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사라지는 풍경들> 작가들과 나눈 지켜야 할 소중한 이야기(3)
마이클 케나, 티나 이코넨 그리고 진희 박. 세 작가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풍경을 담는다.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전시 <사라지는 풍경들>이 공근혜갤러리에서 열린다. 전시를 앞둔 작가들과 시차를 건너 나눈 말들.
진희 박
물감을 바르고 말리고 다시 덧바르는 반복의 과정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화면 위에 켜켜이 축적한다. 붓질을 통해 시간을 사유하고, 고독을 통과해 수행적 회화의 의미를 새롭게 경신하는 회화 작가다. 최근 불교철학 석사과정을 마친 연구자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의 작품을 직접 소개한다면?
2017년 영국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뒤 개인전 <최남단 끝> <물에서 뭍으로> 등 쉼 없이 달려왔다. 이번 전시는 지난 챕터에 마침표를 찍고, 새롭게 벼려낸 작업을 선보이는 또 다른 시작이기도 하다.
변화의 한가운데 놓인 지구의 풍경이 주제다. 이번 전시로 기후변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나?
사유의 과정에서 나온 이번 신작을 통해 매끄럽고 건조한 현대문명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원초적인 ‘숨(Breath)’을 색의 진동으로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언어와 논리에 매몰된 세계상에서 잠시 벗어나기를 바란다. 스마트폰의 매끄러운 화면 대신, 내 캔버스 위에 쌓인 물감의 질감과 색이 부딪치면서 만들어내는 미세한 ‘떨림’을 마주하며, 직관적 호흡을 감각할 수 있었으면 한다.
왜 회화였나?
20~30대 시절 뉴욕과 파리, 런던에서 공부하며 서구의 조형언어를 배웠지만 계속 고민하게 됐다. 명료하지만 차가운 수학적 논리의 서구 언어와 달리, 우리의 언어와 사고는 ‘숨’이라는, 미세한 떨림을 가능케 하는 공명의 과정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합리적이기만 한 그레고리력 시간 체계가 아닌, 인간의 느림을 담은 시간적 행위 자체가 지금의 환경과 문명에 대응하는 가장 적극적 전시 방법이자 제안이다.
미술가로는 드물게 동국대학교에서 불교철학으로 석사과정을 밟았다. 불교철학의 어디에 매료되었나?
바야흐로 1인 가구의 시대이지 않나. 승려야말로 수천 년 동안 완벽한 ‘1인 가구’의 전통과 자립의 습성을 지켜온 분들이다. 현대문명 속에 홀로 존재하면서도, 단절되는 대신 우주 그리고 자연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그들의 철학적 태도가 좋았다. 학문적 갈증도 컸다. 인도에서 태동해 중앙아시아의 사막을 거쳐 동아시아로 전해진 불교의 맥락은 혼자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짚어내기 어려울 만큼 깊고 방대하다. 특히 8세기에 실크로드 사막을 횡단한 승려 ‘혜초’의 여정에 관심이 깊어 석사논문을 준비 중이다.
불교는 평생을 ‘수행’으로 표현한다. 당신에게 매일은 어떤 수행인가?
‘수행’이라는 단어가 자칫 무겁고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매끄럽고 건조한 도시 문명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모두가 각자 나름의 치열한 수행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현재 어떤 수행을 하고 있나?
지금 불교철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것 자체가 엄청난 수행이다. 보통 시각을 다루는 미술 작가는 긴 글을 쓰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불교의 철학적 사유를 활자로 소화하고, 맥락화하는 훈련은, 내 안에 굳어 있던 언어와 감각을 산산조각 내고 ‘새로운 세포를 다시 만드는 과정’과도 같았다.
