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당신의 잠은 안녕한가요?

불안 그리고 불면

나는 잠을 정말 잘 잔다. 스케줄을 가득 채운 병원 진료와 방송, 외주, 개인 일까지 처리하다 보면 하루가 짧다 못해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잠들기 직전까지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고 자리에 누우면 방전되듯 꼴까닥 잠이 드는 것이다. 다행히 수면의 질이 괜찮은 편이라 자고 일어나면 에너자이저로 돌아온다. 내게 잠은 보약이고 에너지의 원동력이다. 그런 내게도 단기 불면증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바로 강연을 준비하거나 중요한 시험이 있는 전날 밤! 하나의 일에 집중하면 고도로 예민해지고, 잡생각이 많아진다. 몸은 이미 녹초가 되어 눈을 감았으나, 강의안이 계속 아른거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다. 그러다 보면 새벽 6시를 넘기기도 한다. 오후에 커피를 마신 날에는 더 심해진다.
커피를 3~4잔씩 마시고도 잘 자는 사람이 많던데, 내게 저녁에 마신 커피는 불문율처럼 잠을 쫓는 무서운 처방이다. 아침 혹은 점심 이후에 1~2잔이 잠을 방해하지 않는 최대치임을 알고 나서는 이를 지키려고 노력 중. 잠을 설친 다음 날에는 이동하는 시간을 쪼개 쪽잠을 자야 한다. 자차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해 이동하는 동안 잠을 자거나, 강연장에 조금 일찍 도착해 모자란 잠을 보충한다. 그 외에 혼자 있는 날이면 불안증이 찾아오며 잠을 방해한다. 불을 끄면 불안증이 심해지고, 불을 켜면 잠이 달아난다. TV를 틀면 시끄럽고, 끄면 무섭다. 이런 밤에는 ‘나중에 나이가 더 들면 불면증이 심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무서우니까, 외로우니까. 그것도 잠시, 다음 날 출근을 해야 하면 이런 상념에 잠길 시간이 없다. 은은한 주황색 조명이나 TV를 켜고 양쪽 귀에 귀마개를 꽂은 채 잠을 청해보는 수밖에.
이런 단기 불면증만으로도 몸이 피로하고 일의 능률이 떨어지는 부작용을 겪었다. 불면증으로 오랜 시간 힘들어하는 주변인에게 삶의 질을 지키기 위해서는 잠에 드는 나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얇은 스카프를 목에 둘러 아늑함을 더하거나, 마음의 안정을 주는 수면 인형을 안고 자거나. 보약만큼 귀한 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보길! – 정유미(매직키스치과의원 원장)

 

산책이 끝날 때

나는 혼자 깨어 있는 일의 슬픔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불면증은 내밀한 이유로 나를 흔들었고, 혼자 두었다. 불면의 재료는 불안과 미련이었다. 하루를 놓아주지 못하는 마음은 이별을 보류하는 마음과 비슷했다. ‘뭔가 더 있겠지’ 하는 마음. 물론 독서나 가벼운 요가나 모닥불 소리를 틀어두는 노력도 해봤지만 평안을 꾸며낼수록 하루가 남아 있다는 강박, 소진하지 못한 가능성을 향한 아쉬움이 더 짙어졌다. 이야기를 들어줄 친구들은 잠들어 있었다. 아니면 졸리다는 투로, “이제 자러 갈게”라며 서둘러 대화를 종료했다. 오늘과 이별하지 못하는 나는 사람들과도 엇갈렸다. 내일은 내게만 아직 멀었다.
몇 년간 고착된 수면 장애가 나아진 것은 뉴욕에 와서부터다. 여행에서는 내일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잠들지 못할 거라면 서둘러 거리로 나서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뉴욕에서 잠을 포기하는 건 체념이 아닌 야심이다. 잠들면 놓치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잠을 미루는 것이다. 열병과도 같은 불면증을 앓는 이는 두 번 외출한다. 낮에 한 번, 밤에 한 번. 밤이 되면 나는 미련의 실루엣을 감춘 그림자가 되어 돌아다닌다. 이곳에서는 정상적인 하루의 지반에 있는 것들, 이를테면 오버된 시간과 피로, 때늦은 흥분, 하루 끝을 보류하려는 충동이 용인된다. “새벽 3시에도 중국식 누들을 시켜 먹을 수 있는 건 뉴욕뿐이라고!” 미드에서 자주 등장하는 대사는 이 도시의 불면을 자랑한다. 새벽 1시의 첼시 거리. 옷깃 여미는 소리, 연인의 대화 소리, 드문드문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길 건너 방대한 종류의 컵라면을 취급하는 편의점은 새벽 4시까지 운영하고, 서쪽으로 세 블록 가면 있는 다이너(미국의 기사 식당)는 밤새 열려 있다. 꺼질 줄 모르는 네온사인과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 밤새 운행하는 지하철. 42번가에서라면 아직 스테이크도 주문할 수 있는 곳. 나만 깨어 무언가를 찾는다는 소외감도, 이미 늦었다는 패배감도 낮을 흉내 내며 번쩍거리는 도시가 주는 위로 안에서 애처롭게 반짝인다. 얼마간의 산책이 특별하고 안전했던 건 혼자가 아니어서이기도 했다.
나처럼 쉽게 잠들지 못하는 사람과 함께 새벽을 걷는 일이 즐거웠다. 뉴욕의 밤거리를 독점하는 아찔한 기분은 덤, 우리는 드문드문 손님이 앉아 있는 다이너에서 양파 수프를 먹고 이미 닫힌 조명 가게 쇼윈도를 구경했다. 축적된 불면은 로맨틱한 성취다. 우리는 뉴욕이라는 각성제 없이도 서로를 알아가는 것으로 시간을 메웠다. 그게 아니라, 시간을 잊었다. 정신 차리고 나면 새벽 2시였다. 다음은 3시, 그리고 6시. 쓰레기 수거차와 식료품 트럭 후진음이 들려오면 정말로 자야 할 시간임을 깨달았다. 잠을 잊으니 잠이 우리를 찾아와 안달했다. 그때부터는 경쟁하듯 졸음을 참는다. 하던 말을 끝맺지 못한 채 먼저 잠든 얼굴이 생긴다. 나의 눈꺼풀이 무겁게 깜빡이다가 끝내 감긴다. 그때 잠든 줄 알았던 그가 운을 뗀다. “자?” 잠으로 고꾸라진 나는 그 소리가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그 헷갈림이 달콤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대답 대신 나는 이렇게 얼버무렸다. “너랑 있으면 자꾸 졸려.” 아마 잠꼬대였을 것이다. 몇 시간 뒤, 주저함 없이 해가 뜬다. 이렇듯 쉽게, 내일이 왔다. – 유지혜(작가)

