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깊은 도시의 시간 위에 새로운 유산을 쌓아가는 비엔나.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히며 지속가능성 면에서도 앞서 나가는 비엔나는, 기꺼이 자신들의 보물을 내어준다.

공원과 놀이기구가 어우러진 프라터 유원지.

에밀 졸라에서 영감을 받은 졸라 호텔. 오래된 건물을 개조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거리를 걸으며 빌리 조엘의 ‘Vienna’를 흥얼거렸다. 1977년 발매한 앨범 <The Stranger>에 실린 이 노래는 빌리 조엘이 비엔나를 방문한 후 작곡했다고 알려졌다. ‘가족’ ‘나이 듦’을 노래하며 하필 왜 비엔나를 떠올렸을까. “어디 불이라도 났어? 왜 그렇게 서둘러?(중략) 천천히 해, 잘하고 있어(Where’s the fire, what’s the hurry about? Slow down you’re doing fine)”라는 가사처럼 비엔나는 다른 유럽 대도시와는 조금 다른 느긋하면서도 평화로운 도시다. 도시를 대표하는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1995년 작이지만, 영화 속 주요 장면에 등장한 놀이공원, 다리는 물론 레코드점 알트&노이(Alt&Neu)와 클라인스 카페(Kleines Cafe)까지 그대로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이곳은 낮과 밤을 느긋하게 둘러볼 수 있는, 동시에 잃어버린 낭만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도시다. 

 

2구의 낮과 밤

비엔나 졸라 호텔(Zola Hotel)의 문을 열면 하얀 침대보 위에 펼쳐둔 에밀 졸라의 소설책과 빨간 사과 한 알이 반긴다. 과거 군사용으로 사용된 오래된 건물을 개조한 이 호텔은 비엔나 2구에 위치해 있는데, 주변은 한적한 주거 지역이다. 비엔나 관광청의 마티아스 슈빈들(Matthias Schwindl)은 “이 구역이 비엔나의 두 얼굴을 만나기에 제격”이라고 말한다. 유럽의 정중앙에 위치한 비엔나에서도 2구는 그 중심이다. 

비엔나가 항상 ‘세계에서 살기 좋은 도시’ 상위에 랭크되는 도시라는 걸 아는지?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녹지 비율이 60%가 넘어 어디서나 공원을 만날 수 있다는 점, 지속가능성 면에서 뛰어난 도시 중 하나로 대중교통과 자전거를 통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훌륭한 임대주택 정책으로 누구나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비엔나 2구는 자연스럽게 비엔나의 임대주택 정책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임대주택마다 이름과 준공 연도가 표기되어 있다. 졸라 호텔에서 프라터(Prater) 지역까지 걸었다.

프라터에는 비엔나 경영경제대학 캠퍼스와 새로 설립된 오피스 지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놀이공원인 프라터 유원지가 있다. 비엔나의 과거와 현재가 이곳에서 만난다. 프라터 유원지는 입장료를 내야 놀이공원에 입장할 수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천천히 돌아보다 원하는 놀이기구가 있으면 코인을 구입하면 되고, 놀이기구 탑승 가격은 4~6유로. 높이 120m를 뱅글뱅글 도는 프라터 타워부터 스릴을 만끽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원없이 누릴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놀이기구가 많다. 이 놀이기구의 영업은 밤 11시 경 종료되지만 이후에도 공원은 늘 열려 있다. 낮에는 녹색 프라터(Green Prater)로 알려진 푸르른 초원 공원에서 늦잠을 자도 좋고, 밤에는 온갖 조명 속에 놀이기구를 타며 사람들과 실컷 비명을 질러도 좋다. 스릴을 즐기지 않는 나는 대관람차로 만족했지만, 이것 역시 창문이 있는 여느 기구와 창문 없이 위가 뚫린 개방형 기구로 나뉘어 있어 대관람차치곤 상당히 스릴이 있는 편. 프라터 인근 레오폴트슈타트(Leopoldstadt)는 흔히 유대인 지구로 통한다. 특히 카르멜리터피어텔(Karmeliterviertel)은 수많은 코셔 상점, 레스토랑, 빵집, 정육점, 학교 및 종교 기관이 있는 비엔나 유대인 생활의 중심지다.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파머스 마켓이 열리고, 아침과 점심 식사 후 장을 보는 주민을 만날 수 있다. 

