세 달 전 ‘영화의 전당(Busan Cinema Center)’이 드디어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이 듬뿍 들었지만 비 새고 물 샌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었던 부산 시네마테크와 뜨겁게 안녕을 고한 뒤 새롭게 지은 이곳은 부산국제영화제 사무국과 아카이브는 물론 영화관, 공연장, 야외공연장 등이 들어선 복합 공간. 2천억원에 달하는 예산이 투입된 결과, 영화의 전당은 부산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었다. 특히 지붕에 설치된 태양열 발전으로 돌아가는 12만 개의 LED 조명이 설치된 빅루프와 스몰루프는 해가 진 부산을 색색으로 밝힌다. 이 지붕은 축구장의 2.5배에 달하는 엄청난 면적으로, 실제로 보면 압도적이다. 아직은 세부 공사가 진행 중이라 조금 스산한 느낌은 있지만, 영화관에서는 개관기념영화제가 한창이다. 숨겨진 걸작과 지금 아니면 영원히 못 볼 것 같은 희귀한 영화, 모두가 사랑하는 명화 등 122편에 달하는 영화를 12월의 마지막 날까지 상영한다. 이곳의 영화관은 우리나라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해운대의 야경을 볼 수 있는 근사한 전망과 라운지, 편안한 좌석을 갖추고 있다. 이제 부산에서 할 일이 하나 더 늘었다. 바로 부산에서 영화를 보는 일.
종이 냄새 나는 그 골목길
부산은 전쟁의 피해를 직접 입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전쟁과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는 고스란히 남았다. 부산에서 운전대를 잡은 여행자를 경악하게 만드는 꼬불꼬불한 길과 좌회전 금지, 유턴 금지 등 온통 금지 구역인 도로 역시 옛길의 형태를 고스란히 두고 도시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이 된 돼지국밥과 밀면 역시 피난길에 오른 실향민들이 고향을 생각하면서 만든 음식이다. 소보다 흔한 돼지를 잡고 흔한 정구지(부추)를 팍팍 넣은 돼지국밥을 만들었고, 메밀을 구하지 못해 밀가루로 대신 만들어 먹던 냉면이 밀면이다. 보수동 책방 골목이 생긴 것도 전쟁 때였다. 시장 뒤쪽 언덕에 피란민 마을이 생기고, 대충 비바람만 피할 수 있는 임시 학교가 생겼다. 하늘이 무너져도 공부는 시켜야 했던 우리 어른들이었기에 책을 구하고 파는 골목이 생겨났다. 그 당시에는 금가락지처럼 책이 곧 화폐였다고 한다. 그게 지금에 이르렀으니 ‘살아 있는 역사’라고 해도 과장은 아니다. 국제시장 건너편에 ‘보수동 책방 거리’ 라고 적힌 솟대 하나가 이곳이 우리나라에 남은 가장 큰 헌책방 거리라는걸 알린다. 이곳 책방 골목에는 수십여 점의 크고 작은 헌책 서점이 영업중이다. 그 어떤 규칙도 없어 보이는 혼돈의 서점도 있고, 만화책, 교과서, 잡지 등 한 가지에 집중한 서점도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책방 주인의 취향도 보인다. 이곳의 터줏대감 중 하나인 ‘우리글방’은 찻집을 겸하고 있는 분위기 좋은 책방으로 시집은 물론 영화 서적, 미술 서적 등이 많다. 파랗게 칠한 계단과 곳곳에 보기 좋게 배치된 화집이 주인장의 취향을 알려주는 것 같다. 책방 골목에서 보기 드물게 LP도 판매 중이다. 이제는 추억의 영화가 된 휘트니 휴스턴 주연의 <보디가드>와 심수봉의 LP가 LP박스의 얼굴이 되고 있었다. 맞은편 서점에는 수녀님이 상자 한 가득 책을 가져와 팔기도 한다. 팔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 이 골목에서 두번째로 어린 주인이 운영하는 ‘책의 마음’은 한눈에 보기에도 멋스럽다. 본래 ‘성남서적’이라는 30년 된 책방이 있던 자리인데, 주인 할아버지가 연로하여 매물로 나온 것을 어릴 적부터 책방골목을 좋아했다는 지금의 주인이 인수하고 단장해 지금 ‘책의 마음’이 생겨났다. 해외 문학 원서, 해외 수입 요리책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고 화집과 사진집, 디자인 서적이 눈에 띈다. 책을 싼 겉 표지가 약간 바랜 것 외에는 새것이나 다름없는 에곤 실레의 양장본 화집을 3만5천원이라는 훌륭한 가격에 판다. 