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그루지야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에 속해 있던 시절, 그루지야는 단조롭고 지루한 국가였다. 하지만 연방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지금의 그루지야는 그 어느 때보다 밝고 아름답게 빛난다.
카즈베기 고원의 아침은 하루 중 가장 근사한 시간으로 꼽힌다. 코카서스(Caucasus) 산을 사랑했던 러시아 시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일찍 이 그루지야의 이 험난한 산맥을 ‘몰골이 좀 험해도 아주 멋진 침대’라고 표현했다. 물론 침실의 침대처럼 아늑하지는 않지만, 수탉 소리에 잠을 깨고 나서 바로 협곡의 풍경을 내다볼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근사한 경험이다. 협곡에 홀로 우뚝 솟아 있는 교회의 첨탑을 자세히 바라보면 그 동안 봤던 교회의 첨탑과는 다르게 생겼다는 것을 눈치 채게 된다. 동그란 삼각뿔을 닮은 납작한 첨탑은 크레파스 같기도 하다. 그 옆에 있는 건 물의 첨탑 모양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산자락 위에 나란히 서있는 두 교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불경하게도 초록색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소금 병과 후추병이 떠올랐다.
사실 코카서스의 고지대는 알프스보다 더 험난하고 혹독한 것으로 유명 하다. 특히 산등성이는 어찌나 가파른지, 한때 이곳에 둥지를 틀고 살았던 체르케스 부족이 사용하던 긴 칼인 샤슈카(Shashka)의 칼날을 연상 시킨다. 가장 높은 것부터 차례차례 줄지어 있는 봉우리들의 모습은 마치 빽빽하게 들어선 출근길 전철 안의 승객들처럼 보인다. 그리고 해가 뜨고, 봉우리에 걸려 있던 구름이 갈라지는 순간, 카즈벡 산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여행자들이 그루지야에 매혹당하고, 그루지야 사람들이 자신들의 땅이 신의 가호를 받은 낙원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를 비로소 이해 할 수 있게 될 만큼 동 틀 무렵의 카즈벡 산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풍경이다. 떠오른 해가 눈이 쌓인 동쪽 산등성이를 비출 때면, 산은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눈부시게 빛난다. 이토록 근사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장소는 다름 아닌 그루지야 카즈베기 지방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인 스테판츠민다(Stepantsminda)에 자리 잡은 룸스 호텔이다. 여전히 소떼가 거리를 누비고, 말이 여기저기 흩어져 풀을 뜯어 먹는 스테판츠민다는 시골보다는 조금 번화한 읍내 같은 곳이기에 이토록 세련된 호텔이 있다는 사실은 다소 놀랍다. 이곳이 소비에트 연방 시절, 그루지야의 국가 유공 자들을 위한 리조트였다는 사실은 더욱! 당시에는 네모난 건물 한 채만 덩그러니 서있었던 황량한 곳이 지금은 외관 전체를 목재로 감싼 근사한 호텔로 재탄생한 거다.
호텔 내부가 전부 목재로 되어 있어서 얼핏 알프스나 북유럽의 산장에 와 있는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루지야만의 특색은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절반 이상의 벽이 벗겨지고, 워낙 바닥이 낡다 보니 개조하는 과정에서 그루지야 색채를 자연스럽게 입힐 수 있었던 것이다. 로비에는 몸을 깊숙이 파묻을 수 있는 소파와 팔걸이 의자가 가득한데, 러시아어, 영어로 된 여행 서적을 꽂아놓은 책장과 투숙객끼리 대화를 나누기 좋은 커피 테이블, 보드게임 등 즐길 거리가 곳곳에 놓여 있다. 곳곳에서 온 여행객들이 제각기 체크인과 체크아웃을 하고 흩어지는 대부분의 호텔 로비와 달리, 이곳에는 그루지야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따스한 환대가 곳곳에 배어 있다. 테이블을 다 합쳐봐야 12인석 남짓한 레스토랑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런 조합은 투숙객 간의 대화를 유도한다. 매일 호텔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일은 룸스 호텔에서는 낯설지 않다.
