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애의 연기 인생

그녀는 데뷔 40여 년이 지난 배우다. 그동안 가장 아름다운 얼굴로, 그보다 더 빛나는 연기로 항상 우리와 함께였다. 그런 김영애가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나랑 이런 사진을 찍을 생각을 했어요?”

실크 소재의 검은색 블라우스는 아뇨냐(Agnona). 가죽과 크리스털 소재 목걸이는 피버리쉬(Feverish).

실크 소재의 검은색 블라우스는 아뇨냐(Agnona). 가죽과 크리스털 소재 목걸이는 피버리쉬(Feverish).

촬영 중인 영화는 재미있어요? 요즘 영화에서 자주 보게 되네요.
<애자>, <내가 살인범이다> 하고서 <변호인>을 찍었어요. <현기증>이라는 저예산 영화도 찍었어요. 매니저들이 이건 칸 영화제 갈 영화라고 해서.

저예산 영화면 현장이 녹록하진 않았겠어요.
<현기증>이 제작비 1억짜린가, 2억짜리인가. 그래도 영화 다 찍고, 먹을 거 주고 해요. 개런티가 없어서 그렇지.

개런티 없이 출연을 결심할 정도면 보통 영화가 아닌가 봐요?
시나리오가 좋았어요.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이야기인데, 우연찮게 일어난 일로 한 가족이 망가져요. 지극히 평범한 엄마가 사건을 겪으면서 점점 미쳐가요.

광기 있는 연기도 필요했겠네요.
완전히 미쳐 있었어요. 최근 들어서 제게 강한 역만 들어와요. 그래서 일부러 <변호인>의 국밥집 아줌마를 했어요. 예전에는 그런 순한 엄마 역할을 더 많이 했는데, 사람들은 금방 잊어버리나 봐요. <황진이>, <로열 패밀리>, <해를 품은 달>에서는 줄곧 강한 역할이었어요. 미니시리즈는 유독오랫동안 기억되는 것 같아요. <해를 품은 달>은 끊임없이 나오더라고.

<해를 품은 달> 촬영 때 투병 중이었다는 걸 최근에야 밝혔죠.
역할을 맡았으니 끝까지 해야죠. 딱 쓰러지기 전까지는, 남한테 피해를 주면 안 되잖아요.

그런 근성, 책임감을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예전에는 여건이 많이 안 좋았었잖아요. 그런 여건 아래서 몇십 년 해왔으니 참을성이 많이 길러진 것 같아요. 메이크업도 직접 하고, 옷도 스스로 다 구했으니까. 그래서 난 따라다니는 사람이 많으면 정신이 없어요.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는데, 처음에는 무척 불편했어요.

어릴 때부터 꿈이 배우였어요?
아니에요. 스무 살 때 부산에서 서울 고모집에 잠깐 다니러 왔는데, 그때 MBC 탤런트 모집을 했어요. 친척 언니가 ‘너 배우 한번 해봐라’ 해서 장난 삼아 넣었는데 붙었어요. 뭐, ‘카메라 페이스’가 신선하다나? 그때까지 내가 본 유일한 영화가 <푸른 하늘 은하수>였어요. 부모님은 영화는 볼
필요가 없는 거라고 안 보여줬거든요. 그렇게 엄하고 봉건적인 부모님 밑에서 자랐어도 타고난 끼가 있었나 봐요.

그렇게 시작했는데, 천직이다 싶었어요?
‘배우를 안 했으면 뭘 했을까’ 하고 생각하면 상상이 안 돼. 하늘에서 내게 주신 복 중에서 제일 큰 복이라 생각해요. 정말 생각지도 않게 배우가 됐는데, 하다 보니까 이게 내 적성이더라고요. 어릴 때 ‘장래희망’ 그러면, ‘현모양처’라고 적었어요. 그런데 해보니 전혀 아니었어요. 우리 아들한테 밥 한 끼 제대로 해준 적이 없어요. 그런데 아들은 참 효도를 잘해요. 딸 같은 며느리를 데려온 게 참 큰 효도고요.

실크 소재의 진주 장식 드레스는 샤넬(Chanel). 모직 소재 재킷은 에스카다(Escasa). 크리스털 소재 귀고리는 엠주(Mzuu).

실크 소재의 진주 장식 드레스는 샤넬(Chanel). 모직 소재 재킷은 에스카다(Escasa). 크리스털 소재 귀고리는 엠주(Mzuu).

그 스무 살 때의 연기를 보고 싶네요.
보관한 작품이 아무것도 없어요.

과거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나요?
보는 게 어떤 느낌인지 모르겠는데, 지금은 뭐, 늙어서 봐서 뭐하나 싶어요. 나는 그런 거, 그냥 흘러가버리면 그만이라 생각해요. 지금 현재가 중요하죠. 과거는 그냥 과거이고.

