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는 지금 이 순간의 한국 소설을 전한다. 다음은 그 여덟 작가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좋아한다고 말한 여덟 편의 소설이다.

 

정세랑이 좋아하는
<뱀이 깨어나는 마을> 샤론 볼턴 지음

산에 갔다가 실수로 뱀을 밟은 적이 있다. 떨어진 노끈이라 생각했는데 밟는 순간 너무 놀라 공중으로 40cm쯤 뛰어오르고 말았다. 물론 뱀이 더 놀라고 다쳤겠지만 수만 년 동안 본능적으로 물려받은 공포가 점프 버튼을 누른 것이 아닐까 싶었다. <뱀이 깨어나는 마을>은 그런 면에서 색다른 각도의 추리 소설이었다. 영국의 작은 마을에 갑자기 뱀이 출몰하기 시작한다. 한 마리씩 눈에 띄다가 떼로 나타나고, 그 뱀들 중에서는 영국의 뱀이 아닌 먼 나라의 독사가 포함되어 있다. 아기 침대에 뱀이 똬리를 틀고, 혼자 사는 노인이 뱀독에 중독되어 죽는다. 지역 파충류 보호센터의 수의사인 클래라는 전문가로서 이 사태에 투입된다. 주인공이 파충류를 사랑하는, 파충류에 대한 오해를 풀고 싶어 하는 사람이어서 읽는 사람의 시각도 공포에서 이해로 옮겨가게 된다. 정말로 몸서리치게 만드는 것은 독사가 아니라 인간의 악의임을 처절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밤을 새워 읽게 만들고, 읽고 나서도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대단한 작품이다. 뱀에 관심이 있는 독자는 소설 속 전문적인 지식에 감탄할 것이고, 뱀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독자는 그 두려움이 아주 약간 방향을 틀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정세랑 | <보건 교사 안은영>(오늘의 젊은 작가), <피프티 피플> 등을 썼다. 

 

박민정이 좋아하는
<비바, 제인> 개브리얼 제빈 지음

세상 사람들이 혐오하고 즐거워하는 소문의 대상이 된 여자에게 그 이후의 삶은 가능할까? 그것도 그 자신의 모습으로 온전히 세상 사람들 앞에 서길 누구보다 원하는, ‘정치인’을 꿈꾸는 여자에게. 인생은 생각보다 길고 소문은 사람을 파괴할 수 없다. 새로운 삶은 가능하다. 이런 종류의 말이 옥장판 판촉 문구처럼만 느껴지던 내게, 이 소설은 다른 결말을 보여주었다. 이 소설을 통해 나는 자기 인생을 다시 걸어볼 수 있는 희망을 봤다. 어쩌면 정말 공연한 말일지도. 사실 무수한 소설이 ‘삶은 다시 한번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어필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든 소설이 다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소설은 선뜻, ‘상처받은 자여, 힘을 내라’는 식의 주문을 외지는 않는다. 다시 일어서는 일이 정말로 가능하다는 기적을 조용히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무수한 선택의 순간에서, 겸양부리지 않고 바로 나 자신을 선택하는 일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도. 오직 추문의 상징이었던 여자의 입체적인 인생을 통해 삶이 소문만큼 간단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나를 파괴하고 상처 준 곳으로 조용히 다시 걸어 들어가야만 하는 사람에게 삶을 지속할 용기가 어떻게 가능한지, 오로지 소설의 언어로 보여줄 뿐이다.
– 박민정 | <미스 플라이트>(오늘의 젊은 작가), <여자들의 학교> 등을 썼다. 

 

김혜진이 좋아하는
<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한 사람의 생을 단 하루로 압축할 수 있다면 아침과 저녁, 그 사이를 채우는 것은 무엇일까. 기쁨과 슬픔, 분노와 후회, 좌절과 슬픔 같은 사람들이 흔히 떠올릴 법한 특별한 순간이나 감정들로는 결코 삶을 설명할 수 없다고 이 소설은 말하는지도 모른다. 생애 마지막 날에 이른 늙은 어부 요한네스의 하루를 따라가다 보면 삶을 완성하는 것은 매일 지루하고 비슷하게 반복되어온 일상이라는 것을 새삼 상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 나눠 가진 기억들. 익숙하고 편안해서 자주 잊게 되는 어떤 것들. 읊조림에 가까운 욘 포세의 문장들은 죽음을 앞둔 요한네스가 가장 그리워하고 사랑했던 것이 그토록 흔하고 보잘것없는 하루하루였다는 것을 담담하게 말해준다. 삶이라는 것은 그런 소박하고 사소한 것들로 채워지고 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빛날 수 있다는 것은 놀랍고 감동적이다.
– 김혜진 | <딸에 대하여>(오늘의 젊은 작가), <어비> 등을 썼다. 

