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롱 패딩 가고 알록달록 쇼트 패딩이 왔어요. 지금 안 사면 남은 겨울이 후회로 얼룩질지도 모르죠. 후회는 털 부츠 안 산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날씨가 제법 추워졌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나도 모르게 캐럴을 흥얼거릴 때라든지, 평소 쳐다보지도 않던 ‘오뎅’ 국물이 생각날 때, 그리고 거리에서 삼삼오오 검은 패딩 점퍼를 입은 무리를 보게 될 때가 그렇다. 우리는 언제부터 패딩의 민족이 되었나 생각했다. 어린 시절 아빠는 가을이 저물어갈 때쯤 ‘돕바’를 찾았다. 그즈음이 되면 날이 많이 추워졌구나 싶었다. 테니스를 치러 갈 때나 골프장에 갈 때도 운동복에 검은 ‘돕바’ 하나만 걸치면 만사가 편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돕바’도 거위나 오리의 충전재를 사용해 따뜻하고 푹신하게 몸을 데워줬다. 구 ‘돕바’, 현 패딩. 검은색 롱 패딩이 국민템이 된 것은 아마 광고의 영향이리라.

2000년대 초반 겨울 스포츠와 관련된 스포츠 브랜드에서 겨울에도 따뜻할 수 있도록 패딩 광고를 할 무렵, 어른들이 보온을 위해 입던 패딩은 어느새 쿨한 겨울 교복이 되고 말았다. 중고등학생이 선택하고 나자 패딩은 단숨에 겨울 쇼핑 리스트 1위를 꿰찼다. 스포츠 브랜드의 1년 장사가 겨울에 패딩을 얼마나 판매하느냐에 따라 판가름나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길이도 제각각, 컬러도 다채롭게 소개되어도, 어느 외국인이 한국의 주차장에 검은 차, 흰 차, 기껏해야 회색 차 정도가 가득 메운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일화처럼 컬러에 겸손한(?) 대다수 사람에게는 블랙이 기본, 화이트가 옵션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탈코로나로 인식하는 2022~2023 가을/겨울, 패딩은 점차 짧아져 허리춤을 웃돌게 되었고, 갖가지 컬러는 물론 패턴과 광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자랑하고 있다. 돌아온 Y2K 트렌드, 레트로 스키웨어의 인기 영향도 있지만, 무엇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따뜻하면서도 멋스러운 아우터를 찾으려는 니즈에 부합해 패딩의 형태와 색이 진화되었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하는 바다.

이는 벨라 하디드, 켄달 제너, 헤일리 비버, 에밀리 라타이코프스키 등 슈퍼 셀럽의 분방한 스타일링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중 노스페이스 눕시 패딩은 이들이 키웠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그중에서도 에밀리 라타이코프스키는 다양한 컬러와 부피감의 노스페이스 눕시 패딩을 다채로운 타이츠나 트레이닝팬츠, 니트 비니와 선글라스 등과 매치해 진정한 겨울철 원마일웨어 룩을 완성했다는 평을 듣는다. 런웨이에서는 특유의 스트리트 무드를 더해 퍼 후디를 장착한 쇼트 패딩을 선보인 디젤, 모던한 실루엣에 장식적인 머플러를 덧붙여 위트 있는 패딩을 완성한 디온 리, 슬릭한 맥시스커트에 부피감 있는 쇼트 패딩을 언밸런스하게 매치한 엘리엇 에밀 등에 눈길이 간다. 패딩 점퍼 특유의 퀼팅 기법을 거부한 로에베와 릭 오웬스, 화사한 컬러와 패턴을 입힌 오프화이트와 모스키노 등도 눈여겨볼 것. ‘그 거대하고 둔한 패딩을 왜 사는지 정말 모르겠어!’라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돌려놓은 마성의 쇼트 패딩. 아직도 생각만 하고 있다면, 지체 말고 트렌드에 편승해보자. 가끔은 애인보다 쓸모 있고 푸근한 그것. 쇼트 패딩 찬가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