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은 서점 여행을 꿈꿔본 적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서점 때문에 어떤 도시를 찾기도 한다. 마음의 양식을 채우기 위해 먼 길을 떠난 서점 여행가들의 이야기.

 

NETHERL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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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카넌 서점 2층에서 내려다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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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카넌 서점 정면의 성당문.

시간을 파는 네덜란드의 서점

인생의 중요한 일들은 때때로 우연히 사소한 것들에서 엮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목적이 분명한 움직임보다 자연스러운 발걸음 속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을 발견하려 애쓴다. 서점 여행은 그래서 내 취향을 만족시키는 여행이다. 어떤 나라인지, 어느 도시인지를 미리 선택해야 하는 고민을 덜 하게 만든다.

나는 네덜란드에서 약 7년간 거주했다. 하루하루 매 순간이 삶의 변곡점이자 임계점이었다. 때로는 변화가 필요하기도 했고 안정이 절실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가까이에 있는 서점은 내 언덕이 되어주었다. ‘마음이 갑갑할 땐 언덕에 올라 푸른 하늘 바라보자, 구름을 보자’라는 어릴 적 부르던 동요처럼 말이다. 무작정 서점에 들어가 표지나 목차를 보며 섣부른 상상을 했다. 서점은 잠시 일상을 잊게 만드는 마법의 공간이다.

네덜란드 남단의 마스트리히트는 유럽연합(EU)이 탄생한 역사적인 도시다. 벨기에와 독일의 접경 지대에 있어 세 나라의 분위기가 묘하게 섞여 있다. 이곳에는 이미 여행자들에게 잘 알려진 ‘도미니카넌 서점’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라는 별칭을 가진 만큼 황홀한 건물 속에 자리한다. 세워진 지 무려 700년이 넘는 역사적 문화재이면서 과거 성당이었던 건물을 개조해 만들었다. 웅장한 유럽 성당의 이미지와 세련된 검은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이 조화를 이룬다. 이곳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생애가 그려진 천장화를 바라보는 것을 잊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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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퀴나스의 생애가 그려진 천장화가 아름다운 도미니카넌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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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프리스 서점의 어린이책 공간.

한편, ‘드 프리스 서점’은 뉴욕 할렘의 원조인 네덜란드의 하를렘이라는 도시에 있는 100년 넘은 오래된 독립 서점이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네덜란드의 베스트 10 서점’에 들 정도로 명성이 높다. 5개의 매장을 하나로 만들어서 서점 안에 들어가면 미로 찾기 놀이를 하는 기분이 든다. 벽난로와 오래된 벽돌로 가득 찬 공간에서 소설책을 읽어봐도 좋겠다. 그러다 어린이책 코너에 가면 판타지랜드에 온 듯하다. 몸이 지칠 때쯤엔 실내 정원에서 잠시 차를 마시며 쉬어갈 수도 있다.

이 서점을 둘러보다 한 가지 놀랍고 반가운 사실을 발견했다. 구글보다 더 빠르고 정확한 빅데이터 베이스를 갖춘 이 서점이, 수개월 동안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네덜란드어 번역본)을 선정한 것. 이 결과를 보며 뿌듯함도 느꼈지만, 어쩐지 동질감도 느껴졌다.

네덜란드를 여행하다 서점이 눈에 띄면 혜민 스님의 책 제목처럼 잠시 멈춰 그동안 보고 듣지 못한 것들을 비로소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게 아주 작고 소소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 신경미(<시간을 파는 서점>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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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이 이어진 흔적이 남아 있는 드 프리스 서점의 아치형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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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프리스 서점의 벽난로 공간.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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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한 회색 외관을 가진 페르세포네 서점.

런던에서 찾은 자기만의 방

여행을 떠나고 싶은 순간을 생각해보자. 새로운 문화, 신선한 풍경, 즐거운 이야기를 찾기 위해서다. 서점에는 이 모든 것이 있다. 게다가 공연과 전시, 디저트 파티, 현지인과 어울리는 모임까지, 단언컨대, 서점은 여행자를 환영하는, 여행을 위한 완벽한 장소다.

