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비비는 거침이 없다. 전혀 다른 머리와 화장을 고쳐 입고 매일 새롭게 태어나듯 돌아와 인생을 노래한다.

 

레이스 톱과 레깅스는 투따우젼아카이브스(2000.Archives).

점심 무렵 시작한 촬영인데 훌쩍 자정에 가까워졌네요. 
컷마다 완전 다른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을 시도해볼 수 있어서 재미있었어요. 원래라면 더 즐길 수도 있는데 오늘은 마음의 여유가 좀 없었어요.

왜요? 
쭉 바빴거든요. 화보 촬영이나 라이브 영상도 많이 찍고 이것저것 뭐가 많았어요. 작업도 계속해야 하고요. 그게 제일 중요하니까. 해야 될 일들이 이만큼 있다는 걸 생각하니까 마냥 촬영을 즐길 여유가 없었어요. 걱정도 되고요.

불과 몇 개월 사이 부쩍 당신의 이름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걸 느껴요? 
그러게요. 요즘 많은 사람이 찾아주세요. 이제야 내 입지가, 내 자리가 조금씩 생기고 있다는 걸 느껴요. 좋죠. 너무 좋아요. 근데 좀 쉬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저 웃기죠? 벌써 그런 생각을 해요.(웃음) 원래 좀 한량 체질이라서.

타고난 기질에 비해 너무 열심히 사는 것 같아요? 
요즘은 진짜 그래요. 흐흐.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되게 많이 일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래요. 나 어울리지 않게 왜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지? 그런 생각 할 때 있어요. 뭔지 아시죠?

특유의 이 에너지는 뭘까요? 옆에서 막 느껴지는데. 
그래요? 저 그래 보여요?(웃음) 넘치는 끼가 있는 것 같긴 해요. 주체가 잘 안 돼요. 그게 제 무기인 것 같아요.

울산이 고향이죠? 울산이 배출한 스타는 많지만 자기만의 스타일을 갖춘 뮤지션은 윤수일 이후 오랜만이네요. 
진짜요? 근데 그분이 누구신데요?

그 유명한 ‘아파트’ 몰라요?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 
하하. 찾아서 들어봐야겠네요. 울산에서 태어나 거기서 10년을 살았어요. 그 후 10년은 창원에서 살았고요. 어른이 된 다음 4년 정도 의정부에 살았으니까 인생의 반은 울산에서, 나머지 반은 창원에서 살았다고 볼 수 있어요. 전부 제가 사랑하는 도시이긴 한데요. 아픈 기억들도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음, 확실히 그래요.

유년 시절과 사춘기를 보낸 곳이라서 그럴까요? 그때를 생각하면 여러 마음과 감정이 동시에 들기 마련이잖아요.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어릴 때요. 저는 좀 외톨이였던 것 같아요. 더는 외톨이가 아니게 됐을 땐 제가 사람들을, 세상을 등지고 살았어요. 그래서 늘 외로웠던 것 같아요. 좋은 기억도 있어요. 울산에 가면 학성공원이라고 있거든요. 봄이 오면 벚꽃이 아주 흐드러지게 피는 곳이에요.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우리 할머니가 시인인데요. 할머니랑 손잡고 꽃구경도 하고 시도 쓰고 했던 기억이 나요. 할머니 말로는 거기서 처음 할아버지를 만났대요. 그 순간이 유난히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플라워 프린트의 미니 드레스는 가니(Ganni).

경상도 말씨가 막 튀어나오는데 듣기 좋네요. 당신의 음악이나 비주얼만 보고 아주 센 사람일 거로 예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이고요. 화장을 싹 지운 채 이렇게 있어서 그런가. 
많이들 그렇게 생각하시더라고요. 저 되게 셀 것 같다고요. 근데 자아가 없는 사람인 것 같아요. 저는.

아무리 그래도 ‘자아가 없는 사람인 것 같다’는 고백은 좀 갑작스러운데요? 
저는 정말 이렇다 저렇다 할 자아가 없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런 옷 저런 옷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다 입어보는 거거든요. 어쩌면 그렇게 다른 걸 마구 입고 나서는 게 제 정체성이 아닐까 생각해요. 잘 모르겠어요. 저는 약간 새 신발, 새 옷을 걸치면 새 사람이 된 것 같거든요? 오늘도 그래요. 되게 다양한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을 하고 다른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그냥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랬어요.