호텔 벽을 따라 길게 펼쳐진 넓은 데크는 느긋한 오후를 즐기기에 최고 의 장소다. 호텔 데크에서 할 게 뭐가 있냐 싶겠지만 광활한 하늘, 산등성이 위로 떠오르는 태양, 시시각각 변하는 산세를 감상하는 일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일부 고원지대에서만 볼 수 있는 되새, 친근한 참새와 딱새 등 끊임없이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도 즐겁기는 마찬가지다. 따스한 바람이 혀끝에 닿을 때면 달콤한 셔벗을 먹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저녁이 되면, 사람들은 담요를 둘러쓰고 앉아 붉게 변해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때때로 술잔을 부딪치기도 한다. 하늘은 밤이 되어도 지루하지 않다. 구름이 협곡 아래로 달리는 기차를 스쳐가고, 시원한 바람이 불고, 어둠이 까맣게 내릴 때면 마치 해변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조금 더 활동적인 사람들은 사륜 오토바이나 자전거, 등산, 패러글라이딩 등 호텔 에서 소개하는 다양한 모험 활동을 즐기기도 한다. 남보다 많은 아드레 날린이 분비되는 사람이라면 등산이나 패러글라이딩에 도전할 수도 있 을 것이다. 겨울에는 호텔에서 헬리 스키를 권하기도 한다.
시내에는 이 고장 출신의 19세기 작가 알렉산더 카즈베기에게 헌사한 박물관이 있다. 카즈베기는 주로 산사람들의 삶에 관한 글을 썼다. 박물관은 한때 그의 집이었던 곳으로, 옆집에는 체인을 두른 사자상 조각으로 장식된 가족 예배당이 있다. 이제는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린 소비에트 연방 시절이지만, 한때 이 외진 곳에서 누군가가 영위했을 근사한 삶을 간접적으로 음미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알렉산더 카즈베기보다 더 역사적인 그루지야의 영웅을 만나고 싶다면 카즈베기 인근에 자리한 작은 마을인 ‘스노(Sno)’로 향하면 된다. 스노는 그루지야 동방정교회의 성자로 숭배된 일리아 2세의 고향으로, 그의 생가는 고대 망루의 그림자 속에 서있다. 알렉산더 카즈베기 박물관의 사자 조각과 비슷한 스타일의 석조상으로 장식되어 있긴 하지만, 이 여행이 주는 진정한 즐거움은 여정 자체에 있다. 부드럽게 산등성이를 흐르는 구름, 보랏빛 꽃과 하얀 클로 버, 흐드러지게 핀 오렌지와 복숭앗빛 양귀비로 가득한 벌판 등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객실 창문으로 보이는 교회를 직접 찾아가는 모험에도 도전해볼 수 있 다. ‘순례길’이라고 불리는 이 3시간짜리 프로그램에 참가하면 제법 난이도가 있는 산행길을 만난다. 여행자들이 붐비는 성수기에는 교회에서 동 방정교회 연극 공연을 펼치기도 하는데, 교회 내부는 어두컴컴하고 습하기 그지없지만 성가대의 노래는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을 울린다. 그루지야 사람들의 영혼이 있다면 바로 이런 음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노래가 울려 퍼지는 동안 예배에 참석한 신자들은 촛불을 한 명 한 명 차례로 옮기며 기도를 했고, 어린 수도승은 와인을 작은 성배에 따라 붓는다. 성화가 그려진 석조벽 앞에 선 신부는 성수에 담근 채찍을 성체를 모시러 나온 신자들 머리 위로 휘둘렀다. 독특한 광경이 었다.
교회 순례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기 직전에 배고픔을 달래고 싶다면 스테판츠민다에도 몇 군데의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으니 그곳으로 향하면 된다. 현지인처럼 그루지야의 정통식을 즐기고 싶다면 광장에 위치한 ‘쇼 레나스 레스토랑(Shorena’s Restaurant)’으로 향하자. 아주 기본적인 메뉴를 투박하게 내놓는 시골 식당이지만 자두로 만든 새콤한 ‘트케말리 (Tkemali)’ 소스를 뿌린 케밥, 짭짤한 화이트 치즈로 속을 채운 전병인 ‘카차푸리(Khachapuri)’를 비롯해 중세의 동전주머니처럼 생긴 그루지야의 만두 ‘킨칼리(Khinkali)’를 맛볼 수 있다. 먹는 방법도 흥미롭다. 막대기로 만두를 집어든 후 한입 베어 물어 뜨거운 육즙을 맛본 후에, 다시 접시 끝에 막대기를 내려놓으면 된다. 지역 맥주인 마운트 카즈벡 라거를 곁들이는 것도 잊지 말자. 정신없이 음식을 먹다 보면 어느새 맥주병에 그려진 산 그림에 시선이 머물게 된다.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진 진짜 산을 바라본다. 내일도 저 산에는 해가 솟아오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이렇게 매일매일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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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토그래퍼
- 톰 파커
- 글
- 조나단 바스타블 (Johnathan Bast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