 

최진영이 좋아하는
<디디의 우산> 황정은 지음

이 소설에는 페미니즘과 퀴어와 어린아이와 ‘배제된 사람들’이 있다. 연대 한총련 사태와 용산참사와 명박산성과 세월호 참사와 촛불혁명과 대통령 탄핵이 있다. 그곳에 여자들이 있다. 너는 어디에 있느냐 나는 여기에 있다 소리치며 서로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춥고 지쳐 더는 광장에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촛불을 드는 사람이 있다. 촛불 속에서 마주치는 혐오와 공포가 있다. 광장의 미로가 있다. 마침내 혁명을 이뤘다고 말하는 자들은 보려고 하지 않는 폭력과 경멸이 있다. 평화 시위에 자긍심을 가진 사람들과 평화적인 방법만으로는 도저히 지금의 위기를 드러낼 수 없는 사람들이 동시에 드러내는 ‘누구도 다치게 하지 말라’는 염원, 아니 상처가 있다. 우리의 상처.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 책의 어느 곳을 펼치더라도 읽기를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앞의 내용을 모르더라도 몰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장이 나라는 존재를 거세게 빨아들이는 경험을 할 것이다. 다시, 이 소설에는, 한국의 1990년대와 2000년대와 2010년대가 있다. 현재가 있다. 회복할 수도 메울 수도 없는 구멍이 있다. 침묵과는 다른 적요가 있다. 온도가 있다. 애도가 있다. 분명한 사랑이 있다. 하찮은 인간의 아름다움이 있다. 아…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어떤 형용사로도 부족하다. 소설을 읽으며 나는 부끄러웠다. 부러웠다. 불안했다. 변명하고 싶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날카롭게 가리키다 활짝 펼쳐서 가려준다. 여기 디디의 우산이 있다. 나는 비를 맞을 것이다.
– 최진영 | <해가 지는 곳으로>(오늘의 젊은 작가), <겨울방학> 등을 썼다. 

 

황현진이 좋아하는
<첫 문장> 윤성희 지음

안녕하세요, 저는 소설을 쓰고 있는 아무개입니다. 이런 식의 자기소개를 하면 반드시 돌아오는 질문이 있다. 어떤 이야기를 쓰세요? 그러면 나는 당황해서 같은 말을 더듬거리며 반복하곤 했다. 음… 그냥… 소설이요. 모든 이야기는 음… 그냥… 소설이 된다. 윤성희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 정말로 그렇다. 대개 소설의 주인공들은 비슷한 질문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어쩌다 내가 되었지? 많은 소설이 그에 답한다. 주인공이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를 상세하게 들려준다. 윤성희 작가의 소설은 그렇지 않다. 그의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까짓것.” <첫 문장>의 주인공은 불행하다. 딸이 죽었으며, 아내가 떠났고 권고사직까지 당했다. 나는 직장 상사에게 왜 하필 나냐고 묻지 않는다. 죽은 딸의 사진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아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만 찾아가지 않는다. 다만 나는 작은 수첩에 아무 문장이나 쓴다. “나는 감나무 잎에 그림을 그려보았다, 나는 웃고 싶으면 옷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곤 했다, 나는 사랑니가 나지 않았다, 나는 하루에 세 번이나 무지개를 본 적이 있었다.” 걷거나 달리면서 생각나는 대로 쓴다. 불행과 상관없는 문장들을 떠올리면서, 굳이 빠져나갈 길을 찾지 않으면서.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심지어 자기 삶마저도 이해할 수 있다고 착각해선 안 되니까. 그러니 까짓것. 내가 이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그냥이라는 단어를 아무렇게나 써도 부끄럽지 않다. 어차피 주인공은 자기 이야기를 모르니까, 내가 나의 미래를 모르는 것처럼. 저는 그냥 살아요. 이토록 성의 없는 대답을 해도 나는 몹시 떳떳하다.
– 황현진 | <호재>(오늘의 젊은 작가),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 등을 썼다. 

