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외곽에서 자란 소녀 아콰피나의 다른 이름인 노라 럼은 최근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다. 지금까지 여러 번의 위험을 감수한 그는 몇 편의 영화, TV 쇼, 랩 커리어를 가지고 있다. 다음에는 어디로 향할까? 아콰피나 또는 노라 럼에 대해서.

 

아콰피나와 나는 한참 동안 범죄 프로그램에 대해 신나게 떠들었다. “<데이트라인>이 그중 최고예요.” 우리는 서로의 최애 에피소드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고 그는 방구석 범죄 전문가로서 예리한 분석을 내놓았다. 그는 <포렌식 파일(Forensic Files)>, <인벤터(The Inventor)>, <성관계하다가 응급실에 실려 갔어요(Sex Sent Me to the ER)> 등 여러 범죄 관련 프로그램을 두루 섭렵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미국의 탐욕(American Greed)>과 같은 프로그램이 다루는 사기 행각, 정교한 은폐 시도와 스캔들에 관심이 많다. 불행한 범죄를 보면 묘하게도 안도감을 느낀다고 얘기한다. “그런 프로를 볼 때마다 내가 저 범죄자들처럼 어리석거나 탐욕스럽지 않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지난봄, 코로나19로 인한 락다운 기간 동안 사람들은 집에서 즐길 수 있는 소소한 취미 활동으로 천연 발효 빵, 바나나 파운드 케이크를 만들며 홈베이킹에 몰두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콰피나는 조금은 색다른 취미 활동에 빠져 있었다. 다름 아닌 마술이다. 영화 <오션스 8>에서 소매치기 역할을 맡았을 때 처음 배운 것이다. “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속이는 방법이에요”라고 설명한다. “펜으로 달러 지폐에 구멍을 내는데 지폐가 원상 복구되는 마술을 여러 번 봤어요. 볼 때마다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신기했어요. 펜이 지폐를 관통할 때 지폐에 구멍이 생기는 건 당연한데, 어떻게 그 구멍을 다시 없앴는지가 궁금했죠. 그런데 <데이트라인>을 봐도 항상 답은 지극히 단순한 것이잖아요. 이 묘기의 비밀도 그래요. 지폐에 구멍을 낸 뒤에 사람들의 눈을 속여 테이프를 붙이는 거죠. 굉장히 단순하지만, 대단히 효과적인 마술이죠.”

오늘의 아콰피나

지난 일년 동안 팬데믹의 여파로 전 세계가 고군분투했지만, 이 33살의 배우는 쉴 틈 없이 바삐 활동했다. 우리의 인터뷰는 줌으로 이뤄졌는데, 인터뷰를 하는 시간도 촬영 전에 간신히 만들었다. 인터뷰 첫날도 그의 스케줄은 빽빽했다. 아침 일찍 기상해 샤워하고 세 살짜리 반려견 산책까지 마친 상태였다. 불과 몇 주 전에 입양해 새 식구가 된 반려견과 침대에 앉아 인터뷰를 마친 뒤 바로 촬영장으로 향했다.

팬데믹 상황 속에서도 아콰피나는 끊임없이 일을 했다. 마블사의 아시아 슈퍼 히어로물인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Shang-Chi and the Legend of the Ten Rings)>은 호주에서 촬영했는데, 다행히도 호주에서는 코로나19의 확산이 빠르게 진화되어 무사히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영화 촬영을 끝내고 LA에서 한두 달 정도 짧은 휴식을 가진 뒤에는 마허샬라 알리와 함께 출연하는 영화 <스완 송(Swan Song)> 촬영을 위해 밴쿠버로 향했다. 이후 자신의 이름을 딴 TV시리즈 <퀸스 출신의 노라(Nora From Queens)> 시즌 2 촬영을 위해 뉴욕으로 갔다.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빠요. 매일 촬영할 때가 많고 여러 주 동안 촬영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일이 없어서 놀고 있을 때보다는 시간이 훨씬 빨리 가는 것 같아요. 조안 리버스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었는데 그녀가 ‘최악의 악몽은 제 달력이 텅텅 비어 있을 때예요’라고 했을 때 공감이 됐어요.” 약한 물줄기처럼 내려오던 일이 이제는 물밀 듯이 쏟아지며 그의 캘린더는 스케줄로 꽉 채워졌다.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는 스타가 된 그를 보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웨이트리스 1’ 같은 단역으로 영화에 출연하곤 했던 무명 배우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된다.

