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파르 울리엘이라는 남자
음울한 매력의 영화 <생 로랑>의 주인공이자 차갑고 야성적인 블루 드 샤넬의 뮤즈. 가스파르 울리엘을 색으로 표현하자면 깊고 진한 파란색에 가깝다.
샴푸 후 대충 손으로 털어 말린 듯 조금은 헝클어진 갈색 더벅머리,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 이게 바로 가스파르 울리엘의 첫인상이었다.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다른 한 손으로는 녹취를 위해 켜둔 에디터의 핸드폰을 자신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리는 곳을 찾아 이리저리 옮겨주던, 다정한 시선을 가진 프랑스 남자. 천재 디자이너의 위태로운 눈빛을 그대로 보여준 영화 <생 로랑(Saint Laurent)>과 미소년에서 살인마로 변해가는 섬뜩한 이중성을 여실히 드러낸 영화 <한니발 라이징(Hannibal Rising)>의 그 광기 어린 남자를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 우리에겐 아직 익숙지 않은 얼굴이지만 사실 가스파르 울리엘은 프랑스 내 연기파 배우로 손꼽히는 유망주다. 12살 때부터 연기를 시작했고, 그 후 영화 <인게이지먼트(Un Long Dimanche De Fiancailles)>, <스트레이드(Strayed)>, <라스트데이(Le Dernier Jour)>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국내 팬들에게 본격적으로 눈도장을 찍기 시작한 것은 2007년 영화 <사랑해, 파리(Paris, Je T'Aime)>와 <한니발 라이징>부터. 소년과 남자를 넘나드는 깊고 푸른 눈, 특유의 서정적이면서도 우울한 이미지가 더해져 그의 연기에는 항상 ‘순수와 관능의 사이를 영리하게 오가는 배우’라는 평가가 따라다녔다. 곧 인터뷰가 시작되었고 그는 조금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진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상냥한 그의 푸른 눈이 더욱 깊고 파래지는 순간이었다.
생 로랑의 삶은 이미 몇 번의 영화로 재조명되었기에 생 로랑의 역할이 주는 부담감이 컸을 것 같아요.
영화를 준비할 때부터 어려움이 많았어요. 사실 우리가 이 영화를 준비할 때 생 로랑과 관련된 또 다른 영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거든요. 경쟁 상대가 있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죠. 그것도 같은 시기에! 게다가 그 영화는 생 로랑의 동반자이자 조력자였던 피에르 베르제의 지원을 받았어요. 그런데 이런 불리함이 새로운 장점이 되었죠. 생 로랑 메종과 피에르 베르제의 통제를 받지 않다 보니 오히려 우리 영화에는 예술적인 자유로움이 있었거든요. 영화 <생 로랑>은 단순한 자서전적인 영화가 아니에요. 그분의 삶을 서사적으로 펼쳐 보이기보다는 예술가로서의 창조적인 면모들을 보여주는 데 주력했어요. 영화는 아주 구체적으로 1968년 5월 혁명부터 80년대까지만 집중 조명해요. 5월 혁명은 기존 가치와 질서에 전면적으로 저항하는 사회변혁운동이었고, 이후 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정치와 문학, 예술이 송두리째 변화하기 시작했죠. 생 로랑은 세계가 급변하던 그 시기를 아주 영리하게 잘 간파했고, 그의 기민함은 패션으로 그대로 재현되었어요. 우린 바로 그 시기의 생 로랑의 내면을 충실히 보여주고 싶었어요.
천재이면서도 나약하고 광기 어리면서도 늘 외로운, 생 로랑은 복잡한 사람이었어요. 당신이 연기한 생 로랑은 어떤 사람에 가깝나요?
제가 생 로랑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아요. 생 로랑은 몇 가지 단어로 설명되기에는 너무도 섬세하고 복잡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타인의 삶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언제나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단지 제가 연기한 생 로랑은 좀 더 종잡을 수 없는, 신비로운 인물로 보여지길 원했어요. 영화가 보여주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생 로랑은 20~30대의 남자였어요. 커리어에서는 승승장구했지만 개인의 삶은 늘 불안하고 위태로웠죠. 음울하고 지적인 완벽주의자, 그러면서도 가끔 행복한 미소를 보이는 남자. 미치도록 매력적이지만 손에는 결코 잡히지 않아 허망한, 그런 사람이요.