셰익스피어, 제인 오스틴, 조앤 K. 롤링까지. 세계적인 작가는 물론 전 세계에서 책을 가장 사랑해마지 않는 도시 런던. 영국박물관, 영국도서관, 런던대학교가 있는 우아한 거리에는 회색 집의 ‘페르세포네 서점’이 있다. 외관 모습처럼 서점의 책은 모두 회색의 부드러운 벨벳 종이를 입고 있다. 자칫 똑같은 책처럼 보이지만, 펼치면 전부 다른 책임을 알 수 있다. 책 옆에 나란히 놓여 있는 책갈피 디자인은, 책이 가진 주제와 분위기를 나타내며 이는 면지로까지 이어진다. 때문에 서점에서는 꼭 책을 펼쳐보아야 한다. 이 책이 가진 은밀한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서점은 20세기 여성들의 잊혀진 작품을 발굴하는 곳으로, 우리가 소실했던 역사를 채워가고 있다. 오후 4시가 되면 하던 일을 멈추고 티타임을 갖는 서점은, 여성의 삶을 사랑하고 격려하는 모든 여성을 위한 ‘자기만의 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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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가장 힙한 동네, 쇼디치를 걸으면 볼 수 있는 그래피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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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가장 힙한 동네, 쇼디치를 걸으면 볼 수 있는 그래피티.

런던의 가장 힙한 동네, 쇼디치의 서점도 빼놓을 수 없다. No Wifi, No Phone, Yes You! 카메라의 빨간색 렌즈 불빛을 덮고, 핸드폰의 파란색 블루투스 버튼을 끈다. 모든 불빛이 꺼진 곳에서 단 하나의 빛만 공간을 가득 채운다. 오직 당신만이 입장할 수 있는 ‘리브레리아 서점’이다.

“나가주시겠습니까?”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면 이런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이 서점에서는 모든 디지털 기기의 사용을 제한하고 인터넷 접속조차 할 수 없다. 오직, 나의 감각을 깨우도록 허락되는 공간이다. 오롯이 책에 집중하고 펼쳐보게 만드는 서점의 책장 안에는 사람이 들어가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책, 서가, 사람이 하나로 연결되는 서점은 세렌디피티, 즉 우연한 발견을 만들어낸다. 책을 분류하는 방법 또한 독특한데, 시간과 공간, 첫 번째 사람, 뇌와 존재, 유토피아 등의 주제 아래 책을 진열하고 있다. 그래서 찾고자 하는 책의 위치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덕분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기도 한다. 제인 오스틴의 고전을 찾다가 에밀리 베리의 시집 <If I’m Scared We Can’t Win>을 구입했듯이. 리브레리아가 권하는 아날로그는 단순히 느린 속도를 지향하거나 과거로 돌아가자는 뜻이 아니다. 지적 탐험이라는 기회를 누리고, 독서를 즐길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곳에는 책과 소파 그리고 적당한 조명이 있다. 게다가 시원한 맥주까지. 지적 탐방을 떠나기에 이보다 완벽한 서점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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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디자인이 각 책의 발행연도와 주제를 나타내는 페르세포네 서점.

서점 여행 이후, 내 삶을 재미있게 써보고 싶은 작가가 되었다. 낯선 문화에 들어가 발을 딛고 머물고 여행을 하며 나의 감각을 채워갔다. 이후 리스본에서는 수예를, 파리 센 강변에서는 춤을, 포르토에서는 아줄레주를 함께 구워가며 더 깊숙하게 탐험하고 여행을 풍요롭게 채웠다. 어쩌면 나와 상관없는 분야라고 여긴 것이, 내가 가장 채워야 할 모습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 김윤아(기업 홍보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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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 분류법이 독특한 리브레리아 서점. 자칫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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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레리아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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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들어가 책을 읽을 수 있는 리브레리아의 따뜻한 공간.

 

SEAT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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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네모 안에 적힌 피터밀러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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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밀러가 유럽에서 엄선해 가져온 문구와 소품.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서점

1980년대 미국 여행을 한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아메리칸 버티고>에서 미국에서 자신이 살고 싶은 도시 한 곳을 꼽으라면 ‘시애틀’이라고 주저 없이 답했다. 그 말에 동경 따위는 없었지만(그러기엔 난 그에 대해 잘 모른다) 이런저런 사정과 우연과 인연이 겹쳐 한국을 떠나 정착한 곳이 하필 시애틀이었다.

