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답이 진화하는 그로서리 스토어에 있다. 

LA에서 진행한 발렌시아가 2024 프리폴(Pre-Fall) 런웨이에서 파격적인 룩만큼이나 화제를 일으킨 단어는 에러원(Erewhon)이다. 청키한 후드를 입은 모델들은 스마트폰, 요가 매트와 함께 에러원의 로고가 프린트된 텀블러, 쇼핑백을 들고 거침없이 걸었다. LA 진출과 함께 발렌시아가와 협업한 에러원의 정체는 그로서리 스토어다. 에러원의 인기는 매장 앞에 진을 치고 있는 파파라치의 수가 증명한다. 헤일리 비버, 에이셉 라키 등이 애정하는 쇼핑 스폿인 이곳에는 2만원이 훌쩍 넘는 스무디, 평균 대비 2~3배 높은 가격표가 붙은 상품이 즐비하다. 하지만 그저 있는 자들의 향유라고 하기에는 인기가 너무 뜨겁다. 패션 브랜드가 협업을 탐하고 LA에 가면 꼭 한번 들러야 하는 스폿으로 자리 잡았다. 사실 미국 내 프리미엄을 표방한 슈퍼마켓의 등장은 일찍이 시작됐다. 홀푸드(Whole Food)를 비롯해 스프라우츠(Sprouts), 브리스톨 팜스(Bristol Farms), 레이지 에이커스(Lazy Acres), 해리스 티터(Harris Theeter) 등 여러 지역에 다종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자리매김해온 브랜드 틈에서 에러원이 이토록 매력적인 브랜드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에러원의 시작은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매크로바이오틱(Macrobiotic) 식품을 소개하는 건강식품 매장으로 보스턴에서 문을 열었지만, 처참한 결과를 맞봤다. 캘리포니아주로 자리를 옮긴 에러원은 새로운 방식으로 브랜드를 가꾸기 시작했다. 에러원의 CDO 유발 치프루트(Yuval Chiprut)는 여러 인터뷰에서 지역과의 상생, 연대를 강조했다. 진정성은 그들의 큐레이션 전략에서도 찾을 수 있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비콥(B Corp) 인증 제품을 고집하고, 혁신적인 레시피를 개발해 델리(Deli) 제품을 선보이기도 한다. 매장 인테리어 역시 특별하다. 실제로 매장은 4성급 호텔과 고급 의류 편집숍에서 영감 받았다. 강렬한 햇빛이 쏟아지는 창문, 넓은 통로로 개방감을 더한다. 쇼핑을 마친 뒤 날씨를 만끽하며 식사를 즐기는 공간 역시 매장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SNS에 올라온 후기를 보면 특별한 필터 없이도 ‘인생샷’이 보장되는 디스플레이와 인테리어의 힘을 확인할 수 있다. 부사장 제이슨 와이더너(Jason Widener)는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고객이 호기심을 갖고 매장에 오길 바랍니다. 그들이 직원과 대화하고 열정적인 공동체 일원으로서 영감 받길 원해요”라며 기존 슈퍼마켓의 기능을 지속해서 확장하고자 했다. 

에러원은 슈퍼 그 이상이며 발견의 장소다. 고작 쇼핑하러 나갔을 뿐인데,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콘텐츠가 넘쳐난다. 개성 있는 디스플레이와 패키지, 에너지 넘치는 크루, 고도의 큐레이션으로 엄선한 제품은 개인이 지향하는 라이프스타일에 쉽고 빠르게 도달한다. 이런 흐름이 한국에서도 펼쳐지고 있다. 단순히 수입품만 긁어모으는 걸 넘어 자체 콘텐츠를 품은 그로서리 스토어와 델리는 새로운 미식 경험을 제공한다.

2014년 남산맨션 1층에 등장한 보마켓은 당시 생소한 콘셉트로 입소문이 났다. 일종의 편집숍인데 판매하는 제품의 종류는 하나로 규정되지 않았다. 이들은 GMO(유전자조작식품) 섭취량을 줄이기 위해 만나박스와 협업하고 직접 사용한 뒤 좋았던 제품 위주로 큐레이션했다. 보마켓의 상징과도 같은 주황색 의자에 앉을 때면 낯선 사람과도 좌석과 테이블을 공유하며 다정한 웃음이 피어나고는 했다. 일상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유지하려는 노력은 전 지역에 걸쳐 커다란 물결처럼 번지고 있다. 흠이 있어서 외면받는 못난이 농산물을 판매하는 흠마켓, 이탈리아에서 오랜 시간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경험한 식문화를 소개하는 알리멘따리 꼰떼, 건강한 그래놀라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아틀리에 크레타, 신념과 철학을 가진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어주고, 지속가능한 소비를 제안하는 슈퍼파인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셰프와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의 친구들이 모여 F&B 영역에서 케이터링, 델리, 팝업 등의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먼데이 모닝 마켓의 행보도 흥미롭다. 광장시장에 위치한 365일장은 로컬의 가치에 무게를 둔 곳이다.
“새로운 시장 경험을 통해 로컬의 가치를 높이고 역사를 이어 경제를 살리는 시장의 순기능을 새롭게 정의하고자 시작했다”는 추상미 대표는 광장시장에서 박가네 빈대떡을 운영하는 부모님을 보며 성장한 경험을 맛과 멋으로 풀어냈다. 잘되는 그로서리 스토어에는 지역, 환경, 건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윤리적 소비를 관통하는 가치를 고도의 큐레이션과 브랜딩으로 펼쳐낼 때, 소비자는 새로운 경험과 영감을 얻는다. 

한 끼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에는 돈과 시간이 소비된다. 어떤 이의 식사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고, 누군가는 한 상 차림에 2박 3일을 할애하기도 한다. 무엇을 어떻게 먹는지가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고, 식사는 곧 몸과 정신을 가꾸는 하나의 방법이 되었다. 그 방법에 대한 다양한 해답이 진화한 그로서리 스토어에 펼쳐져 있다. 행복한 삶을 꿈꾼다면 오늘 저녁, 적당히 출출한 상태로 그로서리 스토어에 방문해볼 것. 책임 있는 식사를 탐닉할수록, 우리의 식탁이 풍성해질수록 삶의 행복도 급상승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