155cm의 작은 체구에도 환한 미소와 통통 튀는 매력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던 아콰피나를 처음 만난 건 아마 막 대스타로 발돋움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2018년 6월쯤 <오션스 8>과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 개봉을 앞둔 시점에 나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후 몇 달 뒤 우리는 LA 스튜디오에서 팟캐스트에 함께 출연하면서 친해졌고 <페어웰>의 개봉을 축하하기 위해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그때쯤에는 나는 아콰피나라는 캐릭터가 어떻게 탄생하게 됐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여러 번 접한 후였다. 다른 이들도 나처럼 알게 됐을 거라 짐작한다. 이 기사를 쓰기 전에 나는 유튜브에서 너무나도 유명한 그의 랩 뮤비 <My Vag>에 대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언급하지 않기로 다짐했다(수첩에는 ‘절대 My Vag 언급 않기’라고 적어두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를 묻자 주저 없이 자신의 유튜브 뮤직비디오 얘기를 꺼내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할 수밖에 없다. 아콰피나는 과거를 회상하며, 그 뮤비를 계기로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낸 그 영상은 마치 그가 오늘의 위치로 오를 거라는 예언 같기도 하다.

라구아디아 예술 고등학교의 공연 예술과를 졸업한 후, 아콰피나는 일년간 중국 여행을 했고 뉴욕주립대학 올버니 대학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 낮에는 도서 홍보 마케팅 일을 했고 저녁에는 시간당 9달러를 받으며 브루클린에 있는 비건 보데가에서 라이브 공연을 했다. 13살에 랩을 쓰기 시작한 아콰피나는 불과 19살에 ‘My Vag’ 곡을 가라지밴드(Garageband) 앱으로 녹음했고 24살이 되든 해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뮤비의 조회 수가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을 때 그는 아빠와 같이 살던 퀸스 집에서 ‘지금 이 상황이 실화인가?’ 하고 생각했다. 꿈인 것 같아 자신을 꼬집어야 할 것 같았다며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자신의 외설적인 패러디 영상 때문에 혹여 직장을 잃지 않을까 걱정하던 우려는 현실이 되었지만 한 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는 속담처럼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뮤직비디오를 인상 깊게 본 코미디언 세스 로건이 2016년 <나쁜 이웃들2>에 출연을 제의한 것이다. 그후 2018년에 개봉한 <오션스 8>에서는 산드라 블록과 리한나와 나란히 출연해 소매치기 콘스탠스를 연기하면서 커리어는 고공행진을 시작했다. 두 달 뒤, 2018년 8월에 로맨틱 코미디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가 전 세계적으로 대성공을 거두며 래퍼이자 배우였던 노라 럼의 진정한 전성기가 열리게 되었고 그 후로는 바쁜 생활이 일상이 되었다. 할리우드에서 코미디언이 타 장르로 넘어가기까진 통상적으로 최소 몇 년의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코미디계의 떠오르는 별로 명성을 떨친 지 일년 만에 룰루 왕 감독의 <페어웰>에 출연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이 영화에서는 살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를 위해 가슴 따뜻한 거짓말을 하는 외손녀를 연기하며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의 능력을 입증했다. 그 후 2020년에는 아시아계 배우 최초로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며 역사를 새로 썼다.아콰피나의 다음 행보를 살짝만 언급하자면, 성우는 물론이고 영화에서도 활약을 기대할 만하다. 디즈니도 그를 눈여겨보고 있다.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에서는 드래곤 시수의 목소리를 맡아 영화에 감칠맛을 더했고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도 출연했으며, <인어공주> 실사판에서는 갈매기 스커틀로 곧 만날 수 있게 된다.

