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시작한 드라마가 완연한 여름이 되어 끝을 예고한다. 계절은 시리다가 다시 뜨거워지지만 한예리의 시간은 늘 고요하다. 자기 자신과 대화할 줄 아는 사람만큼 매혹적인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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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는 쿠메(Kume). 반지는 헤이(Hei).

방금 우리에게 대참사가 일어났어요. 녹음 파일이 사라지다니요. 
하하, 괜찮아요. 좀더 얘기하는 거 좋아요. 현장에서 재촬영하는 날도 많은데요. 너무 추우면 하드가 ‘뻑’ 나서 촬영을 다시 한 적도 있고요. 너무 더워도 문제가 생겨요. 디지털은 위태롭잖아요.

돌발적인 상황을 잘 받아들이는 편인가요? 
현장은 너무나 많은 일이 생기니까요. 어제는 대기가 길어진다고 해서 친구들과 <알라딘>을 봤어요. 자스민 공주가 주체적인 여성으로 나와서 본인이 술탄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하거든요. 예전 버전과는 너무 달라서 ‘시대가 변했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따뜻한 커피가 더 필요하진 않나요? 그러고 보니 지금 핫팩을 들고 있군요! 밖이 28℃인데 말이에요. 
차가운 아메리카노는 마실 수 없습니다. 항상 따뜻한 걸 마셔요. 그런 모임이 있다면서요? 여름에도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사람들요. 그게 저입니다. 핫팩은 손끝이라든지 발끝이라든지, 더워도 차가운 부분이 생기는데 그런 찬 기운을 싫어하거든요. 저는 너무 피곤할 때만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셔요. 예전에 <동창생> 찍은 감독님이 주신 팁이에요. 얼음에 에스프레소 3샷을 넣는 거예요. 스리샷에 시럽을 두 번 펌프하면 얼음이 조금 녹잖아요? 그대로 원샷을 하면, 10분 안에 정신이 확 들어요. 내일의 체력을 당겨 쓰는 기분이죠.

인터뷰를 시작할 때 “수다 같은 거라도 좋아요”라고 했는데 어쩐지 계속 ‘수다’를 하는 기분입니다. 인터뷰를 즐기는군요? 
제 생각에도 저는 인터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매번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해서 친구들 만날 때에도 막 어디 가서 뭘 하는 것보다 어디 앉아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오예에옥달신’ 모임 멤버가 있는데 항상 모여서 이야기하고 잘 놀아요. 이번에 그 친구들이 커피차 보내줘서 정말 잘 먹었어요.

커피차가 촬영장의 소소한 즐거움인가요? 
아무래도 사극이다 보니 될 수 있으면 건물이 안 보이고, 전봇대가 없는 곳으로 들어가게 돼요. 그러다 보니 커피차가 오면 문명의 혜택을 받는 기분이에요. 온다고 그러면 다들 되게 즐거워해요.

반면 화보를 촬영할 때 말이 거의 없었어요. 언뜻 “계절을 잘못 연기했다”고 말한 걸 들은 것 같아요. 
저는 사진도 하나의 연기라고 생각해서 그날의 무드를 많이 생각해요. 연기는 하면서 더 보여주는 느낌이고, 사진은 제가 알지 못한 다른 모습이 된다는 기분이 들거든요. 더 특별한 부분이 있어서 재미있어요. 평소에 수수하게 입고 다니는 편이라서 그런지 다양한 옷을 입는 재미도 있어요. 영화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옷 한 벌만 입고 나올 때도 많고, 지금은 한복을 입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녹두꽃>의 송자인은 거상의 딸이기 때문에 옷이 자주 바뀌는 편이에요. 지금으로 따지면 해외에 진출한 대기업의 후계자잖아요? 
그렇죠. 저희도 그런 말 많이 했어요. 하하.

드라마 초반에 자인은 이재에 밝은 모습을 보여요. 다친 사람을 숨겨주는 대신 대가를 요구하기도 하고요. 실제로도 셈이 빠른가요? 
아뇨. 저는 왼쪽 주머니, 오른쪽 주머니에 뭐가 들어 있는지도 몰라요. 계좌도 정리 못하고요. 그래서 그런 거 잘 아는 친구가 뱅크샐러드를 추천해줘서 한번 정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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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디건은 아워코모스 (Ourcomos). 귀고리는 헤이. 링은 에스실(S_S.IL).

언젠가 ‘장사’를 해보고 싶단 생각은 해본 적 있어요? 
음… 작은 가게를 한다면 아주 작은 위스키 바요. 사람들이 다가와서 하루의 피로를 위스키 한두 잔으로 풀고, 하루의 일을 얘기하는 그런 바면 좋겠어요.

그런 작은 바를 도쿄의 긴자 골목에서 본 적이 있어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해요?
연기를 해야 되기도 하고 관심이 있어요. 다른 인물을 많이 표현해야 하니까요.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이나 성격 같은 것에 관심이 있어요.