기후 위기, 환경 등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에 프로젝트팀으로 입주하면서 선보인 <초안산 프로젝트>가 있다. 이경훈 인테리어 디자이너와 팀을 이뤄 타이벡(Tyvek) 소재의 텐트를 만들어 도봉구 초안산 캠핑장에서 2주, 원시림인 제주도 곶자왈 근처에서 4주 동안 기거했다. 비바람을 맞으며 하얀 도화지 같은 텐트 안쪽 표면에 그림을 그린 시간은, 날것 그대로의 자연을 온몸으로 사유할 수 있는 강렬한 경험이었다. 이번 공근혜갤러리의 3인전은 세 사람 모두 각자의 매체로 자연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천착해온 사유를 한 공간에 담아내는 전시다. 특히 오랫동안 그린란드를 탐험하며 빙하와 환경의 변화를 렌즈에 담아낸 티나 이코넨의 작품은, 추상화를 하는 내게 많은 생각과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자연 생태계, 특히 습지를 추상화한 대형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어떨 때 소재가 되나?
영국 유학생 시절부터 ‘습지 시리즈’(2015-2021)를 했다. 습지는 축축하고, 은밀한 공간이다. 완전히 개방되지 않은 내밀한 장막 아래에서, 실로 다양하고 역동적인 생태계가 거친 숨을 내쉬고 있다. 지금도 작업의 근저에 흐르는 사유가 메마른 대지와 바다의 기억이 만나는 지점에 있듯, 습지는 물과 흙이 끈끈하게 뒤엉키는 완벽한 경계의 공간이다. 확정되거나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한 틈새 속에서 자연의 폭발적 생명력이 꿈틀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붓을 들게 하는 거대한 영감이다.
습지 작업 때는 추상적인 습지라고도 표현했는데. 작업이 구체화되는 과정을 말해준다면?
작업실이 있는 하남 미사 일대에는 실제로 크고 작은 생태 습지가 많다. 틈이 날 때면 한강변을 따라 하남 미사까지 종종 자전거를 탄다. 빠르고 매끄러운 차창 안에서는 결코 감각할 수 없는 미세한 풍경을 마주하기 위해서다. 습지라는 경계의 공간이 품은 생명력을 사유하고, 날것 그대로의 직감을 느끼며, 그 감각의 결들을 붓을 통해 하나하나 그림의 점과 선, 면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당신이 작품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은?
내 작업은 사유에 뿌리를 둔다. 치열한 고민을 캔버스 위에서 물리적·회화적 행위와 공명시키며 뿜어내는 과정이다. 반대로, 몸을 움직여 묵묵히 안료를 쌓아 올리는 회화적 행위가 다시 내 사유를 더 깊고 단단한 곳으로 이끈다. 이처럼 정신의 사유와 신체의 진동이 멈추지 않고 서로를 지탱하며 맞물려 돌아가는 궤도 자체가, 계속 붓을 쥐게 하는 근원적 힘이다.
늘 지키고 있는 환경을 위한 철학이 있다면 무엇인가?
과도한 불안에 짓눌리지 않는 것. 그래서 나는 뉴스에서 쓰레기를 처리하는 획기적인 소각 신기술이나 환경문제 해결책이 보도될 때마다 깊이 안도한다. 거대한 위기 앞에서도 인류가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답을 찾아가고 있다는 믿음 덕분이다. 오늘 하루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안심(安心)’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자연에 대한 경구 중 좋아하는 말이 있나.
자연의 생명력이 제각기 뿜어져 나오는 풍경을 가장 잘 설명하는 문장이 있다. <중용(中庸)>에서 인용된 <시경(詩經)>의 구절, ‘연비려천 어약우연(鳶飛戾天 魚躍于淵)’이다. ‘솔개는 하늘을 날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어오른다’는 뜻으로, 만물이 각자의 본성대로 살아가며 조화를 이루는 자연의 도(道)가 온 천지에 훤히 가득함을 뜻한다. 하늘을 날고 물속에서 유영하는 저마다의 생명력처럼, 나 또한 캔버스 위에서 억지스러운 논리가 아닌 본연의 ‘숨’을 탐구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