EYE CANDY
드레스는 요지 야마모토(Yohji Yamamoto). 보디 슈트는 스킴스(Skims). 헤드 피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맥의 ‘메모리즈 오브 스페이스(Memories of Space)’, ‘룰(Rule)’, ‘패셔네이트(Passionate)’, ‘뉴 크롭(New Crop)’ 아이섀도우를 사용했다.

아콰피나 그리고 정체성

아콰피나의 부상은 최근 엔터테인먼트 사업에도 불어온 인종, 젠더 이슈의 부상과도 시기적으로 맞물려 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상징하게 되었다. 할리우드에서 아시아계 배우들의 입지가 넓어진 것은 인정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있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아시아계 배우들은 차별의 역사를 견뎌내야 했다. “아시아계 배우들은 영화에 출연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백인 배우들이 아시아인 역을 맡았죠.” 하지만 동양인에 대한 미디어의 대우가 달라지면서 이러한 가시적인 변화가 문화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서 호흡을 맞춘 중국계 영국인 젬마 찬의 말을 인용하며 미디어와 문화는 “손에 손잡고” 상호작용을 한다고 설명한다. “동양인들이 스크린에서 묘사되는 방식이 실제 우리의 삶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분명해요.”

애틀랜타 총격 사건은 인종 문제와 관련해 최근 많은 아시아인을 가슴 아프게 한 사건이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는 너무 큰 고통이었다. 우리가 첫 화상 인터뷰를 진행하던 날은 백인 남성이 애틀랜타 지역에 위치한 아시아인 소유의 마시지 업소 세 군데를 급습해 6명의 아시아계 여성을 포함해 총 8명이 사망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지 3일이 지난 후였다. AAPI 커뮤니티는 이 사건으로 크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들어 심해진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감내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이 사건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애틀랜타 총격 사건이 발생한 다음 날 아침, 촬영하던 중 기사를 뉴스로 접했고 인형극을 하는 아시아계 동료와 이 사건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날 밤까지는 이 사건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눈가에는 눈물이 고인다. 눈물을 삼키려 벽을 응시하며 그녀는 “그 사건을 떠올리면 감정적일 수밖에 없네요”라고 말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이 그를 이렇게 동요하게 만든 이유는 자신과 자신들의 가족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는 중산층 아시아계 미국인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이번 사건을 비롯한 아시안 혐오 영상을 보면 감정이 격해져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에요.” 자신을 키워주신 할머니와 아버지를 생각하면 무력감은 더 강해진다. “매일 출퇴근하시는 아빠 걱정이 많이 돼요… 제가 도울 방법이 없는 것 같아서 무력감을 느껴요.” 이 애틀랜타 대학살은 여성 혐오, 인종 차별을 동시에 극명하게 드러냈고 이를 계기로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겪는 사회경제적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지금까지 아시아인들에게 가해지는 말도 안 되는 잔혹한 테러 행위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어요. 아시아계 미국인 하면 모범적인 소수 민족의 신화를 이뤄낸 점만 부각됐죠. 하지만 이들의 안전을 생각해야 해요.”

아시아계 미국인들을 향한 차별이 아직도 미국 사회 내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이유는 아직도 이들을 이방인으로 보는 사회적 인식 때문이다. 아콰피나는 중국계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 밑에서 태어나 멜팅 팟인 뉴욕에서 자랐지만 어릴 때는 자신이 이방인처럼 느껴지곤 했다고 말한다. “집에 있을 때는 인지하지 못하던 제 문화적 뿌리를 길거리에 나가 놀림을 받으면서 더 확실하게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는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이 다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이런 편견은 다 개소리야”라고 생각했다고 첨언한다. 오늘날과 같이 사회가 정치적으로 양분되고 갈등이 심한 상황에서 인종 문제는 논의하기 어렵고 복잡한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최근에 발생한 사건들을 보면 문제의 핵심은 “혐오”라고 말한다.

