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도시에 살다

작가들은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며 글을 쓴다. 그들의 도시는 작가의 펜 끝에서 되살아나 책장 속에 영원히 박제된다. 작가가 사랑한 도시의 흔적을 책 속에서 찾았다. 그 흔적들이 여행을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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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하 이
장 아 이 링

<색계>, <반생연>, <경성지련>으로 유명한 중국 소설가 장아이링은 대표적인 ‘상하이 사람’이었다. 3세에 당나라 시를 암기하고 7세에 첫 소설을 쓴 그녀는 당대의 천재였지만 시대를 앞서간 여성들이 그렇듯 쉽지 않은 삶을 살면서도 상하이를 사랑했다. 1943년에 쓴 수필 ‘역시 상하이 사람이다’에서는 상하이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데, 그녀가 말한 상하이 사람의 특징은 ‘트여 있음’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오직 상하이 사람들만이 내 문장이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나는 상하이 사람들을 좋아한다. 나는 상하이 사람들이 내 책을 좋아해주기를 희망한다.’

작가의 기록
난 도시의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나보다 더 문학적인 사람들은 베갯머리에서 소나무 소리와 파도 소리를 듣는다고 하는데, 난 전차 소리를 들어야지만 잠을 잘 수 있다. 오랫동안 도시에서 산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본 후에야 그가 도시와 떨어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중략) 차 안의 등은 눈처럼 밝다. 퇴근하는 전차 승무원들을 상대하는 행상들은 느리고 긴 목소리로 빵을 판다. 때로는 모든 전차가 기지창으로 들어가고 한 대만 남아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 모습이 비밀 속에 버림받은 듯 길거리에 멈춰 있다.
– <장애령 산문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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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욕 
폴 오 스 터

태생부터 뉴요커였을 것 같은 폴 오스터는 사실 뉴저지 출신이다. 이후 뉴욕에 거주하며 작품 대부분의 배경으로 뉴욕이 등장한다. 탐정 소설 형식을 차용해 거대한 도시를 배경으로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뉴욕 3부작>은 그의 대표 작품 중 하나. 생활고에 시달리던 무명 작가 시절의 이야기는 <빵 굽는 타자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작가의 기록
“내 일은 아주 간단한 거요. 내가 뉴욕으로 온 것은 여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절망적인 곳이기 때문이지. 어디를 둘러봐도 파괴와 혼란뿐이오. 눈을 뜨기만 하면 그게 다 보일 거요. 망가진 사람들, 망가진 물건들, 망가진 생각들… 온 도시가 쓰레기 더미요. 내 목적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한 곳이지만 말이오. 길거리에서 나는 물건들의 끝없는 공급원, 부서진 것들의 무진장한 창고를 찾아냈소. 그래서 날마다 가방을 들고 나와 조사할 가치가 있어 보이는 물건들을 수집하는 것이고 말이오. 내가 수집한 표본은 이제 수백 가지가 넘소. 쪼개지고 깨진 것, 움푹 파이고 으스러진 것. 산산조각이 나고 썩어 문드러진 것에 이르기까지.”
– <뉴욕 3부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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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콩 
찬 호 께 이

홍콩에서 태어나고 자란 찬호께이는 현재 홍콩 및 아시아를 대표하는 추리 작가다. 홍콩 중문대학 컴퓨터과학과를 졸업한 뒤 재미 삼아 타이완추리작가협회 공모전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전업 작가가 되었다. 전공을 반영하듯 ‘스마트폰 시대’에 따른 미스터리를 쓰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홍콩의 사회와 문화는 물론 작품마다 실제 지역과 거리가 등장해 사실성을 높인다. <망내인>에서는 사이잉푼의 작은 완탕 가게가 비중 있게 등장하고, 대표작인 <13.67>에서는 반환을 둘러싼 혼란스러운 사회상과 곳곳의 지역성이 주요 모티브가 되는 식. 특히 <13.67>은 홍콩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말해주는 작품이다.

