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의 자화상
남자와 소년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자유롭게 부유하는, 성장통을 겪는 어느 날 무참히 부서진다 해도 툭툭 털고 일어나 크게 한번 웃으며 모두 없던 일로 만들어버릴 것 같은 여진구가 지금 여기에 있다.
여진구는 말이 없었다. 스태프들이 던지는 이야기에 가끔씩 웃었고 한마디씩 거들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바뀌는 옷과 머리 스타일에 좋다, 싫다는 내색이 없었다. 촬영을 위해 카메라 앞에 섰을 때, 그는 단단하고 다부진 몸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긴 두 눈을 감으며 나른하게 고개를 돌렸고 춥다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조명의 빛과 그림자, 공기의 밀도와 바람의 방향이 그를 중심으로 흩어지고 모이고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했다.<해를 품은 달>에서 여진구는 천진한 미소와 기묘한 눈, 명백한 얼굴로 모든 것을 다 가졌으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슬픈 왕을 연기했다. 짧은 시간 동안 여진구라는 이름을 각인시켰고 배우로서 존재감을 증명해 보였다. 그와 함께 울고 웃던 많은 사람이 그가 드라마를 떠나간 후에도 그가 남긴 대사처럼 여전히 그를 잊지 못했고, 그를 더 궁금해했다. 좀처럼 말이 없고 조심스럽던 촬영 때와는 달리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은 그는 영락없는 열여섯이다. 별것 아닌 이야기에 소리 내어 깔깔 웃었고 코타로 오시오의 ‘황혼’을 이야기할 때는 앞으로 쏟아질듯이 몸을 기울여 기타 치는 손을 만들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 듯한 표정을 하고서 말이다. “또래의 배우들, 그러니까 꽃미남으로 분류되는 그들과 ‘다른 어떤 것’이 있어요. 그게 뭔지 알아요?”라고 묻자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때의 얼굴마저 ‘다른 어떤 것’이었다는 걸 그는 알기나 하는 걸까. 남자와 소년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자유롭게 부유하는, 성장통을 겪는 어느 날 무참히 부서진다 해도 툭툭 털고 일어나 크게 한번 웃으며 모두 없던 일로 만들어버릴 것 같은 여진구가 지금 여기에 있다. 아직 채 다듬어지지 않은, 그러나 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완전할 수 있는 열여섯의 여진구가.
네가지 화보 콘셉트 중에 뭐가 제일 맘에 들었어요?
다 좋았어요. 느낌이 다 다르니까요.
드라마 끝나고 인터뷰 많이 했죠? 기자들이 자꾸 비슷한 질문을 하는게 지겹진 않아요?
같은 질문을 하긴 하지만 지겨울 만큼 인터뷰를 많이 하진 않았어요.
유정은 진구보다 수현이 좋다던데, 그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요?
유정이 개인 취향이라 뭐라 말하긴 힘들지만 아마도 수현이 형이 안아줘서 그런 거 아닐까요?
세 명의 아역 배우 중에 누가 제일 좋은지 물어보라고 했어요.
얼굴형은 소현이가 예쁘고 성격은 지희가 좋고 유정이는 이목구비가 예뻐서 세 명을 섞으면 좋을 것 같아요. 한 명만 꼽는 건 너무 어려워요.
이래서 유정이 수현을 더 좋아하는 거예요. 말이 나왔으니 이상형을 안 물어볼 수 없네요.
귀여우면서 웃을 때 예쁜 사람. 제가 눈이 작아서인지 주위에서 눈 큰 여자와 잘 어울린다고 하더라고요.
연상도 괜찮다고 말해줄 거예요?
하하. 연상도 정말 괜찮아요. 대신 내가 밥을 사주고 뭔가를 선물해줘도 상대방이 죄책감이 들지 않을 정도의 나이 차이여야 할 것 같아요.
많은 누나가 그 부분에서 탈락할 것 같네요. 눈빛이 좋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죠?
<해를 품은 달> 촬영할 때 감독님도 그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이훤의 그것도 좋았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더 그렇네요. 이훤은 역시 잊을 수 없는 캐릭터였죠?
워낙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랑스러운 인물이라, 대본을 처음 읽었을 때부터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 말로 ‘볼매’라고 하잖아요. 이 캐릭터가 가진 볼매를 어떻게 살려야 하나 고민하다가 연우와 형선, 다른 사람들 앞에서의 모습을 다 다르게,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일 수 있게 노력했어요.
마음먹은 것처럼 잘되던가요? 그렇지 않을 때는 어떻게 했나요?
감독님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감독님은 전체를 지휘하고 누구 보다도 작품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하시는 분이니까요.