아콰피나와 가족은 굉장히 가깝다. 어머니는 그가 네 살 때 고혈압으로 돌아가셨고 그 후로는 할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퀸스에 있는 원룸 아파트에서 자랐다. 너무 어린 나이에 엄마를 떠나보냈기에 마음에 큰 상처가 남았다.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는 어렸기 때문에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당시엔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영화 <밤비>를 보면서 마음의 큰 위안을 얻었어요. 밤비와 밤비의 엄마를 보면서 슬픔을 이겨냈죠”라고 말한다. 단순한 만화 영화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게 디즈니 명작이 가진 힘인 것 같다고. “ 아이들만을 위한 인생 수업을 듣는 것 같았어요.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가르쳐주긴 힘든 부분을 영화로 배울 수 있었죠.” 외동딸로 성장하면서 느꼈던 외로움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원천이었다. “어릴 땐 상상 속 친구들이 있었어요. 제 옷장에 큰 구멍이 있고 그 통로를 지나면 환상적인 서커스 세계가 펼쳐진다는 식의 생각을 하곤 했죠.”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대부분 그렇듯, 아콰피나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한 단어로 정리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아콰피나의 어머니는 대학생 무렵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는데, 엄마와 보낸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중국계 미국인인 아버지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아빠는 퀸스 특유의 발음이 강해요”라면서 아버지는 로큰롤과 찰스 부코스키의 시집을 즐겨 읽는 분이라고 소개했다. 중국 문화를 아빠를 통해서만 접한 것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의 만병통치약인 위치 하젤, 호랑이 연고, 포 차이 필(중국 가정 상비약)을 접했다고 얘기한다. 집에서 지내는 생활 자체가 세대 간의 다채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는 학습의 현장이었다. “중국인으로서 전혀 다른 두 세대의 문화가 혼합된 환경에서 자랐어요.” 어릴 적 기억은 희미하지만 “지극히 한국적”이었던 엄마와 관련된 추억이 때로는 떠오른다. “성인이 되고 떡볶이, 반찬 등의 음식을 먹을 때면 엄마와 관련된 기억이 저도 모르게 떠오르죠.”

나이가 들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한국인으로서 자신의 뿌리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오랜 친구인 재미교포 래퍼 덤파운데드(Dumbfounded)와 이어 오브 디 옥스(Year of the Ox)는 럼에게 한국 문화를 전수하는 스승님이기도 하다. “큰오빠 역할을 자청해서 한국 문화에 대해 저에게 알려주려고 노력을 많이 해요”라고 럼이 설명한다. “그래서 빅 브라더들을 통해서 한국 문화를 다시 배우게 됐죠. 한국인과 중국인의 피가 동시에 흐르는 저에게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은 쉽지는 않아요. 저는 스스로 느끼기엔 한국인, 중국인도 아닌 것 같거든요. 그냥 미국인이라는 느낌이 제일 강하죠. 그렇기 때문에 아시아 문화를 더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어린 시절의 아콰피나