책을 좋아하는 것도 같은 이유인가요?
독서는 좀 더 엔터테인먼트 측면이 강해요. 소설을 좋아하는데, 재미있어서 읽거든요.

그럼 작품을 볼 때도 소설처럼 읽나요? <녹두꽃>을 처음 읽었을 땐 어땠어요? 
4회까지 대본이 나와 있었어요. 그리고 각각의 인물이 다 살아 있어서 좋았어요. 제 캐릭터 때문만이 아니고요. 원래 캐릭터만 보고 선택하지는 않아요. 지금까지 제 역할보다 작품에 끌리면 해왔어요. 손재범 감독님의 <해치지 않아요>에 짧게 출연한 계기도 감독님의 영화가 재미있고 좋아서였거든요. 장률 감독님의 <춘몽>도 마찬가지였어요. 작품이 좋았어요.

송자인은 강하면서 섬세한 인물이더군요. 그런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저는 송자인이 사극에서 현대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판타지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작품 들어가기 전에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특히 동학농민운동을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시작된 첫걸음으로 평가한다는 게 정말 마음에 와 닿았어요. <녹두꽃>에서 이강, 이현, 자인 셋은 실존 인물이 아니고, 작가님께서도 실존 인물인 전봉준만으로는 갈 수 없다고 하셨죠. 민초들의 이야기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야지만 전봉준의 이야기나 동학의 이야기도 같이 갈 수 있으니까요. 역사가 ‘스포’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이 스포를 이야기로 끌어가려면 가상의 인물들이 필요한 거예요. 송자인처럼요.

사극이지만 시대의 요구를 반영한 캐릭터라는 것이군요. 
자인은 지금 시대에서도 원하는 여성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아니, 여성에 국한되어 말하고 싶지 않아요. 한 인간으로도 이상적인 사람이죠. 그런 자인이 온전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거상인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잘 자랄 수 있었겠지만 ‘사람’을 택하게 되고 난세를 겪으면서 자신의 인생을 생각하는 사람이죠. 무척 똑똑하고 주체적인 여성이기 때문에 자신의 운명에 기대거나 지지 않고 개척하려고 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런 부분에서는 이강, 이현보다 건강한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상상으로 채워야 하는 인물이었는데, 어떻게 만들어 갔어요? 
실존 인물을 참고하기보다는, 모든 인물이 감당해낼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에 이 안에 잘 녹아들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정답이 없듯이 결국엔 자인, 이강, 이현 셋 다 지금 상황에서의 최선인 선택을 하고 있다고만 생각했어요.

자인을 좋아하는군요. 애정이 느껴져요. 그렇게 좋아하는 인물을 만나는 것도 배우에게는 행운이겠어요. 
너무 좋아해요. <청춘시대>의 윤진명도 그렇고, 송자인이라는 <녹두꽃>도 그렇고 자신의 이야기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인물들을 만난 것에 감사해요. 당연한 일임에도 그런 캐릭터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잖아요. 작가님에게도 감사하고 제가 그런 인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임에도 감사해요. 또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때라는 것도요.

‘타이밍’이 좋았다는 것이죠? 
네. 요즘에 그런 캐릭터를 다들 만들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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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트와 스커트는 폴로 랄프로렌 (Polo Ralph Lauren). 귀고리는 에스바이에스실(S by S.IL). 트레이는 오티드(Otide).

한동안 영화음악 방송의 디제이를 맡기도 했어요. 
맞아요. 그런데 작품을 하면서 라디오를 하는 게 쉽지 않거든요. 참 좋은 기억이었고 계속 하고 싶었지만… 라디오 작가님들은 항상 그러세요. 배우들이 작품을 하게 되었다고 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가요!’ 그래요. 디제이를 한 건 정말 행복한 기억이에요. 그때 시사회를 정말 많이 다녔거든요. 좋은 영화를 봤을 때, 그때의 분위기가 있어요. 그렇지 않은 영화에 대한 분위기도 있고요. 시사회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보는 게 아니라 각자 보러 오잖아요? 차단되는 느낌이랄까, 혼자 영화를 즐기는 느낌은 또 달라요.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충족되는 기쁨이 많았어요. 좋은 관객에 대한 생각도 해보게 되고요.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관객은 어떤 사람인가요? 
영화라는 예술을 지속시켜주는 사람이요. 그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넷플릭스나 왓챠 플레이, TV에서도 항상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어도 영화관에서 보는 경험이 여전히 특별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배우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 시간을 갖고 스크린 위 배우의 얼굴을 천천히 보는 것이 좋아요. 아주 작은 주름부터 떨림, 아무 표정이 없어도 그 사람 내면의 슬픔, 기쁨이 잘 보이잖아요. 스크린이 크다 보니까 시각적인 즐거움이 있다고 생각해요. 모르겠어요. 그냥 극장은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또 한 가지를 느꼈는데요….