감독님이 어떤 조언을 해주던가요?
“내 생각은 이런데 너의 생각은 어떠니” 하고 제 생각을 많이 물어보셨어요. “너의 스타일과 혼을 보여주자”라고도 말씀하셨어요. 의견을 존중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하고 부담을 많이 느꼈어요. 촬영하면서도 ‘내가 잘하고 있는 거 맞나’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걱정과는 달리 잘해냈어요.
기대한 것보다 시청률이 잘 나오고 반응이 좋아서 처음에는 좀 어리둥절 했어요. 기계의 오작동이거나 잘못 조사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다행히 아니었죠.
아역 방송분에 대한 반응이 대단했죠. 특히 훤과 연우의 장면은 그림처럼 예뻤어요.
가면을 벗고 대사를 하던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감독님이 이제까지 제가 촬영한 장면은 이 장면을 위해 존재한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장면을 위해 연우를 만나고 이 장면을 위해 아버지와 싸웠고 울고 웃었으니 준비한 모든 걸 쏟아 부으라고요.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더라고요. 감독님이 제 표정을 읽었나봐요. “내가 더 쉽게 얘기 해줄게. 이건 완벽한 이벤트니까 누구든 너한테 빠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연기를 해봐”라고 하셨어요. 훤의 애틋한 마음을 담아서 대사를 치고 문득 한번 웃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웃었더니 감독님이 “너 이거 나가면 누나들은 다 니꺼야”라고 말씀하셨죠.
정말 그렇게 되었네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감정을 연기하는 건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런 감정에 익숙하지 않아서 사실 처음에는 좀 창피하기도 했어요. 감독님이 할마마마나 아버지 앞에서의 연기는 괜찮다고 하시는데 연우나 형선 앞에서의 연기는 좀 어색하다 하셨어요. 형선과는 코미디고 연우랑은 로맨스인데 역시 코미디와 로맨스는 어려운 것 같아요.
아픈 연우가 쫓겨날 때 너무 서럽게 울었잖아요. 정말 연우를 생각했던 거예요?
어렸을 때는 대본을 보기보단 다른 상상을 했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도 해보고요. 그런데 이번 작품만큼은 대본을 보고 훤과 연우의 감정에 빠졌어요. 대사를 하다 보면 기쁘고 슬픈 감정이 나도 모르게 불쑥 올라왔어요. 그 장면은 혼자서 대본 연습을 하면서도 울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슬퍼요.
배우는 물론 스태프들도 고생이 많았을 것 같아요.
저는 왕이라 그나마 세트 촬영이 많았는데 연우랑 다른 배우들은 야외 촬영이 많아서 엄청 고생했어요. 스케줄 노트에 스태프분들은 ‘52박 53일’ 짐 싸서 오라고 적혀 있었어요. 쉬는 시간에는 세트 이쪽저쪽에서 주무시
고 계시고요. 그런 거 보면서 이분들에게 보답하는 방법은 열심히 하는 것밖에 없겠구나 생각했어요.
어떤 부분에서 연기를 계속하고 싶은 거예요?
제 삶은 아니지만 진짜의 삶처럼 연기하는 거 잖아요.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볼 수 있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인 것 같아요.
오늘 개학했죠? 학교가 떠들썩했겠어요.
원래 안 그랬는데 오랜만에 학교에 갔더니 애들이 저를 연예인으로 보더라고요. 사인해달라는 친구도 있었고요. 좀 부끄러웠어요.
부모님은 어떤 말을 해주던가요?
좋아도 내색을 잘 안 하세요. 다른 분들이 잘했다 칭찬할 때 부모님은 잘 못한 부분에 대해 지적하시는 편인데 그게 연기에 많은 도움이 돼요.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실수가 많으니까요.
조금은 비뚤어져도 될 것 같은데 너무 바른 생활 소년인것 같아요.
애어른 같다는 말을 많이 듣긴해요. 부모님이 어렸을 때부터 엄하게 키우셨어요. 제가 이쪽 일을 하니까 일부러 더 그렇게 하신 것 같아요. 버르장머리 없게 말을 한다거나 잘못을 하면 바로 회초리를 드셨어요. 더 조심
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려고 노력해요.
전교 50등 안에 드는 엄친아라고 들었어요.
예전에는 전교 50등 하면 잘하는 거였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반 학생수가 30명 정도로 엄청 줄었거든요. 시험을 잘 보겠다는 다짐과 삼일 밤 정도만 새우면 받을 수 있는 성적이에요.
공부도 공부지만 운동 신경이 남다를 것 같아요.
체육만큼은 항상 전교 1등입니다. 하하. 특히 축구랑 수영을 좋아해요.