아콰피나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대화를 이어간 지 몇 분 만에 익살스러운 표정과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가는 방식에 매료돼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게 된다. “가는 곳마다 소용돌이처럼 휩쓸고 다녔어요. 머리는 항상 산발이었죠. 친구와 재밌게 놀 수 있다면 사족을 못 쓰는 아이였죠. ” 어릴 적 기억하는 자신은 <루니툰즈>에 등장하는 “태즈매니아 데빌(태즈)” 같은 악동이었다며 “어디를 가든 넘어지고, 몸을 던지고, 구르고, 진흙을 뒤집어쓰는 천방지축 그 자체였어요. 엄청 높은 나무를 기어오르기도 했죠.” 한번은 나무에 매달려 있는 딸을 발견하고 아빠가 기겁을 한 적도 있다고. 아버지는 사다리까지 동원해 겨우 딸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자유로운 영혼이었기에 위험한 순간도 여러 번 있었다. 지금까지 큰 사고 한 번 겪지 않고 몸이 성한 건 기적에 가깝지만, 모험으로 얻은 영광의 상처는 몇 군데 남아 있다. 자신의 팔뚝을 살펴보더니 컴퓨터 카메라 앞으로 팔을 갖다 대며 상처를 얻게 된 경위를 설명한다. 하나는 가파른 언덕을 롤러블레이드를 뒤로 타며 내려오다 생긴 것이고, 다른 하나는 흙 속에서 자전거를 타다 생긴 것이었다. “더트 바이크”를 탄 게 아니고 진짜 말 그대로 흙 속에서 자전거를 타다 생긴 거예요”. 그 무엇도 어린 노라 럼을 방해할 수 없었다. 어디를 가든 재미를 찾을 수 있었다. 어릴 적엔 “마음 가는 대로 활개 치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어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촬영 현장에서도 그녀는 자신 내면의 태즈매니아 데빌 에너지를 숨길 수 없었다. “마블 세계관의 일부가 되는 것은 너무나도 가슴 떨리는 일이에요. 촬영장에 있을 땐 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아요. 너무 기대돼요.” 아콰피나가 맡게 될 캐릭터는 기밀 사항이라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혹시 말해줄 수 있으니 용감하게 물어보기로 했다. 고강도의 신체 훈련을 받아야 했는지 물어보았다.

자세한 얘기는 피하면서도 다른 출연진에 비해 몸을 쓸 일은 크게 없었다고 귀띔해주었다. 빌딩에 매달려 있는 와이어 액션을 제외하면. 어릴 적부터 나무 오르기, 롤러블레이드 타기, 흙 속에서 자전거 타기로 단련된 배우이기에 스턴트 대신 몸을 쓸 기회가 있으면 절대 마다하지 않는다고 한다. “신뢰가 있으면 가능해요. 안전장치도 다 하고 있잖아요. 전 몸을 던지는 게 좋아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도 좋아하죠. 하지만 촬영장에서는 매달리기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어딘가 매달려 있는 건 코어 근육을 써야 해서 썩 좋아하진 않아요.”

일정이 다 끝나면 집으로 가거나 촬영지의 숙소로 향한다.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라 오프 스위치를 켜는 게 쉽지 않다고 한다. “저는 항상 불면증 비슷하게 잠자리에 들기가 어려워요. 저는 외향적인 사람이잖아요. 촬영장에서 충전하고 집에 돌아오면 에너지가 넘쳐요. 그래서 집에 돌아오면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곱씹어보며 생각이 많아지죠. 내가 그 말을 했었나? 하면서 한참 생각을 하다 잠이 들고 다음 날이면 다시 벌떡 일어나서 기대에 부푼 채 촬영장으로 가죠.”

최근에 MBTI에 깊이 빠지게 됐다고 한다. 어떤 유형인지 궁금하실 분들이 있을까봐 말하자면, ENFP(재기발랄한 활동가)다. 이런 성격의 소유자들은 창의력이 높고 사교성도 좋지만 하는 일이 정리가 잘 안 될 경우가 많고 생각이 너무 많기도 하다. “이런 사람들이 꼭 관종인 건 아니지만 ‘요즘 어때? 그거 받았어? 내가 보낸 이메일 읽었어?’ 이런 식으로 약간 산만할 수는 있어요”라고 차 판매원을 흉내 내듯 익살스럽게 얘기한다. “저는 공감 능력이 굉장히 강해요. 항상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려고 노력을 많이 해요”라고 덧붙인다.

THE BEAD GOES ON
헤드 피스는 수잔 팡(Susan Fang). 드레스는 시몬 로샤(Simone Rocha). 비슷한 룩을 위해서 컬러팝의 ‘크렘 젤 칼러(Cr me Gel Colour) 아이라이너 엑시트(Exit)’를 사용해볼 것!