과거 뿌리 깊은 나무 출판사에서 출간한 우리나라 도감도 있다. 부산 남자라고 하기에는 말이 느린 주인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 책은 지금도 나오고는 있습니다만, 양장본으로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구할 수가 없습니다.” 책의 마음 주인장뿐만 아니라 이 골목의 책방 주인장들은 모두 책에 관한 한 달인이며 귀신이다. 어디에 무슨 책이 있고, 그 책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도 세세하게 꿰고 있다. 게다가 자존심도 상당하다. 책방 한쪽에서 자크 데리다의 <시선의 권리>를 발견했다. 꽤 낡았다. 정가는 1만5천원. 헌 책의 가격은 1만원. 홀랑 마음을 뺏긴 내 마음을 들켰는지 책방 아저씨는 1천원의 에누리도 없이 1만원 한 장을 받더니 ‘책은 살아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문구가 인쇄된 비닐봉투에 책을 넣어줬다. 그래도 좋았다. 나는 이 서점에서 밀리언달러 베이비를 건진 셈이니까. 대형 서점의 편리함, 인터넷 서점의 기능적인 구매와 달리 이 책방 골목에는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다. 발을 내디디는 사람만이 알게 될 것이다. 그 골목에서는 바람 같기도 하고, 바다 같기도 한 종이 냄새가 난다.
해녀를 찾아서
제주에만 있는 줄 았았던 해녀가 부산에도 있다는 제보를 접수했다. 바다에서 건진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라면 ‘해녀’라는 말만 들어도 배가 고파질 것이다. 기장 바닷가에도 해녀의 난전이 있다. 바닷가에 조르륵 놓인 천막에서, 산낙지, 해삼, 전복 등을 썰고 커다란 솥에 전복죽을 끓여주는 것으로 유명한 난전이다. 그곳에서 난생처음 소라를 ‘날것’으로 먹고 눈이 번쩍 뜨였다. 소라를, 소라를 날로 먹는다니! 부산에서는! 그 후로는 통영이든 인천이든 바닷가에 가면 소라를 날로 달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그게 같은 남쪽 바다인 통영에서는 잘 통했는데 인천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소라를 생으로 먹는 것은 아무래도 남쪽에서 흔한 일인가보다. 그런데 제보에 따르면, 기장이 아닌 부산 한가운데 오륙도에 해녀가 있다는 것이다. 그 해녀들이 방금 건져온 자연산 해물을 저렴한 가격으로 사 먹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한달음에 찾아갔다. 해운대에서 20분 정도 달리면 옛날옛적 두 명의 기생이 적장을 껴안고 투신했다는 이기대와 오륙도 유람선 선착장이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곳에 해녀의 집은 분명 있었으나 집주인인 해녀는 없었다. 물질 하러 가셨나. 근처에서 초장, 술, 라면 등을 파는 다른 천막에서 해녀의 행방을 물었다. 돌아온 아저씨의 답. “이런 날씨에 물질하면 할머니들 다 죽지.” 그러고 보니 이기대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가 심상치 않았다. 풍랑주의보와 강풍주의보가 내려진 부산 바다. 12월이든 1월이든 물질을 쉬지 않는다는 해녀들도 이렇게 파도가 거센 날에는 휴무다. 해녀가 잡아 올린 성게, 해삼, 돌멍게를 먹겠다는 위장의 요청과 해녀들의 건강한 미소를 담고 싶다는 마음의 욕심 모두 이루지 못하고, 파도가 치든 빗줄기가 날리든 꿋꿋이 낚싯대를 드리운 아저씨 옆에서 전어 낚는 것을 구경했다. 신기하게도 찌를 담그기만 하면 손바닥만 한 전어가 올라오는 것이었다. 날씨만 허락한다면 꼭 오륙도에서 해녀를 찾아보길. 날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다. ‘고디(고둥)’, 군수, 문어, 담치(자연산 홍합) 등을 솥에 넣어 푹푹 삶아준다고 하니까. 마침 이날처럼 바람이 몹시 불어서 해녀가 쉰다고 해도 걱정할 것은 없다. 이곳은 부산이고 자갈치시장에 가면 없는 게 없다. 시장에 없으면 정말 없는 것이다. 이곳에서 뿔소라와 해삼, 성게를 찾을 수 있었다. 2~3만원 정도를 쥐어드리고 해물을 섞어달라면 알아서 바다 내음 그득한 것들을 봉지 가득 담아준다.