이제야 좀 16살 같네요. 또 뭐가 재미있어요?
기타를 치고 있어요. 요즘 좀 열심히 했더니 손에 굳은 살이 박혔어요. 독학하고 있는데 코드 잡아서 치는 거 말고 핑거 스타일로 연주하는 걸 연습하고 있어요.
그걸 혼자서 하고 있다고요?
기타 카페에 가입했는데 거기 악보랑 연주법이 자세하게 잘 나와 있더라고요. 물어보면 잘 알려주기도 하고요.
가장 먼저 마스터하고 싶은 곡은 뭐예요?
코타로 오시오의 ‘황혼’이라는 곡을 정말 좋아해요. 그 곡을 듣고 처음으로 기타를 쳐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처음 마스터하는 곡으로는 난이도가 너무 높은 거 아녜요?
제가 여태까지 알고 있던 기타랑은 소리가 완전히 달랐어요. 기타 선율이 너무 아름다워서 푹 빠졌어요. 꼭 제대로 연주해보고 싶어요.
기타 연주곡을 좋아한다고 하니 음악적 취향도 궁금하네요.
감성적인 노래를 좋아해요. 가리지 않고 듣는 편인데 김동률 선배님 노래를 특히 좋아해요.
진구도 화날 때가 있겠죠?
자기 변명하는 걸 되게 싫어해요. 잘못을 했는데 인정 안 하고 변명할 때 화가 나요.
행복하게 하는 건 뭐예요?
잘 때 행복해요. 일찍 눈이 떠져서 더 잘 수 있을 때요. 축구 하다 골 넣었을 때도요. 1년에 한 번, 반 대항 축구를 하는데 그때 골 넣으면 정말 기분 좋죠. 작년에 두 골 넣었어요. 기분이 날아갈 거 같았어요.
축구까지 잘하다니. 진구를 흠모하는 이들로부터 익명의 문자가 많이 올 것 같아요.
몇 년 전까지는 휴대폰이 있었는데 거의 게임만 하니까 없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없앴어요. 3개월 동안은 답답했는데 이제는 편안해졌어요. 친구들과 약속 시간도 잘 지키게 되고 좀 더 부지런해진 것 같아요.
미성년자를 벗어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건 뭐예요?
친구들과 배낭여행 가고 싶어요. 운전 면허 따서 산 지 얼마 안 된 자동차를 몰면서 여행하고 싶어요. 유럽 여행도 가고 싶어요. 유럽 여행만큼은 혼자서 가고 싶어요.
배우 말고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면요?
운동 선수가 되고 싶어요. 수영 선수나 축구 선수요. 악기를 다루는 뮤지션도 욕심이 나고 천문학을 연구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변호사나 의사 같은 건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로또에 당첨된다면 뭐 하고 싶어요?
저축을 해두었다가 어른이 되면 부모님 집을 사드리고, 남은 돈은 기부할 것 같아요.
동생에게는 어떤 형이에요?
다섯 살 차이 나는데 장난도 많이 치고 같이 놀고 그래요. 아무래도 다섯 살 터울이면 형이 무서워질 수도 있잖아요. 형제끼리 그러는 게 싫어서 친구 같은 형이 되려고 노력해요. 사실 동생한테 미안한 게 많아요. 어렸
을 때부터 연기를 하는 바람에 엄마가 저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래서인지 외로움을 많이 타요. 제가 더 잘해주고 챙겨줘야죠.
진구에게는 참 다양한 모습이 있네요. 또 어떤 진구가 있나요?
친구들이랑 있을 때는 완전 말썽꾸러기예요. 까불고 놀리는 것도 좋아하고요. 제일 좋아하는 건 친구들 모아서 ‘몰래카메라’ 하는 거예요. 친구들 속이는 건 끊을 수가 없어요. 되게 신나요. 그러다가 한번은 저도 된통 당
했어요. 남자 애들한테는 장난도 많이 치고 하는데 여자 애들한테는 좀 어려워요. 남자보다 약하고 작아서인지 뭔가 지켜줘야 할 것 같기도 하고요.
아, 역시 치명적이네요.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팬분들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응원해주시는 글을 보면 힘이 나요. 트위터 멘션도 다 보고 있어요. 사람들이 정말 다 보는 거 맞냐고 궁금해하는데 다 보고 있어요. 답변은 못 드리지만요.
어떤 배우가 되고 싶어요?
유명한 배우보다는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저를 잘 모르더라도 제 연기를 본 사람들이 ‘저 역할은 여진구가 해야 돼’ 하는 생각이 드는 그런 배우 말이에요.
유명하기도 하고 연기도 잘하는 그런 배우가 되면 되겠네요.
하하. 그럼 제일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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