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를 묻다 <2>

모두가 서둘러 종이 시대의 종말을 말하고 있지만, 세상의 미디어들은 잡지를 닮으려 애쓴다. 잡지는 여전히 건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잡지를 읽는다. 우리는 왜 잡지를 읽을까?

잡지가 죽었다고 누가 말했나
잡지를 왜 읽는가. 잡지 창간도 몇 번 하고, 덩달아 폐간도 몇 번 한 사람으로서 진심 묻고 싶은 바다. 왜 잡지를 읽는가, 그리고 왜 잡지를 읽어야 하는가. 애당초 이게 지금 먹히는 얘기이기는 한 것인가. 아니, 인문학적 소양도 쌓고 글도 교양 있게 배울 거라면 단행본 읽으면 되고, 뭔가 있어 보이는 글쓰기를 단기 학습하려면 남의 트위터 글을 짜깁기하면 되는데, 왜 굳이 잡지를 읽어야 하냔 말이다. 그것도 잡지가 ‘읽는’ 것이 아닌 ‘보는’ 것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물론 잡지가 신문과 또 다른 읽기(어쩌면 논술)의 표본이 되었던 (잡지의) 호시절도 있었다. 말도 안 되게 후진 사진(때론 겁도 없이 외국 잡지에서 스캔한 사진)을 갖다 붙여도 그저 기사가 정말 좋았다는 이유로 용서되던 시절. 글을 쓴 기자나 잡지를 만든 편집장의 이름값으로 잡지가 팔리고 읽히던 시절이 우리에겐 분명 있었다. 나 또한 누군가의 잡지 글이 좋아 기자를 꿈꿨고, 기자가 됐고, 어린 내가 그러했듯 누군가 내 글을 좋아하기를 바라며 정말 열심히, 열심히 글을 쓰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왜 요즘은 다들 잡지 환경이 바뀌었다고 말하나. 왜 잡지라는 게 읽지 않고 그림만 보는 매체가 됐다고 하나. 왜 잡지는 죽었다고 쉽게 말하나.
이유는 이렇다. 아예 잡지를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읽으려 들지도 않고 말만 내뱉기 때문이다. 잡지의 형태나 환경이 변했다 하나, 글이 병신춤을 춘다고 하나, 변하지 않고 또 변할 수 없는 게 그래도 있다. 그것은 좋은 잡지를 구성하는, 정말 잘 쓴 기사다.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이 많고 잡학다식하며 빠르게 흡수하는 감각에 글발도 갖췄고, 한 꼭지의 기사를 위해 백 가지의 자료를 들고파는 재능 더하기 노력파 기자의 글이라면 그 어떤 작가든 평론가든 학자든 뭐든 글에서만큼은 못 당한다. 아무리 패션이 전부인 잡지라 하더라도 결국 좋은 글을 쓰는, 화보 사진 캡션 한 줄이라도 남다르게 쓰는 기자가 있고, 읽히는 글이 있는 잡지가 좋은 잡지다. 그리고 이런 자존심을 버리지 않은 좋은 잡지가 아직 여기저기 ‘살아’ 있다.
