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DIC THINGS
겨울에 북유럽 절대로 가지 마라. 가장 먼저 이 말을 해두고 싶다. 그러나 피치 못하게 겨울에 북유럽에 가야 한다면, 그럼에도 달리 가고 싶은 곳이 없다면 미리 마음을 먹는 게 좋다. 그러니까, 거기에 좋은 날씨란 없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일에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건 늘 휴가일 수밖에 없다. 연말이 다가오고, 휴가는 대부분 쓰지 못했고 그런 회사원의 흔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달리 가고 싶은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진정한 스칸디나비아를 경험하는 거지.” 함께 떠난 여행 친구에게 한 말이다. 현대 도시인의 대안으로 떠오른 북유럽 라이프스타일의 핵심이 무엇인가. 긴 겨울 속에서 안락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여름에 여행한 사람들은 진정한 스칸디나비아는 못 보고 간 거다. 그런 위안을 주워대며 첫 목적지인 스톡홀름으로 떠난 것은 11월 중순이 지나서였다. 북유럽에 도착하고 하루 만에 알게 된 것은 북유럽의 밤이다. 이곳에 해라는 건 없다. 해는 늦게 뜨고 일찍 지고, 짧은 낮은 미스트 같은 희미한 안개에 젖어 있다. 오후 3시 반이면 어둠이 내려 길고 긴 밤 시간이 계속된다. 비는 매일같이 구슬프게 내리지만 우산을 들면 안 된다. 이곳에선 오직 노인들만 우산을 드니 대신 비니를 쓸 것. 코펜하겐에 가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인 빌헬름 함메르쇠의 그림을 비로소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어둡고 흐려서, 아련하기까지 했던 그 그림이야말로 스칸디나비아를 정직하게 담고 있었다는 것을. 코펜하겐에서 나고 자란 화가가 그린 그림은 하이퍼리얼리즘에 가까웠다는 것을.
미술관을 돌아보는 법
오슬로도 헬싱키도 베르겐도 있는데 스톡홀름과 코펜하겐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이 두 도시가 많은 소장품을 지닌 미술관과 박물관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스톡홀름의 미술관은 대부분이 무료이며, 코펜하겐의 미술관은 무료인 경우가 드물다. 때문에 스톡홀름의 미술관은 상대적으로 느긋하게 돌아볼 수 있지만, 코펜하겐은 값비싼 ‘코펜하겐 카드’의 유효기간 동안 발에 불이 나도록 돌아다녀야 한다.
스톡홀름의 대표적인 미술관은 세계 미술 사조와 함께 북유럽 미술 전반과 산업 디자인의 시대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국립미술관이다. 유럽에서도 오래된 미술관으로 손꼽히는 이곳은 5년간의 대대적인 공사를 마치고 재개관했다. 말뫼 뮤지엄과 함께 스웨덴 최고의 현대미술관으로 손꼽히는 모데르나 뮤세트(Moderna Museet)와는 다리 하나면 이어진다. 특히 이 지역은 오페라하우스, 극장, 각종 미술관 등이 밀집되어 있으니 오페라나 연극을 관람해봐도 좋다. 스톡홀름의 옛 모습을 간직한 감라스탄을 지나 핫 플레이스가 된 쇠데르말름으로 향하면 사진 전문 미술관 포토그라피스카(Fotografiska)가 있다. 유료로 운영되며 세계적 사진가의 전시가 상시 열리기에 놓칠 수 없는 곳이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세바스치앙 살가두와 지미 넬슨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곧 뉴욕에도 갤러리를 오픈할 예정이라고.
디자인 도시 코펜하겐 역시 막강한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 국립 미술관은 빌헬름 함메르쇠, 데이비드 야곱슨, 아이나르 닐슨과 같은 북유럽 화가는 물론 마티스 소장품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인테리어와 디자인에 관심이 많다면 덴마크 디자인뮤지엄은 천국과도 같은 곳이고(특히 핀율 하우스가 현재 공사 중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칼스버그 맥주 가문이 소유한 조각미술관 글립토테크는 이집트, 지중해 조각부터 조각의 역사를 총망라하며, 프랑스를 제외한 로댕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한 미술관으로 손꼽힌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해야 할 미술은 코펜하겐 컨템퍼러리(CC)에서 만날 수 있다. 이 밖에도 미술관이 넘치지만 하루는 기차를 타야 한다. 루이지애나 뮤지엄에 가기 위하여.
루이지애나 뮤지엄은 코펜하겐에서 북쪽으로 기차로 약 1시간 거리다. 바다를 바라보며 자연, 미술, 건축이 하나 되는 이곳에서는 3500여 점에 달하는 기존 소장품 외에 잭슨 폴락, 데이비드 호크니, 올라퍼 엘리아슨의 특별전도 열린다. 풍경에 녹아든 조각 정원. 거대한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호수 풍경과 어우러진 자코메티의 전시실에서는 모두가 걸음을 잠시 멈춘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이라는 명성은 그렇게 얻어졌다.