소셜 미디어를 전혀 하지 않고 집에 TV도 없다고 들었어요.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치고는 특이해요.
제 직업은 배우예요. 제 삶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일정 부분 늘 대중에게 공개되어 있죠. 굳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까지 생활을 일일이 나열하고 싶진 않아요. 사람들은 말하더군요. 언젠가 소셜 미디어의 팔로워 숫자가 배우 선정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고요. 소셜 미디어가 영화 홍보 등에 가장 효과적인 상업 도구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이미 패션 모델들에게는 이런 룰이 적용되고 있고요.
굳이 멀리할 필요는 없잖아요.
아직 주저하는 마음이 커요. 소셜 미디어가 얼마나 강력한 도구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고 또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몰라요. 하지만 최대한 저항하고 싶어요. 두렵거든요. 다들 손바닥 안 작은 스마트폰에 빠져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도피하는 것 같아요. 얼굴을 보고 서로의 감정을 느끼며 해야 할 말을 감정 없는 텍스트로 대신하죠. 주변을 살피는 여유도 사라지고요. 전 사람과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애기하는 게 좋아요.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그렇다면 하루의 시간은 주로 어떻게 채우며 살아나가요?
운동을 하고, 박물관도 가요. 친구들과 맥주 한잔도 즐겨 하죠. 되도록 집에 있기보다는 밖에 나가려 노력해요. TV는 없지만 주로 비디오 프로젝트로 영화를 보고요. 사실 영화도 영화관에서 보는 걸 더 좋아하죠. 집에서 보는 영화와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는 다르거든요. 옆자리에 모르는 사람이 앉더라도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거니까요. 그건 정말 중요한 문제예요. 전 정말이지 전통적인 방식이 좋아요.
전형적인 젊은 남자의 삶과는 거리가 머네요. 조금 냉소적이거나 무심한 성격일 것 같아요.
그냥 아날로그적인 삶이 더 편하고 좋은 것뿐이에요. 배우라서 촬영을 위해 해외에 머무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파리에 돌아가면 주로 못 만났던 친구들을 만나는 데 시간을 투자하는 것뿐이고요. 온라인 세상 대신 현실에 관심을 가지려 노력하죠. 그렇다고 인터넷을 아예 접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단지 스마트폰으로 시도 때도 없이 뉴스를 클릭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를 통해 보는 것이 다를 뿐이죠. 전 시사 문제에도 관심이 많거든요. 아, 3년 전부터는 피아노도 배우고 있어요.
피아노라니, 음악과 당신은 참 잘 어울리네요.
아직 잘 못 쳐요 어릴 때부터 배웠더라면 더 빨리 늘었을 텐데 진도가 더디게 나가니 속상해요. 하지만 피아노 건반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듣노라면 즐겁고 행복해져요. 제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그토록 다양한 리듬과 음률이 만들어진다는 게 신기하잖아요. 재능은 별로 없지만 음악을 사랑하거든요. 예술 장르 중에서 우리 마음에 가장 직설적으로 꽂히는 것이 바로 음악인 것 같아요. 듣는 순간 바로 감정을 건드리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죠. 그림도 마찬가지고요. 머리로 이해해야 하는 영화나 문학과는 달라서 더 매력적이에요.
또 다른 취미 생활은 없나요?
이베이에서 오래된 포도주 사기. 이게 은근 중독적이에요. 이베이에서 와인 카테고리를 들여다보며 사고 싶은 포도주를 찾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부모님이 모두 패션 디자이너예요. 패션에 대한 생각이 남다를 것 같아요.