얼마나 좋은가. 이 팍팍한 세상에 우울하거나 심심할 틈 없이 한 주, 한 달, 한 철만 견디면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있으니, 이런 저비용 고가치 여행은 없다.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767쪽짜리 ‘교양’을 완독하지 않아도 되게끔 길어야 두 쪽으로 교양을 딱딱 떠먹여주고, 시간 없어 미처 발견하지 못하거나 경험하지 못한 문화의 세계로 이끌며, 온라인 세상에만 탐닉하다가 손가락 관절염 걸릴 일도 없고, 무엇보다 읽기 또한 재미있는 행위라는 사실을 몸소 실천해 보여주니, 잡지만큼 매력적이고 편하고 영리한 읽기의 방법은 세상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잡지를 읽어야 한다. 계속. – 이현수(media2.0 편집장)

왜 우리는 잡지를 읽는가
잡지는 책이다. 읽는 것이다. 그래서 잡지를 흔히 ‘잡지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잡지는 일반적인 책과는 다르다. 잡지는 ‘책’이지만 ‘상품’이고, ‘읽을 것’이지만 동시에 ‘볼 것’이다. 태블릿 형태의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보는 것’으로서 잡지 기능은 더 강화되고 있다. 잡지를 읽으면서 사람들은 글자와 사진뿐 아니라 동영상으로도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읽고 보고 이제는 들을 수도 있다. 당대의 것을 반영해서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기에 적합하다. 잡지는 일반적인 책이 가지지 못하는 쾌락적 즐거움이 있다. 각각의 즐거움은 가벼울 수 있지만 총량은 압도적이다. 사람들은 좋은 책을 읽으면 좋은 사람이 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좋은 책을 발견하는 것도, 발견한 좋은 책을 읽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좋은 책을 발견하기 위해서 시행착오는 피할 수 없다. 많은 나쁜 책을 사야만 비로소 몇 개의 좋은 책을 건진다. 좋은 작가가 계속 좋은 책을 쓰기도 쉽지 않지만 설령 계속 좋은 책을 쓴다고 해도 많은 책을 쓰지는 못한다. 좋은 책은 좋은 문장이 모여서 된다. 좋은 잡지 역시 좋은 문장을 쏟아낸다. 잡지가 쏟아내는 좋은 문장의 유혹은 거부하기 어렵다. 책이 가지는 좋은 문장에는 맥락의 힘이 있지만 잡지가 가지는 좋은 문장에는 파닥거리는 생동감이 있다.
나는 ‘문자중독’이다. 문자중독이 있는 사람들은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자투리 시간에도 정보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안절부절못한다. 그들은 TV나 영화 같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이미지는 강렬하지만 정보의 양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자중독이 있는 자들은 대개 많은 책만큼이나 많은 잡지를 읽는다. 책은 많은 정보를 주기는 하지만 독자를 소외시킨다. 주장을 전달하려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편협해지기 때문이다. 잡지는 편협하지 않다. 잡지는 독자를 소외시키지 않는다. 좋은 잡지는 독자를 가르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잡지의 독자는 소외되지 않을 뿐 아니라 정보를 통해 세상과 연결된다.
독자를 가르치려 들기 때문에 책의 독자는 어쩔 수 없이 지루해진다. 누군가의 편견을 받아들이는 건, 설령 그것이 논리적이고 유용하다고 해도 피곤한 일이다. 좋은 잡지는 독자를 가르치는 대신 독자가 즐기게 만든다. 즐길 수 있는 독자는 스스로 배워나간다. 그래서 잡지를 받고 펼쳐 드는 순간에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신선한 쾌감이 있다. 교양인이 된다는 자부심보다는 생활인이 된다는 현장감이 있다. 다양한 정보의 흐름이 사진과 문장으로 쏟아지고 모험가처럼 그 사이를 헤쳐나간다. 옳고 그름과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적극적 판단과 나름의 해석이 내려진다. 내가 잡지에서 가장 좋아하는 페이지는 ‘인터뷰’다. 모든 인터뷰는 인터뷰를 하는 자의 자의식이 담겨 있다. 좋은 인터뷰일수록 상식적인 배려와 지적인 호기심으로 충만해 있다. 적극적이다 못해 공격적인 인터뷰에서는 인간의 실체와 본질이 드러난다. 심지어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인터뷰에서도 행간과 행간 사이에 다양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래서 아무런 본질도 메시지도 없는 인터뷰를 싫어하고, 그런 인터뷰가 계속되면 그 잡지를 멀리한다. 바꿔 말하면, 좋은 인터뷰가 있는 잡지라면 어떤 형태의 매체로도 대체불가다.