요즘은 배우지망생들이 워낙 성형수술을 많이 해서, 당신 같은 미인이 죄다 사라졌대요.
하하하. 많이 비슷해졌죠. 얼굴이 다 비슷하긴 해요.

어떻게 이런 아름다움을 계속 유지할 수 있죠?
뭐 적당히, 연기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가끔 피부과도 가지만 무엇보다 운동에 무게를 많이 둬요. 먹는 걸 좋아하는데, 운동을 해서 그런지 몸무게 변화가 거의 없어요. 수술하고 나서 하나 딱 좋은 건 과식을 못한다는 거예요.

나쁜 일이 있어도 선물처럼 좋은 게 하나씩은 있더라고요. 지금도 매일매일 운동하나요?
아프고 나서 1년 동안 운동을 못했는데, 이제 근력 운동 시작한 지 한 달 됐어요. 석 달 정도 지나면 예전 근육이 돌아올 거라고 트레이너가 그러더라고요. 운동을 한 사람은 알 거예요. 운동한 후의 그 느낌을. 난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운동이 최고라고 생각해요. 나이 먹는 거 싫고, 주름 생기는 거 속상하죠, 왜 아니겠어요.

하하, 역시 그렇죠?
주름지고 처지는 거, 눈에 보이면 너무 속상해. 속상한데, 그래도 연기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노력만 할 거예요. 아까 사진 찍을 때 음악이 참 마음에 들었어요. 그 음악을 들으니까 표정이 자연스레 만들어졌어요. 여기 이 세포가, 얼굴에 있는 너무 많은 세포가 움직이는데 인공 적으로 시술을 하면 표정이 안 나오잖아요. 어차피 늙는 거 어쩌겠어요. 그러니까 늙는 건 포기하고, 연기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노력만 할 거라고 생각했죠. 그건 내 철칙이에요.

철칙이 철학이 되었네요.
<메디컬 탑텐> 때는 너무 무리해서 얼굴이 안 좋았어요. 내 철학은 첫째 무리하지 않고, 둘째 잘 먹고, 셋째는 운동 열심히 하는 것.

<변호인>이 올해 첫 천만 관객을 넘긴 영화가 되었어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죠. 어떻게 예상했어요?
처음엔 ‘이런 다큐멘터리 영화를 누가 돈 주고 보러 올까?’ 했어요. 아무래도 난 시나리오를 볼 줄 모르나 봐요. 그런데 시사회 때 영화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1만원 주고 그 정도 영화를 보면 괜찮겠더라고요. 촬영장은 좀 심심했어요. 이제는 어디를 가나 내가 최고령이니까 다들 많이 조심스러워해요.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 수다 떨 사람도 없었고….

오간자 소재 블라우스는 퍼블리카 아틀리에(Publicka Atelier). 실크 소재 스커트는 CH 캐롤리나 헤레라(CH Carolina Herrera). 크리스털 소재 반지는 엠주.

오간자 소재 블라우스는 퍼블리카 아틀리에(Publicka Atelier). 실크 소재 스커트는 CH 캐롤리나 헤레라(CH Carolina Herrera). 크리스털 소재 반지는 엠주.

영화에 따라 1만원이 큰돈이기도 하고, 적은 돈이 되기도 하고. 영화의 가격은 늘 상대적이더라고요.
표값도 있지만 영화를 보러 가기 위해서 세수도 하고, 옷도 챙겨 입고 또 버스나 지하철도 타야 하잖아요. 적어도 반나절은 투자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나도 보고 싶은 영화를 놓칠 때가 많아요. 책을 샀는데 그 책이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난 정말 속상해요. 돈이 너무 아깝고 그래요. 그래서 영화도 그렇게 비교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변호인>은 관객 김영애에게 아깝지 않은 영화였던 거네요? 어떤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정치적인 것을 떠나서, 영화를 참 잘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우리에게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거냐고 질문하잖아요? 그렇게 생각해도 얼마 못 가겠지만, 한 번쯤은 ‘나는 어떻게 살아왔나’,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한 번쯤 할 수 있게 한다는 건 참 좋은 거잖아요?

당신은 그 답을 구했어요?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걸까요?
3년 전에 우리 아들하고 여행을 갔는데, 그때 1시간 반 정도 혼자일 때가 있었어요. 그때 천천히 내 인생을 돌아봤어요. 지금까지 뭐하고 살았나. 나를 위해서 산 시간이 없더라고요. 뭐가 급한지, 달음박질을 해가면서 허겁지겁 산을 올라갔던 것 같아요. 나는 정말 일하고 집밖에 몰랐어요. 그러고 예순이더라고요. 열심히 살았지만, 나한테 너무 소홀했던 것 같아. 앞으로 10년을 더 살지, 20년을 더 살지 몰라도, 이제부터는 나에게 충실하면서, 나를 행복하게 해줘야겠다고 생각했죠.

