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세상을 편하게 살아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기술은 침묵이다. 

“걘 말이 너무 많아.” 은밀한 목소리와 눈빛을 더해 누군가를 흠집 내려는 이 문장이 내심 부러운 적이 있었다. 여러 선후배와 일하며 나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피드백. 말이 너무 많은 게 흠이라면 너무 적은 것도 흠일 테니, 차라리 의사 표현이라도 확실히 하는 게 덜 억울하겠다 싶었다. 그럼에도 수년간 학습된 대화 루틴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각자의 컨펌과 배당에 파묻힌 선배에게 ‘요점만 간단히’가 미덕이라 배웠고, 커뮤니케이션 역시 명확함이 으뜸이라 여겼으니까. 그 외의 구구절절한 말은 타인을 피로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한 달에 한 번, 유독 말이 많아지는 때가 있다. 바로 시간의 압박이 증폭되는 마감 기간이다. 타깃은 주로 학창 시절 친구들이다. 평소라면 언급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누구도 묻지 않는 일과와 컨디션을 구구절절 읊는다. 오가는 텍스트 틈에 ‘근데’라는 단어를 불쑥 넣어 대화의 화두를 내게로 돌리기도 한다. 반복되는 증상에 친구들은 이 현상을 ‘마감 폭주’라고 명명했다. 평소에는 잠잠하던 수다 욕구가 왜 특정 순간에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걸까? 

댄 라이언스(Dan Lyons)의 <입 닥치기의 힘>은 강렬한 제목만큼 끙끙 앓던 문제의 원인을 짚었다. 이 책은 <포브스>와 <뉴스위크>에서 IT기자로 일한 뒤 그 경험을 바탕으로 HBO의 인기 시리즈 <실리콘 밸리>를 집필한 작가의 개인적 경험에서 시작됐다. 수다스러운 자신의 입방정에 힘겨워하는 가족의 모습에 충격 받은 그는 전 세계 여러 학자를 만나며 침묵의 힘을 좇는다. 그가 만난 전문가 중 통쾌한 한 방을 날린 이는 20년간 말과 행복의 관계를 연구한 애리조나대학교 사회심리학자 마티아스 멜(Matthias Mehl)이다. 그는 정서적 행복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는 대화의 힘에 대해 말한다. 오랜 시간 연구를 거듭한 멜은 전자 기록 장치를 이용해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는 사람의 말버릇을 발견했는데, 이들은 일인칭 단수 대명사 표현인 ‘나(I)’와 ‘나를(Me)’ ‘나의(My)’라는 단어를 다른 사람보다 자주 사용한다는 결과다. 끊임없이 자신을 탓하고 문제를 진단하려는 무의식의 흐름이 말을 통해 발현된다. 돌아보면 그동안 내가 제어하지 못한 수다는 모두 불평과 불만으로 

채워져 있었다. 말을 할수록 스스로를 더 깊은 스트레스 동굴로 밀어넣은 셈이다. 이럴 때는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나았다. 명상, 템플스테이 같은 활동의 검증된 효능을 보면 수다를 폭발시키는 대신 고요 속에 침잠하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이라는 걸 실감한다. 삶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회사라는 공동체에서도 지속 가능을 위해 침묵은 필요하다. 물론, 팀원 간 수다의 효용은 상당하다. 나 역시 그 힘을 경험했었다. 점심 식사, 회의, 미팅에서 피어난 수다는 MBTI보다 더 촘촘하게 상대를 이해할 수 있다. 필요한 정보를 제때 얻을 수도 있다. 수다가 공감으로 이어질 때 우리는 어떤 연대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해의 폭이 넓어지면서 팀워크를 지탱하는 단단한 뿌리가 된다. 이런 선순환은 수다 역시 대화의 일부라는 사실을 모두가 인지할 때 성립될 수 있다.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이라는 대화의 사전적 정의처럼 주고(Give)받을(Take) 때 비로소 성립되는 공식이다. 평등 조건이 성립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이야기는 일방적인 공격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꼰대’가 되고 누군가는 ‘요즘 애들’로 치부될 때 수다는 대화로 성립할 수 없는 얘기다. 이때 할 수 있는 작은 배려가 침묵이다.

나의 침묵은 곧 상대의 입을 연다. 14년 차 아나운서이자 스피치 컨설턴트인 유튜버 흥버튼 정흥수는 대화를 시작하기 전 갖춰야 할 자세로 ‘타인과의 분리’를 강조한다. “내 이야기는 내 선에서 끝내고, 타인의 이야기는 타인의 입장에서 들을 때 더 나은 대화를 할 수 있다”며 평등한 관계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이어 “대화를 이어지게 하는 힘은 관심이다. 관심이 있으면 질문이 나오고, 그 질문은 상대를 향하기 마련이다. 대화의 질을 높이고 싶다면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심의 시작은 내 입을 닫고 남의 말을 듣는 것에서 시작된다. 필(必)소통의 시대가 강요하는 소통을 피할 수 없다면 선택할 수 있는 건 침묵뿐이다. 내 목소리 대신 타인의 목소리가 오롯이 귓가에 박힐 때 대화의 물꼬가 트일 수 있다. 침묵은 곧 타인의 입장에 집중하는 활동이다. 시끌벅적한 세상을 다정하게 만드는 마법의 애티튜드는 귀를 열고 입을 닫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