잡지의 가격은 터무니없이 싸다. 만드는 비용보다 파는 가격이 훨씬 낮을 수 있는 건 ‘광고’ 때문이다. 인기가 많은 잡지일수록 잡지 판매로 생기는 수입은 광고 매출로 생기는 수입보다 터무니없이 적다. 그런 잡지를 살수록 독자는 이익이다. 하지만 거기에도 ‘함정’이 있다. 그 함정에 빠진 독자는 잡지 가격보다 훨씬 많은 돈을 쇼핑에 써야 한다. 그래서 모든 잡지에는 독자가 알아서 피해야 하는 ‘상업적 지뢰밭’이 있다. 문제는 그 지뢰들조차 아주 유용한 정보이자 즐거운 쾌락이란 것이다. 잡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이유다. – 김동조(트레이더,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의 저자)

잡지는 허영의 불꽃인가
그 사람은 아주 먼 옛날의 영화 제목을 인용해 말했다. “잡지는 허영의 불꽃이 아닌가 싶어.” 이루지 못할 영화, 갖지 못할 겉치레를 대신해주는 매체, 그것이 잡지의 존재 가치라는 뜻이었다. 딴에는 객관적이랍시고 지껄인 듯하지만 행간에 잡지를 향한 야멸찬 속내가 담겨 있음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자랑은 아니지만, 평소 가슴속에 열등감을 완전군장으로 꾸려놓고 있는 터라 누군가 조금이라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가르치려 들거나 턱도 없는 선입견으로 내 주위의 것들을 우습게 보면 나는 두고 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다. 모르는 소리 말라고. 잡지의 세계가 얼마나 깊고 넓은데 그따위 망발을 일삼느냐고.
직업이 직업이라 평소 잡지를 두루 자주 읽는다. 언제 읽느냐? 밤에 읽는다. 그럴 때가 있다. 작은 소리가 크게 들리는 밤, 어딘지 모르게 심심해서 끼니때도 아닌데 먹을거리가 당기고 거기에 맥주라도 한 모금 필요해지는 밤, 그래도 혼자 먹고 마시려니 왠지 궁상맞게 느껴지는 동시에 ‘알코올중독도 아닌데’ 해지는 밤, 그래서 그 모든 작업을 함께 해줄 친구가 절실해지는 밤, 그런데 없는 밤.
이것은, 단호히 말하는데, 내가 친구들에게 버림받은 몹시 불쌍한 처지라는 고백이 아니다. 또 한 번 자랑은 아니지만 나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남자에게건 여자에게건 아주 사랑받는 매력덩어리다. 노래 가사 속에 나오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닐까 느껴질 때도 많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매일 곁에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에게는 가정이 있으니까. 나에게는 가정이 없으니까.
얘기하다 보니 원인을 알 수 없는 쓸쓸함으로 사무치기는 하는데, 아무튼 주장하고 싶은 것은 그럴 때 잡지를 읽는다는 것이다. 잡지는 이를 테면 말벗인 셈이다. 그들은 내게 말을 건다. 그 말 속에는 물론 허영기의 대리 만족도 있다. “내가 쿠바 아바나에 가봤는데 말이지, 벌레 든 모히토가 어찌나 끝내주는지, 언제 기회 닿으면 너도 한번 가봐, 그럴 기회가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하거나 “2억짜리 브레게 시계를 차봤는데 말씀이야, 어이구 젠장, 단추를 누르면 소리로 시각을 알려주더라니까, 언제 기회 닿으면 너도 한번 차봐, 그럴 기회는 살아생전 안 오겠지만” 하는 식일 것이다. 그것이 잡지의 꽤 큰 부분이라는 현실을 애써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 친구가 들려주는 그 말 속에는 다른 것도 많다. 정보도 있고 사연도 있고 웃음도 있다.