운명을 좋아하는 나는 그가 시애틀의 분홍색 하늘과 알래스카, 파나마로 떠나는 배, 시(詩)와 현대성, 기술적 도전과 불안한 그늘, 도시의 불빛과 어둠, 키 큰 가로수들, 무엇보다 마천루를 이야기했을 때, 이미 내 마음에 자리 잡았던 거라고 믿고 있다. 모국어로 먹고살았던 내게 모국어 없는 삶은 울타리 밖으로 내쫓긴 듯한 불안의 시간이었다.

시애틀의 서점들은 그런 내게 뜻밖에 위안의 공간이 되었다. 도처에 있는 냉담함 같은 무관심, 쫓기는 일상, 고질적인 외로움 속에 드문드문 놓인 쉼터이자 소도 같은 곳이었다. 시애틀은 세상에서 가장 큰 서점인 아마존 본사가 있는 곳이지만 역설적이게도 크고 작은 독립서점들 역시 번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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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밀러 서점의 내부.

지역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다정한 서점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시애틀 다운타운에서 자기 취향의 아름다움을 고집하는 피터 밀러 서점, 레닌 동상과 트롤 동상이 공존하는 히피의 도시 프레몬트의 요리책 전문서점 북 라더, 성소수자 공동체의 근거지인 캐피톨힐의 과학기술 전문서점 에이다 테크니컬 북스는 관광객에게나 거주민에게나 언제나 새롭다.

그래픽과 건축, 예술 전문서점을 표방한 ‘피터 밀러 서점’은 주인장이 사랑하는 무인양품 디자이너 하라 켄야의 책과 북유럽 문구와 소품들이 가득해 눈 호강을 할 수 있다. 이 서점에서 명심할 것은 손님에게 한없이 다정하지만 서점과 책에 대한 존중을 잃는 순간 까다로워지는 주인장에게 예의를 갖춰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피터 밀러는 이 서점의 주인이자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시애틀 다운타운의 명물 시장인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늘 패스트푸드로 점심을 먹는 것이 안타까워 서점에서 불을 쓰지 않고 하는 요리를 직접 해 나눠 먹기 시작했다. 이를 기록한 책 <Lunch at the Shop>과 <Five Ways to Cook Asparagus>에는 각각 샌드위치와 샐러드의 레시피, 저녁 식사용 레시피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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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킹 클래스 테이블이 놓인 북 라더의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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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라더 서점 전면에 놓인 앤티크 오븐.

‘북 라더’는 북미에 딱 세 군데뿐인 요리 전문서점이다. 지역 특산 요리부터 전 세계 요리책이 재료별, 조리법별로 모여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인력개발팀에서 경력을 쌓은 서점 주인은 앤티크 요리책에도 관심이 많다. 서점 전면에 놓인 앤티크 오븐은 그 상징과도 같다. 게다가 조리를 할 수 있는 부엌 공간이 서점 한가운데 있어 사시사철 요리 이벤트도 열린다. 활발한 이벤트와 행사 덕에 보통 책을 펼쳐두는 평대 아래에 책 대신 접이식 의자들이 빼곡히 쌓여 있다. 작지만 시애틀 요리 커뮤니티를 적극적으로 연결하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 참석하고 싶은 요리 이벤트가 있다면 웹사이트에서 미리 확인하고 예약할 수도 있다. 늘 열리는 요리 시연 덕에 서점 전체에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배어 있어서 잠시 머물면 배가 고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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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다 테크니컬 북스의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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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다 테크니컬 북스의 카페 전경.

여성 최초의 프로그래머인 에이다 러브레이스의 이름을 딴 ‘에이다 테크니컬 북스’는 과학책은 물론이고 과학이라는 분위기, 과학 그 자체를 판다. 책보다 더 넓은 자리를 차지한 과학 키트들은 호기심 많은 아이들의 눈길을 끌고, 공간을 쪼개 마련된 한쪽 카페의 탁자는 오래된 특수한 자나 나침반 같은 옛날 과학도구들을 담아놓은 작은 전시장 역할을 하고 있다. 서점 한쪽은 사람들이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숙제나 프로젝트도 함께 할 수 있는 카페 공간이다.