노라 럼, 그리고 아콰피나

ENFP이기 때문에 마치 이중인격처럼 성격이 두 개로 쪼개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름에서도 두 가지 상반된 성격이 드러난다. 아콰피나는 자신만만한 대담한 퍼포머지만 노라 럼은 소심하고 예민한 또 다른 자아를 보여준다. 스스로 평가하기에 자신의 성격은 정확하게 반으로 갈리는 것 같다고 한다. 그저 좋은 시간을 즐기고 싶은 외향적인 성격과 생각에 잠기는 내향적인 성격으로.

두 개의 자아는 얼굴에서도 나타난다. 2019년 <타임>이 선정한 ‘넥스트 100’ 명단에 이름을 올린 아콰피나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여배우 산드라 오에게 기자가 물었을 때 산드라 오는 “아름다우면서 멜랑콜리한 느낌을 풍기는 얼굴”을 가진 배우라고 칭찬했다. 이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제 표정이 굉장히 살아 있기는 해요. 저는 제 표정이 너무 풍부해서 가끔은 좀 덜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라고 대답한다. “제 신체 부위 중 가장 근육 활동이 활발한 부분은 얼굴인 것 같아요. 젊어 보이는 게 아니라 천진난만한 아이같이 보이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이 멜랑콜리하다고 한 것 아닐까요?”

분위기가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이러한 성격을 친구들은 사랑한다. “저랑 가장 친한 친구들은 제가 때에 따라 기분의 스위치를 켰다 껐다 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대요. 스위치를 끄면 이전의 그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죠.” 제 절친들은 ‘생각보다 넌 진중한 면이 있어. 가끔은 암울한 상태로 들어가거든’이라고 저를 설명할 것 같아요.”

몇 년 전, 아콰피나와 할머니는 즉흥적으로 함께 로드트립을 떠났다. 롱 아일랜드 고속도로를 타고 딕스 힐스와 하퍼지 지역을 지나 자신이 유년기를 보냈던 단출한 집까지 왔다. 할머니와 럼 모두 수년간 이 집을 다시 방문한 적이 없었다. “할머니랑 같이 한 여행이었는데 기분이 약간 이상했어요.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라스베이거스로 갈 수도 있었을 텐데”라며 생각에 잠긴 그는 그 여행이 자기 생애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였다고 말한다. “그냥 모든 걸 버리고 할머니와 단둘이 훌훌 떠나버릴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어떤 감정인지 이해가 가시나요?”

최근까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아빠와 할머니와 공유했다. 하지만 세계를 누비며 미국과는 시간대가 다른 장소에서 생활할 일이 많아져 예전만큼은 자주 연락을 못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주위에 늘 입바른 소리를 해주는 친구들이 있어 다행이라고 얘기한다. “더 많은 영화를 찍고 이 업계에서 일하면 할수록 항상 칭찬만 하는 예스맨들로 둘러싸이게 돼요.” 거짓말 탐지기처럼 예리한 촉을 가진 럼이지만 인기가 많아지고 주위에 따끔한 충고를 하는 사람이 없어지면 그의 예리한 촉도 무뎌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누구도 신뢰하기 어렵다. “따끔한 충고도 서슴지 않고 해주는 사람을 곁에 꼭 두어야 해요. ‘그 옷 최악이야. 당장 벗어’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요.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친구들에게 더 의지하게 되는 것 같아요.”

물론 아콰피나에게도 비밀은 있다. 유명해지면서 얻는 것이 많지만 잃는 것도 있다는 점을 알고 있기에 자신의 인기로 위태로워질 수 있는 사생활은 철저히 비공개로 하고 있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스타들이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연인 사진을 포스팅하고 레드카펫에 연인과 나란히 등장하는 경우도 많지만, 럼은 자신의 연애 생활은 철저히 비밀로 하고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말을 아끼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자 “어떤 부분은 제가 아주 공개적으로 세상에 내놓고 있죠. 약간은 부끄러울 정도로 저 자신에 대해 공개하는 부분도 있어요”라며 소리 내 웃었다. “하지만 이 업계에 발을 들이면서 저는 제 사생활 공개와 관련된 저만의 원칙을 세웠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싶거든요. 연기자가 되면서 제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지만 그래도 어느 특정 부분에서는 유명인이 되기 전의 평범한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요.”