작가의 기록
네 병의 하수관 용해제가 오전 10시 5분에 오래된 건물 옥상에서 던져졌고, 그레이엄가와 웰링턴가 일대의 노천 상점 위로 뿌려졌다. 그레이엄가 시장은 홍콩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노천시장으로, 신선한 식재료와 생활잡화 등을 파는 가게가 몰려 있다. 부근의 주택지에서 많이 찾는 시장이자 잘 알려진 관광 명소이기도 했다. (중략) 경찰은 그레이엄가와 웰링턴가를 각각 30미터씩 봉쇄하고 있었다. 현장에는 증거 수집과 기록을 맡은 경찰관 외에 정적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뒤집힌 노점 판매대, 거리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사탕, 사람들 발에 밟혀 엉망이 된 채소들, 그리고 부식액에 시커멓게 타 들어간 도로까지. 샤오밍은 몇 시간 전 혼란에 빠진 거리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 <13.67>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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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찌 민 
마 르 그 리 트 뒤 라 스

유럽인에게 당시 식민지였던 아시아는 기회의 땅이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베트남의 농장 주인을 꿈꾼 어머니를 따라 베트남으로 이주하지만 어머니가 산 토지는 쓸모 없는 땅이었다. 호찌민의 기숙 학교를 다니던 작가는 파리에서 유학한 부유한 중국인 남자를 만나며 ‘연인’이 된다. 뒤라스는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이 <연인>으로 프랑스 콩쿠르 상을 수상했다. 작품에는 옛 명칭인 ‘사이공’으로 등장한다. 이제 호찌민은 소설 속에 묘사된 옛 모습을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메콩 강을 제외하면 마치 ‘사이공’이라는 이름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듯하다.

작가의 기록
창에는 유리가 끼워져 있지 않다. 대신 창호지 문에 블라인드가 드리워져 있다. 그 창호지 문 위에 거리의 햇빛 속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비친다. 그 군중은 항상 바쁜 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창호지 문 위에 비치는 그림자에는 블라인드 때문에 규칙적인 가로 줄무늬가 비친다. 나막신의 따각거리는 소리가 신경을 자극하고, 말소리들 역시 날카롭다. 중국어는 내가 항상 절망의 언어라고 생각하듯이 소리소리 지르며 말을 해야 하는 알 수 없는 이국의 언어이다.
– <연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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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던
찰 스 디 킨 스

포츠머스 출신인 디킨스는 런던의 구두약 공장에 취직하며 이 도시에 발을 들이게 된다. 산업화 시대 뒷면의 노동 환경, 빈곤과 같은 어둠을 직접 보고 경험했다. 이때 본 자본주의의 모순과 가난은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가 된다. 이후 변호사 사환, 속기사를 거쳐 기자가 된 디킨스는 틈틈이 쓴 단편과 <피크위크 클럽의 기록>, <올리버 트위스트>를 발표하며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고, 사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불면증에 시달렸던 기자 시절의 찰스 디킨스는 밤의 런던을 걷는 것을 좋아했다. 이 경험을 ‘비상업적 여행자’라는 이름으로 연재했는데, 당시 런던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국내에는 <찰스 디킨스의 밤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작가의 기록
파이 장사꾼의 마지막 화롯불과 함께 밤새 깨어 있던 사람들의 일상도 꺼져가면, 거리 모퉁이에서 가장 먼저 아침밥을 파는 노점의 화로에 불이 붙는다. … 그런 시각에 귀가하는 일이 런던에서 가장 비참한 일은 아니며, 런던에서 가장 형편없는 지역이라고 해서 집 없는 노숙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필요하면 어디에서 온갖 악과 불행을 찾을 수 있는지 잘 알게 되었다. 다만 그것들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서, 내가 노숙자처럼 수 킬로미터의 거리를 그것도 혼자서 외롭게 돌아다니지 않았으면 절대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찰스 디킨스의 밤 산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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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쿄 
히 구 치 이 치 요

히구치 이치요의 작품을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작가의 얼굴은 한 번쯤 봤을 법하다. 일본 5천 엔 지폐의 인물이 바로 그이기 때문. 도쿄에서 태어나 일본 근대 문학의 주요 작가로 손꼽히나, 14편의 단편만을 남기고 24세에 요절했다. 대표작인 <키 재기>는 10대의 미묘한 감정과 시각이 담겨 있는 작품으로, 연극으로도 유명하다. 글에 언급된 센조쿠 신사는 아사쿠사에 위치해 있으며 신사 내에 작가의 동상이 있다.