숨어드는 공간, 드러나는 맛
스톡홀름과 코펜하겐은 맛으로 유명하지만 그 내용은 사뭇 다르다. 스톡홀름은 익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스웨덴식 미트볼의 고장으로, 많은 여행자의 증언처럼 ‘이케아 미트볼보다 맛있는’ 미트볼을 맛볼 수 있다. 뭉개지지 않고 알알이 살아 있는 링곤베리잼을 곁들인 미트볼은 스웨덴 할머니와의 없던 추억마저 조작해줄 법한 맛이다. 하지만 스톡홀름은 역시 음식보다는 피카(Fika)다. 스웨덴어로 ‘커피 브레이크’를 의미하는 피카는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 차 한 잔의 여유를 뜻하는데, 스웨덴의 영혼이나 다름없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푸드 칼럼니스트인 애너 브론슨의 <피카>에 따르면 스웨덴 사람들은 하루 두 번 피카를 가지며, 커피나 차에 반드시 달콤한 빵과 과자를 곁들여야만 한다. 스톡홀름 거리를 걷다 보면 한 블록을 채 지나기도 전에 고소한 냄새가 난다. 아무리 한적한 길에 위치한 카페라도 어김없이 피카는 벌어지고 있다(덴마크에도 비슷한 것이 있다). 스톡홀름만 해도 지점이 여러 곳인 파브리크(Fabrique), 3대가 함께 피카를 즐기는 장면을 볼 수 있는 베테-카텐(Vete-Ketten), 달콤한 조각케이크의 향연이 펼쳐지는 카페 60, 빈티지한 무드의 스투레카텐(Sturekatten), 카페 파스칼과 아크네 쇼핑으로 지친 사람들의 발을 쉬게 해주는 시스트라나 안데르손(Systrana Anderson) 등에서 커피와 디저트, 때로는 브런치를 먹다 보면 나쁜 날씨는 그만 잊게 된다. 너무 포근하고 따뜻해서.
한편, 덴마크 코펜하겐은 최근 1년간 세계 미식 트렌드를 주도해온 ‘뉴 노르딕 퀴진’의 성지다. 전통적인 방식에 혁신과 우아함을 더한 뉴 노르딕 퀴진은 미식가들을 사로잡았고, 음식에 큰 열정이 없는 사람들조차 노마(Noma)의 르네 레드제피는 안다. 그리고 지금 코펜하겐의 미식을 좌우하는 것은 레드제피의 후예들이다. 인당 300유로 이상으로 비쌀뿐더러 예약도 거의 불가능한 노마에서의 한 끼는 부담스럽더라도, 코펜하겐은 맘먹고 찾아가볼 만한 수준 높은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오래된 정육점 거리를 개조한 곳에 위치한 피스크바(Fiskbar)에는 미식 경험을 위해 이 도시를 찾은 사람들을 위해 즉석에서 키친 투어를 진행하기도 한다. 비밀스러운 키친을 탐험하는 기회를 마다할 수 없는 일. 피스크바의 내부는 열 몇 명의 셰프가 유기적으로 일하고 있었고, 신선한 해산물과 야생의 향이 살아 있는 허브, 일반적으로 서양에서 먹지 않았던 해조류 등이 부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코포코(Cofoco)라 불리는 ‘Copenhagen Food Collective’ 그룹은 코펜하겐에만 여러 개의 레스토랑을 가지고 있는데, 이 중 수확이라는 의미의 회스트(Host)는 5코스를 주문하면 깜짝 요리와 함께 8코스를 만들어주며 손님을 감동시킨다. 한국계 셰프가 주방을 지휘하는 108 레스토랑과 바르(Barr)는 크리스티안스하븐(Christianshavn) 섬에서 코펜하겐 항구를 바라보며 이웃해 있지만 음식 스타일은 사뭇 다르다. 이들은 서로 멋진 레스토랑임을 추켜세우는데, 노마의 캐주얼 버전으로 불리는 108은 좀 더 섬세하고 우아하며, 바르는 호기롭다. 어느 쪽이든 멋진 선택이 될 것이다. 딱 한 가지 걱정해야 할 것은 호주머니 사정이다. 가뜩이나 높은 물가로 유명세를 떨치는 이 도시에서 미식을 즐기는 경험은 그만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 하지만 이곳만의 매력으로 가득한 레스토랑을 순회하다 보면 반쯤은 자포자기한 채 외치게 된다. 회사를 한 달 더 다니자고.
이리저리 피카를, 노르딕 퀴진을 즐기면서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크리스마스 마켓은 겨울에 북유럽을 여행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즐거운 덤이다. 11월이면 이미 북유럽의 도시는 크리스마스 무드에 접어든다. 일부러 찾지 않아도 될 정도로 곳곳에서 열린다. 뱅쇼, 나무로 만든 호두까기인형, 북유럽식 트리와 함께 소시지, 샌드위치, 수프 같은 노천 음식을 즐기는 사이 은은한 전나무 향과 시나몬, 아니스 향이 풍겨온다. 스칸디나비아식 겨울은 바로 그 향으로 완성되고, 여행자들은 밝은 금발의 사람들 속에서 긴긴 밤 속을 여행하는 법을 배운다. 어떤 나라의 겨울은 아주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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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허윤선
- 포토그래퍼
- HUR YOON S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