무엇인가요? 
제가 꼭 연기를 하지 않더라도, 관객으로만 볼 수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영화를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생각이네요. 드라마뿐만 아니라 많은 영화 현장을 오갔어요.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를 두루 경험하면서 느낀 차이가 있어요? 
현장은 다 힘들어요. 하지만 중요한 건 자기 색깔을 유지하는 것 같아요. 저도 그걸 점점 더 느끼는 것 같아요.

<녹두꽃>에서는 이강이 ‘내 사람 하소’라고 고백을 했어요. 멋진 고백이었는데, 설마 이강이 죽나?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제가 죽을까봐 걱정이에요. 제 코가 석자예요.(웃음). 이강의 말에 자인은 섣불리 대답을 못하죠. 저도 이강과의 러브라인을 생각했는데 쉽지 않아요. 그 상태로 갈 것 같아요. 아직 대본이 나오지 않아서 아무도 모르거든요.

당신은 어떤가요? 그런 말을 실제로 할 수 있는 사람인가요? 
고백을 이상하게 과감하게 잘하는 편이에요. 저한테 확신이 생기면 고민을 안 하는 편이어서. 고백을 하면 되게 편해지는 것 같아요. 이강과 자인은 이제 동지 같은. 어찌됐건 이 둘은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각자의 뜻을 펼칠 수 있게끔 해줘야지만 함께할 수 있는 상태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 사람이 원하는 삶의 형태나 가치관을 인정해주는 것이 사랑보다 더 중요할 수 있죠.
그래서 결국엔 사랑으로만 살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을 또 다 포용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인 것 같아요. 나이가 들수록 종교적, 정치적, 도적적 가치가 중요하구나 생각해요. 어렸을 땐 그런 것 생각 잘 안 하잖아요. 20대 때 연애할 때, 종교적, 정치적인 것으로 싸우겠어?라는 생각이 별로 없다가 서른이 넘어가면서 달라져요. 안 중요했던 것들이 중요해지고, 중요했던 것들이 안 중요해지고 이게 재미있긴 하더라고요. 이제는 절 알아가는 과정이 먼저 필요한 것 같고, 그러기 위해서 혼자 살기를 해보고 싶어요. 미션 중에 하나예요. 해외에서 한 달 살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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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디건과 스커트는 아워코모스. 귀고리는 헤이. 링은 에스실. 슈즈는 미예르(Miyerh). 트레이는 오티드.

해외에서는 유명인이 아니라도 자유로워지죠. 익명성이 주는 즐거움이니까요. 
어딜 가든 무슨 행동을 하든 남들이 다 아는 것은 너무 힘든 것이구나. 그것 때문에 또 아주 유명해지는 건 불행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 지금 제 상태가 좋거든요. 사람들이 저를 잘 모르시고 많이 헷갈려 하시거든요.(웃음) 그런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더 유명해지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는 더 자유로워지지 않겠어요? 
그런데 돈은 늘 부족한 듯이 있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해요. 감당할 수 없는 큰 돈을 지닌 사람들은 항상 되게 나빠지는 것 같아요. 돈이 마약만큼 나쁘다고 생각될 때도 있어서 적당히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적당히 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잖아요. 그러니까 없어도 없는 대로 살고, 있으면 있는 대로 사는 것이 좋은 것 같아요. 넘치면 분명 문제가 생기는 거고, 늘 조금 부족해야 사람이 더 열심히 일하기도 하니까. 어차피 갈 때 다 싸가지고 갈 것도 아닌데.(웃음)

하고 싶은 것을 연예인이라서 포기한 적은 없나요? 
네,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일단 어린 나이에 데뷔하지 않았고, 그렇게 하기엔 좀 이기적인 사람인 것 같아요, 제가. 누군가는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면서 살 수 없다’고 이야기하잖아요.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해야 되는 건 하면서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그렇게 큰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요.

지금은 뭘 하고 싶어요?
지금은 대본 생각밖에 없어요. 7월 말까지 촬영을 하니까요. 누가 암기 좀 해줬으면…! 자인인 정확하게 말을 해야 하는 사람이어서 단어나 어미를 바꿀 수가 없어서 신경이 더 쓰여요.

이 계절도 끝이 올 거예요. 8월호는 잡지에서 여름의 문을 닫는 호이기도 해요. 마지막 여름날이란 게 존재한다면 무엇을 하고 싶어요?
바람이 들어오는 마루 같은 곳에서 땀을 흘리면서 낮잠을 자고 싶어요. 선풍기를 틀어놓고요. 그런 여름날을 만나본 지 오래된 것 같아요. 분명히 있긴 있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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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는 문제이(Moon 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