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정의가 바뀌고 있다. 유튜브를 보거나 텍스트를 음성으로 바꾸는 TTS를 돌려 낭독을 시키는 일도 엄연히 ‘책 읽는 행위’가 됐다. 상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책을 경험하는, 요즘 애들의 독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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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 자리에서 집중력 있게 독서하는 건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엔 내 것이 아닌 재능이 됐다. 그런데 어떻게 읽었냐고? 20분 동안 한 권의 책을 읽는 신박한 방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는 커피를 내릴 때, 엘리베이터나 신호등을 기다릴 때, 끔찍한 인파로 붐비는 9호선 만원 지하철과 피트니스 센터 트레드밀 위에서 쉼 없이 책을 읽었다. 누군가는 ‘책에 미쳤나?’ 혹은 ‘자투리 시간까지 철저하게 활용하는 계획주의자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훌륭한 이유와는 거리가 멀다.

비결은 ‘종이책 혹은 전자책을 펼쳐서 텍스트를 따라가는 정통한 독서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3분 독서’를 가능케 한 공신은 전자책 구독 서비스 앱 ‘밀리의 서재’에서 제공하는 ‘밀리 챗북’이다. ‘챗북’이 뭐냐고? 이름 그대로 채팅형 책을 뜻한다. 원리는 이렇다. 책을 쓴 사람, 혹은 책에 나오는 인물과 대화를 한다. 에세이나 실용서는 전문 에디터가 독서자를 대신해 대화를 진행하고 소설은 등장인물이 직접 등장해 제3의 화자와 함께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읽는 사람이 할 일이란 눈에 익은 ‘말 풍선’ 속에서 각색, 재구성된 책 속 이야기를 졸졸 쫓아가는 것뿐. 남의 대화를 훔쳐보는 기분으로 말이다.

채팅형 책의 처음은 ‘챗 픽션(Chat Fiction)’으로 불리는 채팅형 소설이다. 비디오, 사운드, 이미지와 함께 등장 인물이 대화를 주고받는 식으로 내러티브를 전개하는 새로운 형식의 문학으로, 전문가들은 ‘웹 소설의 진화로 나타난 장르’라고 말한다. 2015년 미국의 후크드(Hooked), 얀(Yarn), 클리프행어(Cliffhanger)와 같은 플랫폼들이 채팅형 소설의 첫 장을 열었다. 이듬해 등장한 ‘아마존 래피즈(Amazon Rapids)’는 채팅형 소설 시장을 확장시켰다. 우리나라엔 채티(Chatie)가 있다. 2018년 5월에 출시된 이 챗 픽션 플랫폼에선 웹소설을 채팅 방식으로 읽을 수 있는 콘텐츠를 제공한다. 누적 가입자가 65만 명이 넘을 정도로 밀레니얼 세대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채티를 만든 최재현 아이네블루매 대표는 채팅으로 의사 소통을 하는 10대들이 특히 텍스트와 영상을 조합한 새로운 읽을 거리에 관심이 높다고 분석했다.

듣는 책, 오디오 북 독서는 더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전문 성우가 낭독한 책’을 듣는 ‘라디오 극장’식 오디오 북은 이제 옛날 얘기가 됐다. 지금은 팬덤을 가진 연예인, 예술가, 명사들이 단순 낭독을 넘어 작가에 대해 설명하고, 책의 주제를 요약하고, 내용을 읽어주는 등 좀 더 능동적이고 깊게 개입한다. 마치 뮤지션들이 앨범을 발표하듯 책을 ‘음원 콘텐츠’로 발매하는 식이다. 네이버 오디오 북, 윌라, 팟빵, 오디오 클립, 리디 북스, 밀리의 서재, 교보문고, 구글 오디오북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발췌 요약형 혹은 완독형 오디오 콘텐츠를 판매하고 있다.

‘사상 최대의 불황’이라는 수식어가 짝꿍처럼 따라다니는 출판 시장에서 오디오 북이 앞다퉈 출간되는 건 책을 ‘듣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실제로 전자책 전문 해외 사이트 ‘굿이리더닷컴’은 2017년 전 세계 오디오 북 시장 매출이 25억 달러, 성장률은 연평균 두 자릿수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고 밝혔다. 배우 이병헌이 읽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출간 일주일 만에 1만5천 명이 들었다는 뉴스도 이를 뒷받침한다. 자신의 작품 <살인자의 기억법>을 직접 낭독한 소설가 김영하는 오디오 북 음원 발매와 함께 “지금은 책이 눈으로 읽는 매체이지만 인류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귀로 들어왔다. 듣기 역시 독서의 다양한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밀레니얼 세대는 채팅하고, 듣는 것뿐 아니라 책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거나 독서의 동기를 부여받는 행위 역시 독서로 인식한다. 자신이 읽은 책, 읽을 책, 읽고 싶은 책을 SNS와 커뮤니티 등에서 다른 사람과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토론하는 ‘소셜 독서’의 인기가 꾸준히 지속되는 것도 이러한 흐름을 입증한다. 가까운 과거엔 트레바리, 알라딘 북플, 교보문고 낭만 서점을 비롯해 독립 서점, 문화 예술 단체에서 주관하는 북클럽이 ‘커뮤니티 독서’를 주도했다면 지금은 온라인 플랫폼이 그 바통을 이어받고 있다. 밀리의 서재는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시청자와 함께 스트리밍 방송을 통해 실시간으로 함께 책을 읽는 ‘책이 보이는 라이브’, 영상으로 책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한 ‘3분 독서 클립’을 통해 독서의 의미를 재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조력자가 책을 떠먹여주고 있는데도 좀처럼 책을 마주하기가 어렵다고? 이런 ‘디지털 문맹인’을 위해 책 읽는 습관을 만들어주는 플랫폼도 있다. 알라딘의 ‘북플’은 최근 ‘독보적’이라는 프로젝트를 출시해 ‘매일 읽고 걷고 기록하는’ 과제를 수행한 참가자에게 도서 구매 적립금으로 환전할 수 있는 스탬프를 선보였다. 카카오가 선보인 습관 만들기 커뮤니티 ‘프로젝트 100’에선 100일 동안 매일 책 n장 읽기, 독서하고 인상 깊은 문장 필사하기 등의 ‘작은 다짐’을 함께 수행할 ‘파티원’을 모집하는 모임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문체부 ‘국민독서실태’ 조사(2017년)에선 성인 10명 중 4명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결과 발표와 함께 ‘역대 최저치’라는 수식어로 ‘책을 읽지 않는 시대’를 개탄했지만, 앞으론 이 통계가 무용한 데이터가 될지도 모른다. 조사에 앞서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찾아야 하지 않을까? 독서란 무엇인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행위와 결과를 포함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