 

밤으로 나아가기 

밤은 일상의 수다스러운 것을 뒤로한 채 원하는 세계에서 유영할 수 있는, 어쩌면 가장 환한 시간이다. 고양이의 눈처럼 아득한 밤. 낮보다 밤을 선명하게 보내는 것이 익숙하던 내게 언젠가부터 습식 사우나에 들어온 듯 뿌옇고 갑갑한 어둠이 찾아왔다. 침대에 누운 채 내 영혼은 밤거리 어딘가를 목적 없이 배회했다. 확인하지 못한 뉴스레터와 OTT 서비스 업로드 소식, 올릴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마는 쪽을 택하는 소셜 미디어 포스팅과 경종을 울리듯 찾아오는 할인 광고 등 각종 세상사가 밤을 덮쳤다. 눈을 부릅뜬 채 밤을 아끼지 않았다. 고카페인에 의지해 위가 망가지고 나서야 몽롱한 정신을 잠재울 때가 됐구나 싶었다. 처음 시도한 방법은 수면에 도움이 된다는 ASMR을 찾아 듣는 것이다.
어느 날은 잔 속의 샴페인이 춤추는 듯한 빗소리에 의지하고, 또 다른 날은 침대가 숲속 오두막 안에 있는 것 같은 장작 소리에 기대어 잠들기도 했다. 한동안 귀르가즘의 효과를 톡톡히 봤지만 어느덧 ASMR 없이는 잠들 수 없다는 또 다른 불안이 생겼고, 최적의 ASMR을 찾다가 오히려 밤을 꼴딱 새우는 상황도 발생했다. 여전히 불면과 동침하는 와중에 결혼과 더불어 임신과 출산이라는 빅 이벤트가 줄줄이 이어지며 밤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한동안 돌봄으로 인해 숙면은 먼 나라 얘기였고, 아이가 통잠을 자기 시작하면서는 육퇴 후 고요하고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 소중해 잠을 자기 아까워졌다. 육아 중 놓친 이슈를 따라가려니 조급함에 숨이 가빴다. 우연히 스트레스 해소와 림프 순환에 좋다는 보디 브러싱을 알게 되고는 은은한 불빛 아래서 빳빳한 돈모 브러시로 몸을 정성껏 쓸어보기도 했다. 과연 기분 좋은 개운함을 선사하며 어느 정도 도움이 됐으나 밤을 채찍질하는 불안을 온전히 씻어주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최근 제니 오델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을 연달아 읽으며 내가 중독 상태임을 깨달았다. 두 책은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다룬다. 우리를 다그치는 디지털 세계를 완전히 끊을 수 없겠지만 한발 떨어져 현실을 만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육아로 삶의 반경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나는 가장 쉽게 다른 세상과 연결되는 휴대폰을 들었다. 206g의 네모난 화면만이 탈출구인 것처럼 짬 날 때마다 그곳에서 허겁지겁 갈증을 해소하기 바빴다. 채우고자 하는 욕망의 시간이 쌓일수록 밤은 점점 불안해졌다. 이 사실을 인지한 뒤로는 어떤 장소 안에서 온전히 살기 위해 애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차가운 바람과 햇빛 속에서 보내는 시간을 늘리고 계절색을 인지하며 지금 충분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녹음된 소리가 아닌 현실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온전한 밤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으며. – 이다영(프리랜스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