인간관계는 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인생에서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순간을 물어보자 돌아온 대답은 상을 타거나 공연을 한 경험이 아니었다. “제가 인생에서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부분은 타인이 저에게 친절로 대하듯 저도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었다는 점이에요”라며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아직 저는 이 인기와 유명세가 믿기지 않아요. 아직 제가 완전히 소화하지는 못했어요.” 이제 그녀의 새로운 목표는 주위의 아시아계 친구들도 자신처럼 이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도록 물심양면 힘쓰는 것이다. 누구를 특히 눈여겨보고 있냐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첫 번째는 가수 오드리 누나, 두 번째론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서 호흡을 맞춘 배우 장멍, 세 번째는 오랫동안 자신의 대역을 맡아온 제시카와 마지막으로는 스턴트우먼 첼시 리다. “모두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끝내주게 멋진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들이고 우리가 하는 일에 중요해요.”

과거 인터뷰 기사들은 럼을 굉장히 검소한 인물로 묘사했지만,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기꺼이 플렉스를 하는 사람이라는 점은 간과했다. 친구들과 함께라면 노래방 비용으로 1천 달러의 거금을 내거나 고급 식당에서 음식을 대접하는 비용은 전혀 아깝지 않다.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감성적이기도 하다.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아끼는 보물은 금고에 고이 보관하고 있다. “엄마는 시력이 안 좋으셨어요. 그래서 알이 큰 안경을 쓰셨죠. 1990년대 유행하던 잠자리 안경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알이 큰 안경이 유행하기 시작했죠. 그러자 사람들이 저에게 렌즈를 바꿔 끼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기도 했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엄마가 이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저도 그렇게 하고 싶었거든요.”

검소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노인처럼 저렴한 물품을 오래 쓰는 습관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호주에서 열심히 촬영한 자신에게 때론 루이 비통 여행가방 같은 고가품을 선물하기도 한다. 이 명품 가방을 하나의 미술 작품 대하듯 아끼며 막상 잘 쓰게 되지 않는다고 얘기했다. “웃기게도 고가의 제품을 큰맘 먹고 샀는데 가방이 상하는 게 싫어서 막상 여행 갈 때는 평범한 샘소나이트 여행가방에만 손이 가더라고요.” 라메르 클렌징 폼도 가방과 비슷한 신세다. 막상 샀지만 보석처럼 장식용으로 화장실에 진열만 해놓고 잘 쓰지는 않는다고 한다(“공휴일 같은 특별한 날에만 쓸 것!”). 매일 사용하는 화장품은 좀 더 심플한 제품들인데, 몇 년 전 내가 팟캐스트에서 만나 알려준 스킨케어 루틴 덕에 자기 삶의 질이 올라갔다고 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스킨케어를 더 중요시하게 됐어요. 왜냐하면 이 루틴을 반복하면서 심적으로 안정감을 느낄 수 있거든요. 좀 더 정신이 차분해지는 것 같아요.”

인터뷰를 마칠 무렵이 되자 시계가 오후 4시 30분을 가리킨다. 줌으로 여러 번 나눠 진행한 인터뷰는 토요일이 마지막이었다. 작별 인사를 했다. 주말이기에 시내에 교통 체증이 상당할 것이지만 서둘러 촬영장으로 향해야 한다. 휴양지에서의 여유로운 휴식은 당분간 불가능할 것 같지만 하지만 할머니와 즉흥적으로 떠나는 로드트립은 언제든지 가능하니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 몇 년 전 하와이 여행을 떠올리며 “하와이에 도착해서 일 생각을 전혀 안 하고 폰도 확인하지 않았어요. 3일째가 되자 ‘내가 지금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피나 콜라다를 한 잔만 더 마시게 되면 폭발할 거야…’ ”라고 생각했다며 바쁜 지금이 좋다고 말한다. 그러곤 다시 촬영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