낯선 도시를 헤매다 맥도날드 간판을 만나면 괜히 반가운 것처럼 전 세계가 같은 모양과 형태를 공유한 책들은 푸근함을 선사한다. 모국어 환경을 떠나 쓸쓸하고 정처 없었던 내게 그 서점들이 해주었듯이, 당신에게도 외국 도시의 서점은 안심과 잠깐의 평안을 건네줄 것이다. 혹시 불 켜진 서점이 있거든 지나치지 마시길, 그들은 언제까지고 당신을 기다릴 테니.

– 이현주(<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서점>의 저자)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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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에 미러볼이 달린 파워하우스 아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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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하우스 아레나의 종이로 만든 뉴욕 기념품.

뉴욕 독립서점의 고집

지난해 여름, 뉴욕에서 한 달 동안 독립서점을 둘러보았다. 뉴요커들은 여전히 독립서점을 끊임없이 찾기에, 가는 곳마다 활기가 넘쳤다.

뉴욕의 독립서점은 그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콘셉트와 북 큐레이션을 자랑한다. 어떤 곳은 고서적과 독립출판물이 공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어떤 곳은 여행 서적만 있거나 어린이 서적만 들여놓기도 한다. 서점 주인의 취향에 따라 열리는 이벤트도 다양하다. 장르별 북클럽은 물론, 인디 밴드의 라이브 공연이나 전시회가 열린다. 괴짜 주인이 운영하는 어떤 서점은 공짜로 머리를 손질해주는 이벤트를 열고, 술을 곁들인 ‘보드게임의 밤’을 개최한다.

이렇듯 뉴욕의 독립서점들은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당당히 내세우며, 잘하지 못하는 것은 과감히 하지 않는다. 뉴욕 독립서점들의 가장 멋진 점은 누군가의 마음에 들려고 애를 쓰기보다 그저 묵묵히 ‘자신’답게 해나가는 모습이었다. 이들이 뉴욕의 치열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것 또한 역설적으로 이런 고집스러운 태도 덕분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뉴욕 여행을 떠난다면 강렬한 매력을 발산하는 다음의 독립서점들을 꼭 둘러보길 바란다.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모여 살았던 로어 이스트에 위치한 ‘블루스타킹스’는 진보적인 성향의 책을 주로 들여놓는다. 다양한 북 클럽 모임과 우쿨렐레 클래스, 호신술 워크숍 등도 운영한다. 내부 카페의 음료는 1~3달러 사이로 저렴하다. 이곳에서 추천하고 싶은 책은 벨 훅스 <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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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티지한 부엌용품을 진열해놓은 보니 슬롯닉 쿡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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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인 책 큐레이션으로 유명한 블루스타킹스.

이스트 빌리지의 ‘보니 슬롯닉 쿡북스’는 1960년대의 빈티지한 부엌 스타일로 꾸민 요리책 전문서점이다. 희귀본과 절판본도 찾아볼 수 있다. 책과 함께 여기저기 진열된 부엌 용품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각종 그릇, 식탁보, 양념통 등이 구매욕을 자극한다. 마지막으로 ‘파워하우스 아레나’는 파워하우스 북스 출판사에서 만든 서점이다. 브루클린 덤보에 있다. 높은 천장에 미러볼이 달려 있는 트렌디한 공간으로, 출판, 전시, 강연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린다. 다른 서점과 달리 서가가 조밀하게 붙어 있지 않아 넉넉한 공간감이 느껴진다. 에코백, 엽서, 포스터, 종이로 만든 문구류 등의 독특한 물건도 판다.

뉴욕 서점을 여행한 후, 한국에 돌아와 무엇보다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본받으려 노력하고 있다. 타인의 눈치를 보며 이것저것 애매하게 맞추기보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고수하는 태도 말이다. 비록 그게 사소한 단 한 가지일지라도 .