겨울이 되면 그들이 먹는 음식
부산을 찾는 사람들이 일제히 달려가 먹는 음식점들이 있다. 속 시원한 대구탕 한 그릇을 먹으면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지금까지 내가 먹어온 대구탕은 과연 뭐였을까 라는 회한과 부산이 아니면 이 맛을 볼 수 없으리라는 슬픔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밀면은 고소했고, 돼지국밥은 양기를 보충해줬으며, 곰장어는 야생의 그 맛을 일깨워줬다. 냉채족발이라는 존재는 신묘하기까지 했다. 여기까지가 부산의 미식기행 초급반이라면 다음은 부산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 집, 그 음식을 먹어야 한다.
‘해운대하얀집’은 해운대의 여고를 나와 서울에서 살고 있는 한 친구가 귀향할 때마다 들르는 집이라고 했다. 메뉴는 단출하다. 오징어회와 생선구이, 내장까지 삶아서 통으로 썰어낸 오징어 내장구이. 해운대하얀집은 이 오징어회를 실처럼 아주 얇게 썰어내서 대박집이 되었다. 수족관에 있는 오징어를 건져 횟감 밑에 까는 무채보다도 얇게 썰어 내오는데, 그 덕분에 쫀득하게 치아에 달라붙곤 하던 오징어가 아주 깔끔한 맛을 낸다. 오징어회는 자꾸 먹으면 질리지만 이렇게 썰어낸 오징어회는 계속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초장에 찍어 한입 먹으면 이게 오징어 맞나 싶고, 기름장에 찍어 한입 먹으면 정말 이게 오징어구나 싶다. 여기에 겨울이 되면 과메기를 곁들인다. 과메기로 유명한 포항 구룡포는 부산의 이웃이 아닌가. 얼었다 녹았다,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듯한 과메기는 처음 맛보면 홍어의 충격을 방불케 할 정도로 희한한 맛이다. 생선 기름이 배어 나온 녹진하고 꾸덕꾸덕한 식감도 호감은 아니다. 하지만 사투리 쓰는 아저씨들이 먹는 대로 겨울배추에 물미역, 매운 고추와 생마늘과 생파줄기를 척척 올리고 과메기 한 점을 얹어 입안에 넣으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맛이 난다. 이게 바로 과메기 맛, 겨울 바다의 맛이다. 과메기처럼 겨울에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또 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광안리의 바닷가 식당이나 시장 어귀의 식당에서는 벽에 ‘메기탕’을 써서 붙인다. 바닷가 식당에 웬 민물고기인가 싶지만, 부산의 ‘메기탕’은 흐물흐물한 살을 갖고 있으며, 아구보다 못생겼지만 국물은 시원하고 해장에도 으뜸인 물메기로 만든다. 강원도 속초에서는 곰치국 또는 물곰탕으로 부르고 고춧가루를 넣어 얼큰하게 먹지만, 부산에서는 맑게 끓인 것을 선호한다고. 1만원이면 냄비 가득 물메기탕이 나온다. 무와 미나리, 소금만 넣어 끓였는데도 속이 따뜻해진다.시장통에서 가볍게 말아 먹는 국수 속에도 부산만의 맛이 있다. 넙데데한 디포리 멸치를 사용한 ‘구포국수’와 ‘비빔당면’이다. 부산 구포 지명을 딴 구포국수는 한국전쟁 시절 가난한 피란민의 구호식량과도 같았다. 한때 부산에는 국수 공장만 30곳이 넘었고, 한 업체에서 ‘구포국수’라는 이름으로 상표등록을 하자 소송이 일어나기도 했다. 