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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패션계에 미치는 영향

2025.05.08최정윤

실리적이고 윤리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 AI는 비로소 가치 있는 패션이 된다.

수많은 e스포츠 경기가 개최되는 파리 아디다스 아레나에서 펼쳐진 코페르니 2025F/W 패션쇼. 쇼가 진행되는 동안 게이머 200명 90년대 성행했던 ‘LAN 파티’를 즐겼다.

패션, 접촉하라 AI

코페르니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세바스찬 마이어와 아르노 바이앙은 2025 F/W 컬렉션을 공개하는 자리에 게이머 200명을 초빙했다. 모델이 활보하는 무대는 로컬 에어리어 네트워크로 연결됐고, 실제 그곳에서 게이머들은 각자의 게임 콘솔로 경쟁하며, 말 그대로 인터랙티브 ‘LAN 파티’를 펼쳤다. 이날 코페르니는 레이밴 메타와 협업한 리미티드 인공지능(이하 AI) ‘웨이페어러’ 아이웨어도 공개했다. 공상과학 영화처럼 시야의 장면을 SNS에 즉시 업로드할 수 있고, 여행 중엔 주변 환경을 인식해 현지 가이드 역할을 하면서 실시간 텍스트 번역도 가능하다.

이처럼 이미 물리적 패션 필드와 밀접하게 결속한 AI 기술은 쇼맨십의 대가 빅터앤롤프 2025 S/S 오트 쿠튀르 쇼에서 또 한 번 발견된다. 빅터 호스팅과 롤프 스노렌은 “나는 샤넬 모드에 연결된 컴퓨터와 같다”라는 칼 라거펠트의 말을 인용하며 쇼를 소개했다. “40년 전에 그가 한 이 말은 오늘날 더 절실히 다가온다. 인간은 컴퓨터의 연장선이며, 패션 브랜드의 유산은 처리 가능한 데이터의 집합체다.” 이윽고 런웨이에는 흰 셔츠와 블루 팬츠, 트렌치코트를 걸친 모델이 걸어 나왔다. 다음 모델도, 그다음 모델도 흰 셔츠와 블루 팬츠, 트렌치코트를 입었지만, 총 24가지 룩은 빅터앤롤프의 하우스 코드로 변형돼 단 하나도 같은 게 없었다. 마치 생성형 AI에 입력값을 살짝 비틀어 엇비슷한 이미지 수만 개를 뽑아내는 것처럼. 쇼가 진행되는 동안 현장엔 로봇 같은 프랑스 억양으로 스타일을 분석하는 AI 보이스가 울려 퍼졌다. 이 컬렉션은 AI와 쿠튀르가 공존하는 시대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기발하고도 인간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8비트 비디오 게임에 접근할 수 있는 NFC 칩을 장식한 발렌시아가 티셔츠, NFT를 액세스 패스로 활용한 메종 마르지엘라 ‘메타 타비’ 슈즈, 웹3 가상 라이브 패션쇼에 참여한 돌체앤가바나 등. 그간 수많은 브랜드가 디지털을 융합하는 데 호기심을 보이며 나름 도전해왔다. 하지만 경기침체로 인해 패션업계가 타격을 받으면서 브랜드들은 기술 투자 산업에서 발을 뺐고, 그 결과 NFT 시장을 비롯한 1세대 디지털 패션 스타트업계가 급격히 냉각됐다. 이제 브랜드들은 도리어 웹2 플랫폼으로 돌아와 혁신보다는 대중이 친밀하게 접근할 수 있는 디지털 전략을 세운다. 신중하고 실질적인 방식이 필요할 때, 호기심 충만한 자들은 생성형 AI라는 신기술로 고개를 돌린다. 

AI 도입은 선택이 아닌 미래

AI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1950년대지만, 몇 시즌 전 생성형 AI가 등장한 이후 그 인기는 날로 높아졌다. 생성형 AI 기술로 창출되는 전 세계 매출 성장률은 연간 58%에 달하며, 2034년까지 럭셔리 브랜드 시장에서만 56억 달러(약 8조원) 가치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일찌감치 구글 클라우드와 파트너십을 맺고 대규모 고객 데이터를 수집 중인 LVMH도 최근 실적 회복을 위해 AI 산업에 적극 투자하는 중이다. 작년만 해도 총 3억 달러(약 4300억 원)를 5개의 AI 스타트업에 쏟아부었다.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만족시키는 ‘비용 절감’과 ‘개인화’를 해결하는 데 AI가 핵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LVMH의 디올 하우스는 세계 각지에서 공급받은 고품질 소재로 숙련된 장인이 장시간 제작하는 데 비해, 정확한 수요 예측이 부재한 시그너처 컬렉션 때문에 한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이때 디올은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활용해 수요를 예측하는 AI 기반 예측 분석 시스템을 도입했고, 재고 부족 35%, 초과 재고 25% 감소라는 결과를 얻었다. LVMH의 또 다른 브랜드 로로피아나도 광고를 제작하기 위해 메타의 AI 기반 ‘어드밴티지+’ 쇼핑 기능을 활용했다. 최대 150가지 조합을 자동으로 테스트하고 최적화하는 과정을 거쳤으며, 그 결과 타게팅이 정확한 광고 캠페인을 이끌어냈다. 이는 기존 52%에 해당하는 제작비 절감, 2배 더 많은 소비자 구매를 이끄는 데 일조했다.