– 안유정(왓어북 출판사 대표) 

 

DUSSELDO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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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커 거리 위, 하이네 생가. 1층의 서점과 북카페.

독일 예술가의 서재

하인리히 하이네. 낭만파 시인, 로렐라이, 살아 있을 땐 독일의 우파에게 미움만 산 좌파 운동가였지만 지금은 ‘괴테’와 함께 독일 문학을 대변하는 이름이 된 예술가. 사는 동안 인생도, 사랑도 잘 안 풀린 남자. 그에 대해 아는 건 이 정도뿐이다. 사랑을 노래했지만 단어들이 우울해서 실은 그다지 좋아한 적도 없다.

좋아한 적도 없는데 아주 우연히 그의 끝과 처음을 만났다. 수년 전, 그저 개똥과 지린내, 관광하는 인파를 피해 산책하려고 찾은 몽마르트르 묘지에서 하이네의 흉상과 묘비를 봤다. 그땐 그저 아는 이름이 나와서, ‘와, 하이네네’ 하고 말았을 뿐이다.

몇 년 후 베를린도, 함부르크도, 뮌헨도 아닌 뒤셀도르프의 볼커 거리 위에서 그 이름을 또 봤다. 이 도시를 찾은 건 순전히 출장 때문이었고, 자유 시간에 굳이 거리로 나선 건 순전히 알트 비어, 묵직하고 쌉쌀한 그 검붉은 맥주로 벌건 대낮부터 목을 축이기 위해서였다. 난데없이 또 등장한 하이네의 얼굴, 그 옆 ‘하인리히 하이네의 탄생지’라는 문구, 뒤에 따라붙는 안내 글. ‘해리 하이네(그의 본명이다)는 볼커 거리 53번지의 이 건물에서 태어났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니 곧장 ‘하이네 하우스’ 간판이 눈에 띈다. 읽을 수 없는 독일어 사이로 익숙한 단어 ‘문학’과 ‘카페’가 보였다. 볼커 거리 53번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하얀 집, 하이네 생가 1층엔 ‘하이네 서점’이 있다. 안으로 들어서니 유명인의 생가답지 않게 관광객 하나 없이 쓸쓸하다. 서가 한쪽엔 하인리히 하이네의 책을 모아뒀고, 나머지 책장엔 독립서점이 으레 갖춘 책들이 있다. 유리장 안에는 간혹 그의 얼굴이 그려진 기념 엽서, 컵, 펜 따위의 기념품들이 소복눈 같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덩그러니 놓여 있다. 모르고 들어왔다면 ‘그냥 독일 소도시의 작은 동네 서점’으로 지나칠 만한 분위기다. 거기 있을 땐 몰랐는데 기념 사진 찍는 사람 한 명 없는 이 멋없는 공간이 두고 두고 생각난다. 서울의 팬시한 독립서점들, 그 안에서 책을 읽는 대신 ‘사는’ 사람들, 사탕 껍질처럼 예쁜 커버를 두른 요즘 책과 서양제 디자인 문구에 자리를 내준 초라한 옛날 시집과 소설책을 볼 때마다 그렇다. 이렇게 멋없고 우직한 서점이 내가 사는 도시에도 남아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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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하게 마른 꽃. 책을 고르다 잠시 앉을 수 있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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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네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인을 주제로 한 낭독회, 북클럽 등을 안내한 엽서와 브로슈어.

실은 서점을 아주 좋아해서 서점 때문에 어떤 도시를 찾기도 하지만, 하이네 서점은 솔직히 뒤셀도르프를 찾아야 할 목적이 될 만한 장소는 아니다. 대신 볼커 거리엔 ‘세상에서 가장 긴 술집’이라는 별명답게 펍들이 진진하다. 두툼한 독일 소시지, 쌉쌀한 알트 비어로 배를 채우고 반쯤 취한 정신으로 서점을 찾아보자. (독어를 모르므로) 읽을 수 없는 책들 사이에서 오래된 종이 냄새, 사촌 동생을 너무너무 사랑해서 ‘로렐라이’라는 당대의 명시를 남긴 괴짜 같은 남자의 기운을 느껴보는 것도 이곳을 즐기는 방법이다.

– 류진(프리랜스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