그 후로 정말 달라졌나요?
그런데도 또 허겁지겁하고 있죠. 아홉 시간씩 수술할 일도 생기고. 하하. 인생이 그런 것 같아요. 그래도, 날 위해 살겠다는 생각만으로 인생이 편해지는 게 있어요.

가볍게 말하지만 가벼운 병은 아니었는데요.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을 것 같아요.
수술하면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너무나 마음이 평온했어요. 나는 작은 일에 파닥거리다, 큰일이 닥치면 대범해지는 성격이에요. 내가 현명하고 슬기롭지는 않지만, 참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생겨도 후회는 없다고 생각해요. 아무 후회도 없고 원도 없고, 한도 없을 정도면 괜찮게 산 거라고 생각해요.

가족이나 가까운 분들이 연기를 좀 쉬엄쉬엄 하라고 말리지는 않나요?
촬영장이 제일 편해서 자꾸만 일을 하게 돼요. 연기는, 나한테는 산소예요. 산소나 다름없어요.

당신의 행복에는 연기와 작품이 꼭 필요한 거죠?
좋은 작품, 좋은 사람 만나면 늘 행복해요. 그래서 잘하려고 노력하죠. 그래서 매번 겁이 나고요.

설마요. 이제는 대본 한 번만 봐도 저절로 연기가 되는 경지에 오를법한, 40년 베테랑 연기자잖아요.
할 때마다 처음 연기를 시작하는 기분이에요. 첫 남자를 만나는 것처럼 떨려요. 매번 떨리고 긴장하고 무섭고. 매번 그래요. 사람들이 나를 두고 쟤는 뭐야? 왜 저렇게 됐어?’ 이럴까 봐, 늘 안달복달해요. 그러다가 누가 칭찬하면 되게 좋아하죠.

트위드 소재 재킷, 진주 목걸이는 모두 샤넬.

트위드 소재 재킷, 진주 목걸이는 모두 샤넬.

하하. 주로 누가 칭찬을 많이 해주나요?
촬영할 때에는 현장에서 해주고, 나중에 작품을 본 사람들이 해주죠. 난 연기할 때 모니터를 안 보거든요.

화보 사진을 촬영할 때도 모니터를 전혀 안 보더라고요.
이상해요. 정말 낯설고, 창피하고.

아름답다는 칭찬도, 연기를 잘한다는 칭찬도 이제 지겹지 않나요?
그래서 어떻게 특별하게 칭찬을 해야 할까 고민했어요. 이제는 잘 늙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죠. 추하지 않고 잘 늙어야겠다는 생각, 늘 해요. 그리고 항상 연기를 잘해야겠고, 잘하고 싶고 그래요. 그러다보면 칭찬받고 싶고요. 새 작품을 대할 때마다 매번 시집가는 것처럼 난 그래요. 늘 연애하고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살다 보면 갈라지고 막 그러잖아요? 그거랑 마찬가지죠. 어떤 작품은 자랑스럽고, 어떤 작품은 실망하고 그래요.

어떤 작품이 자랑스러워요?
43년을 연기 하면서 내가 정말 기억하고 싶고, ‘의미가 있다’는 작품이 한 열 개는 되려나? 다른 건 잊어요. 우리 집에는 배우처럼 찍은 사진도 없고, 트로피도 없어요. 이사 갈 때마다 버려요. 사무실에나 좀 있죠.

음, 아주 심플한 인생. 닮고 싶은데요?
지금까지 살아온 게 너무 복잡해서 그런 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정말로 필요한 건 마음속에 다 있으니까요?
늘 최선을 다하니까 별로 미련이 없나 봐요. 그런데도 여전히 많이 엎어지고 깨져요. 난 정말 시트콤을 하고 싶은데, 안 들어와요.

하하 시트콤이요? 지금 모습은 시트콤에 정말 잘 어울리는데요!
요즘 센 역할을 많이 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실제로 내 모습을 보고 많이 당황해요. 심지어 영화 <카트> 부지영 감독은 내가 ‘소녀’처럼 연기할까 봐 걱정했대. 내가 생각한 것과 너무 다르니까 당황하더라고요. 하하.

이제야 말이지만, 대배우와의 촬영이라 많이 설렜어요.
고마워요. 나는 이런 얘기 들으면, 비로소 ‘내가 배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난 평소에는 전혀 배우처럼 안 하고 다녀요. 공식석상에만 초라하지 않게 꾸미고 가면 된다는 주의죠. 운전도 못해서 버스 타고 다니거든요.

사람들이 많이 알아보나요?
휴대폰 보느라 아무도 안 쳐다봐요. 그게 참 편해요. 예전에는 눈을 두기가 불편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 좋아. 그러면서 걱정도 가끔 되죠. 이게 세상이 정말 괜찮은 건가?

    에디터
    피처 에디터 / 허윤선, 스타일 에디터 / 김미주
    포토그래퍼
    박지혁
    스탭
    헤어/황지희, 메이크업 /이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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