파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에게 패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숙명과도 같죠. 게다가 배우라는 직업 때문에 전 더욱 그러하죠. 그런데 광고를 찍고 컬렉션장에 가는 등 패션 관련 일을 할 때는 늘 이질적인 기분을 느껴요. 인사이더가 아니라 방문객 같은. 실루엣이 아름답고 원단이 근사하다는 것을 알아볼 수는 있지만 전문적인 지식은 없어요. 심지어 쇼핑도 하지 않죠. 전 결코 패션 피플이 아니에요.
평소 어떤 스타일을 즐겨 입는지 궁금해요.
어느새 턱시도가 잘 어울리는 서른 살이 되었어요. 깔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것이 근사해 보이기 시작했어요. 평소에는 캐주얼하지만 우아한 디테일이 더해진 옷을 좋아해요. 심플하지만 핏이 멋진 셔츠나 베이식한 디자인이지만 색감이 좋은 재킷처럼요. 절대 운동복이나 후드티를 입고 외출하진 않죠. 난 프랑스인이니까요! 패션은 자신의 라이프스타일과 잘 맞아야 가장 멋스러운 거예요. 파리에서는 늘 바이크를 타고 다니다 보니 가죽 재킷과 가죽 부츠도 애용해요.
향수 역시 라이프스타일과 잘 맞아야 하는 아이템이에요.
제게 향수는 옷보다 훨씬 친밀감 있는 그 무언가예요. 옷은 갈아입을 수 있지만 내 몸의 향기는 그럴 수 없잖아요. 향기란 그 사람의 정체성의 일부 같은 거예요. 똑같은 향수라도 누가 뿌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피부와 화학적 작용을 해서 결코 같은 향이 나지 않아요. 그렇기에 향수란 훨씬 더 감각적이고 개인적인 아이템이죠. 저는 우디하고 스파이시한 향을 좋아해요. 남을 위해 향수를 뿌린다기보다는 제 자신을 위해 향수를 뿌리죠. 그래서 피부에 직접 뿌리는 걸 선호해요. 특히 목 쪽에. 그래야 그 향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으니까요.
자신을 향기로 표현한다면 어떤 향에 가까울까요?
어릴 때 사람들이 제게 늘 말했어요. ‘넌 또 딴 생각에 빠져 있구나.’ 맞아요. 늘 나만의 세계에 빠져들곤 했어요. 생각이 많은 아이였죠. 어른이 된 저를 보고 사람들은 미스터리하다고들 말해요. 뭔가 속내를 알기 어려운 사람이라고요. 아마도 내성적인 성격 탓일 거예요. 그런 면에서 블루 드 샤넬이 저와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러니 제가 모델로 발탁되었겠지만요.(웃음) 어두운 밤이나 깊은 물속을 연상시키는 진한 파랑, 신비로운 그 색깔이 저와 비슷하거든요. 처음 블루 드 샤넬을 만난 2010년에는 오 드 트왈렛이었어요. 진하지만 그 속살은 투명해서 햇살이 비추면 청량한 파란 아우라가 생기는. 올해는 오 드 퍼퓸으로 출시되었는데 좀 더 복잡하고 신비로운 향으로 변했어요. 지적인 느낌까지 더해졌죠. 마치 청년에서 남자로 성장하는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것만 같았어요.
가스파르 울리엘을 더 잘 알고 싶다면, 한국의 독자들에게 어떤 영화를 보라고 추천하고 싶나요?
물론 <생 로랑>! 그리고 2003년 앙드레 테시네 감독과 함께 촬영한 영화 <스트레이드>도요. 18살이었던 전 엠마뉴엘 베아르를 사랑하는, 비밀이 많은 남자를 연기했죠.
이 영화를 추천하는 이유는?
이 두 영화에서 연기를 제일 잘했거든요.(웃음)
“제게 향수는 옷보다 훨씬 친밀감 있는 그 무언가예요. 옷은 갈아입을 수 있지만 내 몸의 향기는 그럴 수 없잖아요. 향기란 그 사람의 정체성의 일부 같은 거예요."
최신기사
- 에디터
- 뷰티 에디터 / 이미현
- Photography
- Courtesy of Chan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