 

유럽의 패권을 쥐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산이 가득한 비엔나.

한국인 디자이너 송명일의 아틀리에 송.

치머 37에서 만난 소박한 비엔나식 아침 식사. 호밀빵에 염소치즈를 바르고 차이브를 듬뿍 올렸다.

비엔나의 여성들 

오늘날 ‘지속가능성’은 단지 환경에 대한 노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성별에 대한 평등과 존중도 그중 하나다. 비엔나는 여성이 주도하는 멋진 프로젝트를 만날 수 있는 도시기도 하다. 주말을 맞은 비엔나 시민은 너나 할 것 없이 카페, 와인 바에 앉아 햇볕과 함께 편안한 오후를 즐긴다. 비니페로(Vinifero)는 비엔나에서 가장 유명한 내추럴 와인 바로, 세계 내추럴 와인을 선보임과 동시에 오스트리아의 내추럴 와인을 알리는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한다. 여성 와인 컬렉티브 창립자인 클레어 위안(Claire Yuan)을 여기서 만났다. 와인 현장에서 일하는 여성의 가시성과 평등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만들고, 와인 산업 내 여성 교류를 강화하려고 2023년 초에 만들어졌다. 한편으로 1년에 한 번씩 자체 와인 페어를 진행하며 소규모 내추럴 와인을 알리고 있다. 이곳에서 훌륭한 오스트리아산 오렌지 와인을 맛보았다.

한때 오스트리아는 유대인 인구가 유럽에서 두 번째로 많은 나라였고, 이는 비엔나도 마찬가지. 그 때문에 유대인 문화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코셔 방식으로 완전 비건 프랄린을 만드는 둘체리아(Dulceria)도 그중 하나다. 팬데믹을 겪으며 이곳에 창업한 여성 쇼콜라티에는 비건일뿐만 아니라 공정하고 윤리적인 방식으로 초콜릿을 만든다. 비엔나를 방문했다면 레오폴트슈타트에 위치한 부티크 아틀리에 송(Atelier Song)에 꼭 들러볼 것. 한국인 디자이너 송명일이 운영하는, 비엔나에서 가장 멋지고 유니크한 패션 라이프스타일 숍이다. “비엔나에 온 지 이제 40년 정도 되었나요? 제가 1984년 한양대 졸업 후 이곳에 왔으니까요. 1998년에 숍을 오픈했습니다.” 송명일의 감각으로 채운 이 숍에는 그가 디자인한 의류와 아카이브북, 아스티에 드 빌라트의 소품과 독일 베를린, 스페인 바르셀로나 등에서 직접 바잉한 아이템, 아티스트 준 양(Jun Yang)의 작품까지 만나볼 수 있다. 아트북의 제목이기도 한 ‘I’ll Wear It Until I’m Dead’는 그의 철학을 단숨에 드러낸다. “비엔나에 살면서 가장 좋은 점은, 아무래도 한결같다는 것 아닐까요. 이곳은 참 평화롭거든요.” 송명일의 말이다. 아틀리에 송이 위치한 곳은 비엔나에서 가장 ‘힙한’ 골목으로 크고 작은 카페와 레스토랑, 갤러리를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유럽의 패권을 쥐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산이 가득한 비엔나.

빈 분리파의 주요 작품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레오폴트 미술관.

비엔나 어디에서나 공원을 만날 수 있다.