 

김세희가 좋아하는
<피프티 피플> 정세랑 지음

“주인공이 50명쯤 되는 소설, 읽어보신 적 있나요? 게다가 주인공 한 사람 한 사람이 내가 아는 누군가처럼 가깝고도 특별하게 여겨지는 이야기를요. 이 장편소설은 51명의 인물 이름을 제목으로 단 짧은 글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대학병원을 무대로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병원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요, 한 편 한 편 웃으면서, 때로는 상당히 자주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나가는 사이 어느덧 조각 하나하나가 합해져 어떤 큰 그림을 완성해나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돼요. 아주 특별한 경험이지요. 작가가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없다!”라고 말하는 건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인공이 없는, 모두가 주인공인 소설을 쓰는 건 아주 어렵고 고된 일일 거예요. 우리는 따로따로 존재하지만 우리는 이야기가 어딘가에서 이어져 있다는 걸, <피프티 피플>은 경이로운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이토록 내용과 형식이 근사하게 한 몸을 이룬 이야기를 저는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어요. 이렇게 넓은 스펙트럼의 인물들을 만들어내고 각각에게 애정으로 숨결을 불어넣은 작가를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아주 아주 재미있습니다! 아직 읽지 않은 분이 있다면 꼭 찾아보세요. 사랑에 빠지게 될 거예요. 그리고 이 추천의 글이 결코 과찬이 아님을 알게 되실 거예요.”
– 김세희 | <항구의 사랑>(오늘의 젊은 작가), <가만한 나날> 등을 썼다. 

 

김기창이 좋아하는
<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인간은 날개가 없지만 날갯짓 비슷한 것은 자주 한다. 파닥파닥. 아니, 날갯짓을 멈추지 못한다. 영원한 사랑을 갈구하고, ‘불멸’을 꿈꾸고, 진정한 ‘삶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펼쳐질 것이라 기대하고, ‘농담’조차 허용하지 않는 권력을 추구하고, ‘참을 수 없는 제 존재의 가벼움’을 둔중한 닻처럼 포장하기도 한다. 파닥파닥. 그러나 실제 날아오를 수는 없기에, 이 날갯짓들에서 탄생하는 것은 오로지 무의미이다. 날갯짓이 깃든 삶은 그래서 ‘무의미의 축제’에 불과하다. 소설 <무의미의 축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것을 간파하고 있다. 한 개인의 뛰어난 점은 적을 만든다는 점에서 오히려 해로운 특성이다. 아주 소수만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데 거짓과 진실의 구분이 점점 어려워진다는 점에서 그들 역시 산자들의 인형에 불과하다. 성(性)과 태어난 시대, 어머니처럼 정말 중요하다 여겨지는 것들은 개인의 의지나 선택과는 무관하다. 고로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권리들이란 가치 없는 것들뿐이다! 그러다, 깃털 하나가 흐느끼는 천사처럼 천장에서 바닥으로 느릿느릿 내려앉는다. 소설 속 인물들은 추락하는 깃털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다. 지독히 냉소적인 글을 쓰던 밀란 쿤데라는 말년에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무의미를 사랑해야 한다고, 그것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무의미의 축제’는 ‘의미들의 축제’의 부대행사가 아니라 오히려 메인 이벤트라고, 허망한 날갯짓을 사랑할 때 삶은 중력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고, 그러니 날갯짓을 멈춰서는 안 된다고. 파닥파닥.
– 김기창 | <방콕>(오늘의 젊은 작가), <모나코> 등을 썼다. 

 

서유미가 좋아하는
<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소년이 온다>를 읽었던 2014년 5월의 마지막 주 일요일이 아직도 기억난다. 8개월 된 아이는 거실에서 잠이 들었고 나는 소파에 앉아 책을 펼쳤다. 열어둔 베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과 오후의 햇살이 거실에 머물렀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현실을 완전히 잊은 채 광주의 거리 곳곳을 돌아다녔다. 낮잠을 자는 아이가 깰지 모른다는 염려도 책 속의 나를 따라오지 못했다. 동호 엄마의 목소리가 문장으로 풀어진 부분에서는 울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뜨겁게 흐느꼈다. 이전에도 놀랍고 아름답고 재미있고 질투 나는 책을 여러 권 읽었지만 이렇게 사람의 냄새와 목소리와 뺨의 온기와 살아 있음과 죽음에 아픔을 느끼며 몰입한 적은 없다.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거실은 어둑했고 나는 여기가 어디인지, 어디에 도착한 것인지 한참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전의 내가 저 페이지들과 함께 과거로 사라져버렸음을 깨달았다. <소년이 온다>는 책을 읽기 전의 나와 읽은 뒤의 나를 홍해처럼 갈라버렸다. 미약한 경험과 판단과 사유가 다 부서진 뒤에야 소설의 거대한 물결이 나를 뒤덮었다. 나는 책을 소파 위에 둔 뒤 창밖을 내다보았다. 거리를 평화롭게 오가는 사람들에게 지금 우리가 어떤 사람들의 외침과 통곡과 희생 위에 서 있는지 아느냐고 묻고 싶었다.
– 서유미 | <끝의 시작>(오늘의 젊은 작가), <당분간 인간>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