낯선 것에 대한 거부감이나 불편함이 없어요? 
지금까지는 그래요. 덕분에 하나의 장르에 국한하지 않고 여러 음악이나 이미지를 시도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얼마 전에 나온 EP 앨범 <인생은 나쁜X>의 앨범 소개에 나와 주위 모두를 기쁘게 혹은 초라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 구구절절 써 내려갔다고 적었죠. 스물넷 비비, 김형서는 인생을 어떻게 봐요? 
결국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우리 다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하잖아요. 조금 바보 같아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나치게 강한 신념이나 마음으로 너무 많은 고민을 하면 막상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하기 싫을 것 같아요. 인생 그냥 좀 단순하게 사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원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전에는 막 파고들었어요. 너무 많이 파면서 살았어요. 어떤 본질이나 이유에 대해서 전부 다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직성이 풀렸어요.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하고 생각하는지, 왜 나와 다른지 그 이유를 꼭 밝혀내야 했는데 지금은 그러려니 하고 말아요. 다들 나름의 이유가 있겠죠.

앨범 수록곡 ‘Um m…Life’ 뮤직비디오가 인상적이더군요. 목이 잘린 당신의 얼굴은 노래를 부르고 비비의 음악적 재능을 맨 처음 알아봤다는 윤미래가 그걸 가만히 품고 있어요. 
논란이 되기도 했고 욕을 먹기도 했어요. 속상했고요. 욕을 먹을 줄은 몰랐어요. 저는 폭력을 미화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폭력뿐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해서도 그래요. 눈 가리고 아웅할 마음도 없고요. 세상에는 아직 폭력을 비롯해서 많은 부정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존재하는 걸 말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요? 저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말하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아티스트로서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걸 멈출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뭘 말하고 표현하고 싶었어요? 
제 인생에 존재하는 불안과 우울이요. 고통이요. 단지 그걸 표현하고 싶었던 거예요. 노래로 표현하는 것에 더해 시각적인 이미지로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단순히 자극적인 이미지로 폭력을 미화할 마음은 정말 없었어요.

그 영상을 보고 새삼 윤미래라는 존재를 다시 상기했어요. 실력 하나로 세상의 편견과 차별을 다 눌러버린 존재라는 거. 
미래 언니가 등장하면 어떤 울림이 있을 것 같았어요. 그분은 이미 음악으로 많은 사람을 위로한 뮤지션이니까요. 언니는 진짜 그런 사람이에요. 특별한 말을 하지도 않는데 존재 자체로 그냥 위로가 돼요. 머리에 있는 게 너무 무거워져서 몸이 무거워질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침대에 누워서 우는 것밖엔. 그럴 때 언니가 옆에만 있어도 다 괜찮아져요.

비비가 보는 윤미래는 어떤 사람인가요? 
천사 같은 사람이에요. 모든 걸 품는 사람이고요. 항상 긍정적인 파워로 이겨내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단단해요. 제가 감히 그렇게는 못 될 것 같아요. 저는 속이 넒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미래 언니는 동경의 대상이죠. 저랑 너무 반대인 사람인데 달라서 더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저는 오히려 회사 사장님인 타이거JK와 비슷한 편이에요. 여러 면에서 그래요.

윤미래와 타이거JK는 당신에게 어떤 조언을 해요? 
음악에 관한 가르침이나 조언은 거의 없어요. 아티스트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걸 강조하세요. 저는 너무 자주 무너지는 나약한 인간이라서요. 그런 부분을 많이 잡아주세요.

되게 뜬금없는 순간에 엄마가 되고 싶다는 말을 종종 하던데요. 이유가 있어요? 
강렬한 모성애라기보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있어요. 덜 힘들고 싶다는 생각이요.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대상이 있으면 그럴 것 같거든요. 완벽한 내 편이 되어줄 딱 한 명. 그럼 덜 힘들 것 같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조건 없는 사랑이 가능한 유일한 대상은 아이뿐이더라고요.

당신의 말이든, 비주얼이든, 가사를 포함한 태도를 대하면서 어쩌면 순백의 도화지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티를 내고 흠을 내고 싶어요? 
좀 그래요. 제 가사가 유난히 그렇죠. 가사는 숨길 수가 없어요.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인간이 죽지 않고 살려면 배출을 해야 되잖아요. 그걸 좀 고약하게 보여주고 싶은 성미가 있어요. 그런 면 때문에 제 인생을 제가 망치기도 한 것 같고요. 아티스트로 살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이 일 안 했으면 저 정말 추잡하게 살았을 거예요.(웃음)

비비는 ‘날것 같다’라는 말은 어때요? 
시스템 안의 아이돌에 비하면 확실히 날것 같은 면이 있죠. 처음엔 진짜 그랬어요. 근데 이 일을 하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옷을 입게 되더라고요. 무서울 때가 있어요. 내가 다치는 거요. 사랑받고 싶은데 막상 욕 먹으면 아프더라고요. 지금은 상처 위에 계속해서 옷을 입는 중인 것 같아요. 글쎄, 요즘은 완전 날것 같진 않은 것 같아요.