작가의 기록
팔월 이십일은 센조쿠 신사의 축제인데 마을마다 축제 수레를 멋들어지게 꾸미고 둑에 올라가 유곽 안으로까지 들어가려는 기세라, 젊은이들의 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 주워듣는 것이 많아서 세상의 때가 묻은 탓으로 아이라고 해도 방심할 수 없는 동네인지라 유카타를 맞춰 입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서로 의논해서 못 봐줄 정도로 건방지게 치장한다. 하고 다니는 꼴을 들어보면 간이 떨어질 정도다. 골목파를 자처하는 난폭한 골목대장 초키치는 나이가 열여섯 살이다.
– <키 재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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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 탄 불 
오 르 한 웰 리 카 늑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작가로는 오르한 파묵이 떠오를 테지만 이번에는 시인을 만나보자. 오르한 파묵이 이스탄불의 있는 그대로를 심도 깊게 묘사한다면 오르한 웰리 카늑의 시는 이스탄불을 느끼게 한다. 이스탄불 출신의 이 시인은 터키의 민중 시인으로 손꼽힌다. 억압받는 민중의 삶과 그 고통을 그리면서도 긍정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는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주로 선보였다. 국내에는 <이스탄불을 듣는다>가 출간되어 있다.

작가의 기록
이스탄불을 듣는다 이스탄불을 듣는다, 두 눈을 감고서 아름다운 아가씨는 총총히 보도를 걸어가고 거친 외침과 노랫소리, 휘파람 소리 무언가 그녀의 손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마도 한 송이 장미 이스탄불을 듣는다, 두 눈을 감고서 이스탄불을 듣는다, 두 눈을 감고서 한 마리 새는 그대 치마 위에 파닥거리고 그대 이마의 따스함과 그대 입술의 촉촉함을 나는 안다 피스타치오 나무 뒤로 하얀 달은 떠오르고 나는 안다, 두근거리는 그대 가슴을 이스탄불을 듣는다, 두 눈을 감고서
– <이스탄불을 듣는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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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 스 터
허 수 경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시인은 1992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며 독일에 거주하게 된다. 뮌스터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십 몇 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거주했으며 마지막 숨을 거둔 곳 또한 뮌스터였다. 그 또한 시인의 의지였다.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에서 ‘붙잡힌 영혼이여, 몸이 무거운가, 왜 이곳에서 그곳으로 선뜻 움직이지 못하는가’라고 독백하면서도 도시를 떠나지 않았다. 시인의 작품 속에서는 도시가 잘 등장하지 않지만 ‘걸어본다’ 시리즈의 <너 없이 걸었다>에서 뮌스터라는 도시, 그곳의 사람들과 시간을 만날 수 있다.