아직도 잊지 않는다. 어릴 때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읽었던 감동의 스토리.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내는 어려서부터 꿈이 소박했다. ‘집에 서재를 두는 것’이었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며 한 푼 두 푼 모아나가니 꿈이 금세라도 이뤄질 듯했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방이 필요해지며 한 발짝 후퇴, ‘투 잡’에 ‘스리 잡’을 덮어쓰며 고군분투한 끝에 다시 다가갔나 했더니 부모님이 앓아 누우셔서 다시 후퇴, 그분들이 세상을 떠나시니 이제는 아내가 아파서 후퇴, 후퇴, 후퇴…. 그는 죽기 직전에 꿈을 이뤘다. 그러고는 그 사연을 써서 잡지사로 보냈다. 마지막 문장이 이랬다. ‘살아서 꿈을 이뤘으니 나는 행복하다.’
이 지점에서 나는 흥분하게 된다. 봐라, 이래도 잡지가 허영이냐! 말년에 서재를 가져서 행복하다는 그 문장 어디에 불꽃이 이글거리냐? 어디 한 번 찾아보라니까!
나는 그분의 그 이야기처럼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를 바라면서 지금껏 글을 써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실은, 감동적일 것까지도 없다. ‘덕분에 시간 잘 때웠다’ 정도면 충분하다. 아주 구체적이고 솔직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나는 내 글이 ‘화장실에서 읽었더니 언제 볼일을 다 봤는지 몰라 닦을 타이밍을 놓쳤다’ 정도이길 바란다. 세상에 그럴 수 있는 게 어디 흔한가. – 김유준(칼럼니스트)

새로운 잡지의 탄생
<iiin> 제주 사람들이 만드는 제주 잡지 <iiin>은 1년에 네 번 발행하는 계간지다. 올봄 창간호를 내놓았고, 막 여름호가 나왔다. ‘제주에서 놀멍 살멍, 살아보는 여행’을 다루는 이 잡지는 100% 한라봉으로 만든 주스처럼 진짜 제주의 속살을 담았다. 사진가 김형호와 여행작가 고선영, 편집자 하민주와 레이지박스를 운영하는 이재하 부부, 디자이너 김은주가 ‘놀멍 살멍’ 만든다. 책장을 열면 제주의 초록과 바다내음이 넘실댄다.
<다큐멘텀> 커버에 사진 한 장 없는 건, 호방하면서도 정교하게 느껴진다. 궁금하면 사서 안을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 <다큐멘텀>은 용감하게 창간한 건축 전문지. 건축 사진가 김용관의 건축 전문 출판사 아키라이프가 발행한다. 인테리어 잡지처럼
아기자기한 보여주기 대신, 기록으로서의 건축을 강조한다. 소수의 프로젝트를 넉넉하고 끈기 있게 다루고, 각 건축사무소의 현재진행형 프로젝트를 꼼꼼히 소개하는 건축을 위한 ‘다큐멘터리’ 잡지다.
<그래픽 노블> 아무 페이지나 펴라. 그곳에 당신의 인생을 흔들어버릴 그래픽 노블이 있다. <그래픽 노블>은 마치 선언처럼 창간했다. 매달 작품 하나를 깊게 들여다볼 계획이라고 하지만, 창간호만큼은 50개의 작품을 소개했다. 누군가에게는 쉽게 즐길 수 있는 만화이며,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뒤흔드는 감동인 <그래픽 노블>. 어느 쪽이든 즐겁게 볼 수 있는 전문 매거진이다.
<퀴어인문잡지 삐라> 제호에서 단호하게 명시했듯, 잡지가 다루는 건 두 가지다. 인문학 그리고 퀴어 문화다. 독립 출판사 노트윈비트윈은 창간호를 2012년에 발행했지만 2호는 올여름에야 비로소 볼 수 있었다. 부정기간행물이라고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린 것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발행한 잡지는 그 어떤 간행물에서도 보기 힘든 통찰과 지식이 가득하다. 2호의 주제는 ‘죽음’이다.

    에디터
    피처 에디터 / 허윤선
    포토그래퍼
    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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