재판부는 ‘구포국수’는 구포의 명물이기에 한 업체에서 단독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줬다. 구포국수는 부산의 국수라는 것이다. 시금치와 부순 김, 어묵 한 조각을 올려 양은 그릇에 수북하게 담은 구포국수의 가격은 1천5백원. 시금치와 단무지 고명을 올려 고추장 양념을 넣고 비벼 먹는 당면도 부산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음식이다. 국제시장, 깡통시장, 자갈치시장 인근에 있는 ‘18번 완당집’도 벌써 60년이 넘은 집이다. 입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완당 한 그릇을 먹고 나니 천지가 내 것이로구나’. 한국전쟁 당시 일본에 갔던 창업주는 일본에서 완탕만드는 법을 배워서 귀향했다. 중국에서 시작된 완탕은 일본으로 건너가 맛이 한번 바뀌었고, 다시 부산으로 건너와 또 한번 달라졌다. 그게 지금의 ‘18번 완당집’이다. 작고한 창업주의 손맛을 이어 아들과 며느리, 손자와 손자며느리가 지금도 매장 입구에 앉아서 쉴 새 없이 완당을 빚는데 한 개를 빚는 데 채 1초도 걸리지 않는다. 투명할 정도로 얇은 피에 고기와 부추로 만든 속을 넣어 삶고, 아삭거리는 데친 숙주와 달걀 지단을 올려 육수를 부어 내는 완당 한 그릇은 추위와 허기를 달래는 데는 최고. 입안에서 만두피가 호로록호로록 기분 좋게 넘어간다.
부산 토박이들이 즐겨 찾는다는 횟집도 찾아갔다. ‘온천장’으로 불리는 구 시가지에 있는 ‘녹산횟집’이 그곳. 바닷가에서 회를 먹을 땐 굳이 광어며 우럭을 찾을 필요가 없다. 그때그때 맛있는 잡어회를 먹거나 그 지역 사람들이 좋아하는 생선을 먹는 게 훨씬 맛있다. 녹산횟집의 메뉴는 3가지뿐이다. 볼락, 도다리, 돔. 이것을 적당히 섞어서 주문하면 된다. 도다리를 세꼬시로 썰고, 돔은 막회로 막 썰고, 볼락은 포를 뜬다. 남쪽 바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생선이라 서울로 올려 보낼 물량이 없다는 볼락을 회로 시켜봤다. 맛있다. 탱글하게 쫀득하게 감도는 볼락의 맛. 크게 포를 뜬 까닭에 한 점 한 점 사라지는 게 눈에 보여서 서운할 정도다. 도다리와 세꼬시는 함께 나온 묵은지에 싸먹고, 신선한 물미역은 멸치액젓에 찍어 먹는다. 회를 뜨고 남은 서더리뿐만 아니라 인심 좋게 생선 한 마리를 툭툭 잘라 넣은 매운탕도 시원하다. 곁들여 나온 무김치와 콩잎, 모든것이 짭짤하고 화끈하다. 돌아서면 그리운, 부산 맛이다.
태종대에서 노을 지다
겨울의 밤은 갑자기 찾아온다. 하루가 즐겁다 싶은데 해가 사라졌다. 범어사에서 시작한 여행의 끝은 태종대에서 맞았다. 기세가 서릿발 같았다던 태종도 감탄했다는 풍경이 펼쳐진다. 산을 둘러 펼쳐진 바다에 노을이 내리고, 바다 위의 선박이 하나둘 불을 밝히는 풍경은 고요하다. 어쩐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온기가 있다. 천 개의 눈이 빛나고 있는 시가지와는 또 다른 부산의 밤이다. 부산해서 부산이라는 그 부산은 셀 수 없는 많은 매력과 멋진 장면을 숨겨두고 있다. 아무래도 부산에 또 와야겠다. 부산이 서울에서 제일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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