작가의 기록
뮌스터 거리를 걷다가 지치면 벤치 한구석에 앉아 트라클의 시를 읽다가 문득 삶이란 어떤 순간에도 낯설고 무시무시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리. 그대들도 그러리라, 그대들의 도시에 살면서 존재는 시리고 비리리라. 마치 어시장의 고무 다라이 속에서 갑자기 어느 손에 잡혀 시장 바닥에 던져진 혼자인 작은 졸복 한 마리처럼.
– <너 없이 걸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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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리
어 니 스 트 헤 밍 웨 이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 작가인 헤밍웨이는 종군 기자 시절 특파원 자격으로 첫 부인과 함께 파리에 체류하게 된다. ‘잃어버린 세대’라는 이름은 당시 문화계의 후원자였던 거트루드 스타인이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헤밍웨이는 7년간 파리에서 거주했으며, 청춘 시절에 파리에 사는 행운이 있다면 파리는 이동 축제일처럼 당신의 남은 일생 동안 어디를 가든 함께 머물 것이라고 극찬했다. 아래 언급한 뤽상부르 박물관은 헤밍웨이가 파리에 머물 당시 유명 인상주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작가의 기록
만일 내가 오후에 뤽상부르 공원을 가기 위해 늘 다른 길들을 지난다면 나는 여러 산책로를 걸을 수가 있을 것이고, 그러고 나서 대부분의 그림들이 이미 그 전에 루브르나 주트폼으로 옮겨져버린 뤽상부르 박물관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시카고의 미술학교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세잔, 마네, 모네의 작품들을, 그리고 또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보기 위해 그 박물관에 거의 매일 가다시피 했었다. 세잔의 그림들은 내가 내 작품들에 부여해주고자 하는 차원들을 얻기 위해서는 단순하고 진실된 문장을 쓰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걸 내게 깨닫게 해주었다. (중략) 그렇지만 뤽상부르에서 그림들을 감상할 만한 빛이 충분치 않던 날에는, 공원을 가로질러 플뢰리스가 27번지에 있는 거트루드 스타인의넓은 아파트에 들렀다.
– <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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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스 본 
페 소 아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몇 년 전부터 ‘페소아’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페소아의 시집과 저작물이 국내 번역되기 시작한 것. 페소아는 여러모로 이야깃거리가 많은 작가다. 죽은 후에야 수만 장의 원고가 발견되었다. 생전에는 여러 개의 필명을 썼다. 신기하게도 그때마다 문체도 달라졌고 실제 필체도 달려졌다. 마치 현대인이 인터넷 곳곳에 수많은 자신의 조각을 뿌려두듯 그렇게 글을 썼던 것이다. 1888년 리스본에서 태어난 그는 이후 가족과 떠났다가 1905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아예 리스본에 대한 원고를 남기기도 했는데, 그것이 <페소아의 리스본>이다. 페소아가 한 세기도 전에 다녀간 주요 건축물의 대부분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작가의 기록
눈부시게 아름다운 경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쭉 늘어선 일곱 언덕 위로, 들쭉날쭉 튀어나온 다채로운 건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리스본이라는 도시를 이룬다. 물길로 오는 여행자라면 아주 멀리서도, 햇살에 금빛으로 물드는 푸른 하늘 위로 떠오르는 또렷한 꿈속의 한 장면 같은 이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돔과 기념비와 고성들이 주택들 위로, 이 아름답고 축복받은 도시의 전망처럼 아스라이 늘어서 있다.
– <페소아의 리스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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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트 로 페
프 랑 수 아 즈 사 강

사강이 오늘날 태어났다면 ‘실검 1위’는 그의 차지였을 것이다. 어마어마하게 돈을 벌었고, 그 돈을 도박으로 탕진했다. 스피드, 약물 중독, 연애에 탐닉했고 동시에 파티광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생트로페는 그런 사강이 무엇보다 사랑한 도시다. 작가에게 부와 명성을 가져다준 작품 <슬픔이여, 안녕> 역시 생트로페에 휴가를 보내러 온 부녀를 다루고 있다. 사강은 이곳의 별장을 빌려 가족과 많은 친구와 시간을 보냈다. 그역시 평범한 여행자들처럼 점점 상업적인 휴가지로 변모하는 생트로페에 대한 아쉬움을 글로 남기기도 했다.

작가의 기록
나는 바르에 있는 생트로페라는 평화로운 작은 마을과 나 사이의 감정적 관계, 과거에 그랬고 지금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그 희비극에 대해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겠다. 그 마을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추억의 과대망상을, 광적인 쾌활함이나 광적인 우울함으로 인해, 다시 말해 그들의 감수성으로 인해 언제나 과거에 대한 강한 편집증을 불러일으키니 말이다. 생트로페는 몽상을, 부드럽거나 딱딱한 광기를, 세상의 다른 어느 곳도 촉발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즉각적으로 촉발시키는 곳이다. 그리고 여기에 나 자신의 희극이 있다.
–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중에서 

    에디터
    허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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