예술의 도시, 미식의 도시 

빈 분리파와 아르누보 건축의 본고장이며 음악의 도시인 비엔나에선 어디서나 예술적 정취를 만날 수 있다. 소규모 그룹 가이드를 진행하는 레벨투어의 바스티 & 가비의 안내로 길을 걷다 보면 모차르트가 사망한 집, 베토벤이 작곡한 아파트 등을 만나게 된다. 4년간의 휴관 후 대대적인 재개장을 알리며 에코라벨을 획득한 카를 광장(Karlsplatz)의 비엔나 박물관 카를스플라츠 본관(Wien Museum Karlsplatz)은 누구에게나 무료다. 지열에너지를 이용한 냉난방과 태양광 패널 설치, 자동으로 어두워지는 세이지 글라스를 사용해 에너지를 절감하고 있으며,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작품은 물론 빈 분리파의 주역 중 하나인 막스 쿠르츠바일이 자신의 아내를 모델로 그린 ‘노란 드레스를 입은 여인’도 만날 수 있다. 본격적인 미술 관람을 원한다면 MQ(Museum Quarter)로 향할 것. 전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큰 복합문화공간인 이곳엔 현대미술관(MUMOK)과 레오폴트 미술관 등이 있으며, 벤치에 누워 따사로운 햇볕을 쬘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광욕을 사랑하는 유럽인을 위해, 벤치는 그야말로 누울 수 있게 디자인되었다. 레오폴트 미술관에서는 세기말 빈 분리파를 이끈 주역 클림트와 실레, 오토 바그너, 콜로만 모저의 대표작을 만날 수 있다. 특히 1868년에 태어나 현대의 그래픽 디자인에 놀라운 영감을 준,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인 모저를 절대 놓치지 말 것. 규모는 작지만, 빈 분리파의 전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다만 클림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키스’와 ‘유디트’는 벨베데레 궁전 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클림트, 바그너 등이 살아 숨 쉬던 ‘세기말의 오스트리아’ 무드를 느끼고 싶다면 1908년 모더니즘 건축가 아돌프 루스(Adolf Loos)가 디자인한 루스 아메리칸 바(Loos American Bar)로 향하길.

한편, 음악과 미술의 도시로 알려진 비엔나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건 미식인 듯하다. ‘비엔나커피’로 유명한 아인슈페너와 슈니첼, 소시지에만 집착한다면 비엔나가 숨겨둔 미식 경험을 놓치게 될 것. 물론 스코피크 & 론(Skopik & Lohn)의 슈니첼과 송어 요리는 반드시 맛봐야 하지만. 비엔나 사람은 얼마나 자주 슈니첼을 먹느냐는 장난스러운 질문에 비엔나 관광청의 니키 그래저(Niki Graser)는 따스한 답변을 주었다. “슈니첼은 뭐랄까, 일요일에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죠. 슈니첼의 튀김 껍질이 곡선인 걸 알고 있나요? 우린 그걸 다뉴브강의 물결이라고 해요.”

유엔 사무국이 자리하고 있으며, 다양한 문화가 혼재된 비엔나에서는 지속가능성과 결합한 멋진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구시가의 파인코스테라이(Feinkosterei)는 오스트리아 최초의 타파스 레스토랑이다. ‘오스트리아를 경험해보라’는 모토 아래 지역에서 난 재료만 선별해 만든 음식을 적은 양으로 제공한다. 네니 암 프라터(Neni am Prater)는 비엔나와 프라터에서 가장 멋진 뷰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신나게 돌아가는 놀이기구를 바라보며 이스라엘 음식을 중심으로 한 중동 음식을 경험할 수 있다. 신선한 허브, 콩, 채소 등을 듬뿍 사용한 중동 음식은 그야말로 건강식! 1870년대에 최초로 채식주의 레스토랑이 등장한 비엔나는 어디서나 채식과 완전 채식을 만날 수 있는데, 브뢰슬(Brosl)은 팜투테이블(Farm-to-Table) 레스토랑으로 소규모 생산자를 통해 제품을 받기 때문에 메뉴가 매일 바뀐다. 로컬 무드로 아침을 즐기고 싶다면, 유기농 재료로 할머니가 직접 차려주는 치머(Zimmer) 37을 추천한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 유기농 달걀로 조리한 아침 식사를 즐길 수 있다. 다만 이곳 어디에서도 ‘비엔나 커피’는 없다. 오래된 도시 위에 새로운 유산을 쌓아가는 비엔나는 언뜻 소박해 보이지만,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기꺼이 자신들의 보물을 내어준다. 빌리 조엘의 ‘Vienna’는 이렇게 끝난다. “언제쯤 알게 될까? 비엔나가 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When will you realize, Vienna waits for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