한편 AI를 활용한 위조품 방지 기술 개발은 오랫동안 골치를 썩인 ‘짝퉁’ 이슈에도 방안을 제시한다. 위조품과 관련된 불법 활동이 온라인에서 성행하는 데 위협을 느낀 미스치프는 소비자 피해를 줄이고자 IP 통합 솔루션을 제안하는 국내 기업 마크비전의 손을 빌렸다. AI 딥러닝 기반의 탐지 기술로 전 세계 118개국, 1500여 개 마켓플레이스와 SNS를 24시간 자동 모니터링하는 마크비전 서비스 중에서도 셀러 인텔 기능이 주효했다. 이는 상위 1%의 악성 셀러가 전체 위조품의 30%를 판매한다는 사실에 입각해 위조품뿐만 아니라 그들의 오프라인 유통망까지 차단한다. 해당 솔루션을 도입한 미스치프는 6개월 만에 위조품 500여 개에 제재를 가할 수 있었고, 이후 지식재산권 침해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어 데이터 기반의 전략적 의사결정에 도움을 받고 있다.

빅터앤롤프는 2025 S/S 오트 쿠튀르 패션쇼에서 쿠튀르의 역사에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AI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메시지를 호쾌하게 띄운다.
스텔라 매카트니는 AI로 되살린 멸종 새들과 2025년 봄 캠페인을 선보인다.
빅토리아 베컴은 AI 아티스트와 협업해 ‘눈에 보이는 것 그 이상의 것’이란 슬로건을 내건 2025 S/S 광고 캠페인을 공개했다.

메이드 인 AI

제품 제작 단계에서 실제 샘플을 만들지 않고 무한히 실험할 수 있는 가상의 AI 프로그램은 작업 시간을 단축함과 동시에 적합한 출시일까지 계산해주는 이점 때문에 이미 많은 브랜드에서 사용 중이다. 언더아머와 MCM은 대략적 스케치를 몇 초 만에 3D 랜더링 이미지로 변환하는 미국 스타트업 라즈베리 AI와 협업하고 있다. 이로써 디자이너는 물리적 노고를 줄이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창의적 활동에 힘을 쏟는다. 라즈베리 AI는 설립 2년 만에 유치한 투자금 2850만 달러(약 415억원)를 가구·화장품 제품 디자인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는 데 사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H&M도 라즈베리 AI를 이용하는 패션 기업 중 하나로, 고객 반응을 미리 측정해 과잉 생산으로 인한 SPA 브랜드의 고질적 윤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더욱이 H&M은 외부 AI 디자인 툴만 수용하는 게 아니라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200여 명도 고용했다. 이로써 경쟁사 대비 6개월 먼저 신제품을 출시했고, 77개국에 흩어져 있는 매장 4298곳에 대한 지역적·문화적 특성을 파악해 낭비를 줄이고 지속 가능한 결정을 내리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AI 툴을 이용해 소비자와의 공동 창작을 도모한 푸마의 행보 역시 눈길을 끈다. 푸마는 생성형 AI 기술을 활용하는 공동 제작 플랫폼 딥오브젝트와 협업해 ‘푸마 AI 크리에이터’를 론칭했다. 이를 활용해 맨체스터 시티 공식 서드 유니폼을 팬들이 직접 디자인하는 프로젝트를 선보였는데, 수상작은 추후 2026-2027 시즌 동안 맨체스터 시티 선수가 실제 착용한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AI 패션

그뿐 아니라 AI는 환상적 비주얼로 디자이너의 무궁무진한 아이디어와 진실된 메시지를 실현하는 도구로서도 탁월하다. 버버리는 1980년대 초 영국 브라이튼 피어에서 로드 리치필드가 촬영한 아카이브 이미지를 AI 기술로 재현했다. 사진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생동감 있게 표현한 영상으로 헤리티지와 혁신의 만남을 기념한 것. 또 스텔라 매카트니는 이미 멸종한 새를 AI로 되살려 자연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한 2025년 봄 캠페인을 선보였다. ‘사랑하는 것을 지켜라’는 메시지를 담은 해당 캠페인은 전 세계 조류 종의 50%가 감소하고 있으며, 해마다 새 34억 마리가 깃털과 솜털 생산에 희생되고 있다는 사실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최근 무분별하게 복제되는 지브리 사례는 우려스럽지만,  AI 기술의 긍정적이고 의미 있는 AI 활용 사례가 아닐까 싶다. 이 가운데 얼마 전 미국 워싱턴 D.C. 순회 항소법원 판결은 주목할 만하다. 법원은 저작권법상 AI는 저자로 인정받을 수 없지만, AI의 도움으로 창작한 작품은 여전히 보호받을 자격이 있다고 판결했다. 이는 AI 활용이 늘어나는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저작권 보호를 위해서는 인간의 감독과 개입이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기술 발전 속도가 인간 윤리 의식을 앞지르는 현시점에서, 이처럼 유용한 AI 기술을 인간 고유의  도덕적 신념을 바탕으로 더욱 가치 있게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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