6월 17일에 개봉하는 <여고괴담 여섯 번째 이야기: 모교>를 통해 배우로서의 모습도 선보이게 됐죠. 어때요? 
무조건 하고 싶었어요. <여고괴담> 시리즈에 출연하면 잘된다는 속설이 있잖아요.(웃음) 나도 잘되고 싶으니까. 현장 분위기도 좋았고, 연기도 재미있더라고요. 잘하진 못했지만.

내일모레가 언론 시사회네요. 큰 스크린에서 자기 얼굴을 마주하면 어떨 것 같아요? 
좋을 것 같아요. 공포영화긴 하지만 제가 현장에 있었으니까 영화를 봐도 무섭진 않을 것 같고요. 저는 내가 누구인지 자꾸만 잊어버리는 사람인데 그렇게 큰 스크린에서 제 얼굴을 보면 진짜 나와 마주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아요. 그 순간이 참 좋을 것 같아요.

밤이 늦었는데 또 어디를 가야 하나 봐요? 
합주가 있어요. 요즘엔 바쁘니까 항상 이렇게 밤늦게 모여서 연습을 해요. 생각보다 촬영이 늦어져서 다 저를 기다리고 있대요. 그래서 지금 마음이 급해요.

유튜브에 올라온 라이브 영상을 보니까 세션을 딱 짜서 제대로 된 라이브를 하더군요. 꿈이 있어요?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하는 거요. 진짜 제대로 딱. 저 사실 요즘 무슨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것 같거든요. 슬럼프예요. 아니다. 정확히 인지하게 됐어요. 나는 음악적으로 천재는 아니라는 걸요. 처음엔 좀 짜증이 나더라고요. 그 사실을 인정하기도 싫고. 근데 어쩌겠어요. 내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노력해야 나아갈 수 있잖아요.

욕심이 나요? 
항상. 가진 게 없어서 그래요. 저 진짜 음악을 잘하고 싶어요.

당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건 뭐예요? 
이거 좀 웃긴데요. 모순적이기도 하고요. 예쁜 화장이요. 예쁘고 화려한 화장을 하고 거울을 보면 초라해져요. 제대로 잘하는 거 하나 없는데 예쁜 화장하고 예쁜 척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스트라이퍼 퍼 재킷과 이너로 입은 보디슈트, 니트 레깅스 톱과 팬츠는 모두 릭 오웬스(Rick Owens).

요즘 확실히 가라앉아 있는 그런 기간인가 보네요.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스트레스 받는 사람이 있고 자기 자신에게 스트레스 받는 사람이 있잖아요. 저는 후자예요. 제 안에 있는 우울이 저를 갉아먹을 때가 많아요. 항상 괴롭혀요. 나는 왜 이렇게 병신 같지. 그런 생각밖에 안 들고. 요즘 좀 그래요.

그 이유를 더 묻지는 않을게요. 괜한 위로도 건네지 않을 생각이고요. 
네. 제가 해결해야죠. 근데 이제 벗어날 거예요. 진짜.

그러고 나선 뭘 하고 싶어요? 
그동안은 이기적인 태도로 음악을 해왔던 것 같아요. 나 좋자고 하는 음악, 나를 표현하려는 음악, 나를 찾고자 하는 음악이요. 이제 듣는 사람들을 생각하려고요.

그 변화는 무엇을 위한 걸까요? 
제 직업을 위해서요. 사람들에게 더 다가가고 싶어요. 더 잘되고 싶고요. 그 결과 제 지갑이 빵빵해지면 좋겠어요. 저희 회사에도 도움이 되고 싶고요.

그거 알아요? 직업을 가지면 사는 게 그럭저럭 괜찮아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런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어딘가에서 쓸모가 있다는 건 되게 좋은 동기부여가 되는 것 같아요. 내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하나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거잖아요. 생각해보면 저는 늘 죽고 싶었는데요. 이제 살고 싶어졌어요. 음악으로 사람들을 달래고 위로해야죠. 그게 제 직업이니까요.

저기서 회사 관계자가 아주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네요. 이제 진짜 끝입니다. 
모자란 거 있으면 전화 주세요. 진짜 일하러 가야 돼요. 노래하러.

* 전체 화보는 <얼루어 코리아> 7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