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이 시작된 후 1년. 세상은 여전히 같아 보이지만 모든 것은 달라졌다. 그럼에도 모두는 자신의 시간을 살아간다. 그 1년의 기록.

 

코로나 시대에 결혼했다

지난해 12월 13일 아침의 확진자는 1030명이었다. 최초로 1000명을 넘긴 날, 우리는 새벽부터 메이크업 숍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는 눈이 오기 시작했다. 눈발이 점점 굵어지더니 도톰하게 쌓이기 시작했다. 도로 상황이 점점 나빠지는 게 눈에 보였다. 설상가상. 문자 그대로였다. 그 시점의 우리는 점점 초연해지고 있었다. 결혼식은 형식이니까. 결혼은 둘이 하는 거니까. 식보다 중요한 건 결국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조짐은 월초부터 있었다. 12월 1일. 수도권의 사회적 거리 두기가 2단계로 격상됐다. 12월 8일 월요일부터는 2.5단계로 상향 조정됐다. 확진자는 566명이었다. 한 공간에 50명 이상이 모일 수 없게 됐다. 성대한 결혼식을 원한 적은 없었지만 50명은 좀 가혹한 숫자였다. 식장에서 말했다. “저희가 독립된 연회장이 있고, 거기서도 결혼식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3일 전, 초대한 모든 손님에게 전화를 했다. 시국이 삼엄하니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아주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최대한 전하고 싶었다. 청첩장을 보내도 민폐, 보내지 않으면 결례인 경우가 너무 많았다. 다양한 층위의 관계와 각자의 사정, 바이러스와 시국이 한데 얽혀서 예측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전화를 마칠 즈음의 우리는 마음을 완전히 비우기 시작했다.

오후 1시에 시작하는 결혼식을 위해 식장에서 준비를 마친 건 오전 10시 반쯤이었다. 그때부터 손님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빨갛게 얼어 있는 볼, 축하와 위로가 섞여 있는 표정, 반가움과 응원과 축하가 복합적으로 섞여 있던 그 좋은 얼굴들을 한 명 한 명 마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삼엄한 상황인데도 식장 안팎에서 곁을 지켜준 사람들이 있었다. 식을 마치고 한 달 반이 지난 지금도 고마운 마음들을 받는다. 그땐 못 갔지만 꼭 축하해주고 싶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어떤 어른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참 묘한 날이야. 고맙게 받으면 되는 마음이고, 너희가 잘 살면 그걸로 다 갚는 거야.”

결혼은 둘이 하는 건데 결혼식은 뭘까? 가족과 가족이 만나는 것도 알겠는데, 이렇게까지 넘실거리는 마음들은 또 뭘까? 멀리 있지만 살가운 마음, 늘 가까이 있었지만 못내 따뜻했던 마음이 우리가 주고받은 모든 형식 속에 섞여 있었다. 우리는 결혼식을 마치고 2주 후, 우리를 축하해준 모두의 안전을 확인한 후에야 마음을 놓았다. 신혼여행도 그때 떠났다. 부산과 제주에서 쉬었다. 원래는 아프리카에 가고 싶었지만….

코로나19는 참 많은 것을 제한했다. 마음껏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불편했다. 무섭고 위험했다. 하지만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달랐을까? 더 많은 사람과 함께였다면 그 숫자만큼 더 행복했을까? 불편하다고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고, 삼엄한 형편의 마음에도 여지없는 진심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의 마음 덕에 그날 하루, 참 특별하고 행복한 두 사람이 되었다. 식이 끝난 자리에는 삶이 남았고,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세는 새해에도 꺾이지 않았다.

– 정우성(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더파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