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를 만큼 말랐음에도 더 마르고 싶은 마음. 마른 몸은 과연 나를 행복의 나라로 인도할까?

 

다이어터의 삶

나는 쉬지 않고 다이어트를 한다. 평생을 장거리 수영선수 같은 몸을 가지고 싶었으나, 시시때때로 불어나는 몸은 오래전부터 이미 예약된 신의 계획 같기만 하다. 인생은 불공평하다. 신진대사율도 운명처럼 불공평하다. 성별, 유전자, 호르몬, 염색체, 인종, 나이에 따라 칼로리 소비량은 어김없이 다른데, 나는 근육을 최고의 컨디션에 맞춰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법을 교육받은 국가대표 운동선수도 아닌데. 미남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겪은 패션계는 마른 사람을 미남미녀로 치는 그런 곳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 힘을 싣기는 한다. 나 역시 그 가치를 동의하고 지지한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저건 저거다. 에디 슬리먼이 셀린느에 안착하자마자 착수한 건 로고를 날렵하게 바꾸는 일과 입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숨통 트이게 해주던 풍요롭고 세련된 셀린느 스타일을 버리고, 그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몸에 꽉 맞는 데님을 내놓은 일이다. 안토니 바카렐로가 이끄는 생 로랑은 여전히 쫄쫄이 룩의 최전선에 있으며, 스트리트 무드의 열풍으로 각종 난감한 오버 사이즈를 양산하던 발렌시아가조차 스멀스멀, 감자 껍질이라도 벗겨내는 것처럼 몸의 라인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여전히 키 크고, 엉덩이 작고, 날카롭게 크롭트된 생 로랑과 셀린느를 입고 싶다. 김밥 한 줄 다 먹어치우는 일에도 행여나 군살이 쌓이지 않을지 노심초사하며 다이어트에 매진하는 이유다. 거울 앞에 섰을 때의 자기만족을 목표로 한 꽤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다이어트라 할 수 있다.

남들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지만 오직 나만이 내 신진대사율을 안다. 5월의 황금연휴 기간 얼마나 많이 먹고 넷플릭스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죽도록 안 움직였는지는 오로지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이다. 덕분에 불과 보름 전에 입(을 수 있)었던 신축성이라고는 전무후무한 생 로랑의 가죽 스키니 진을 꺼내 들고 망설인다. 나름대로 잘 조절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요 며칠 방심한 새 다시 배가 나왔으니 입어봤자 또 울룩불룩 줄줄이 소시지 모양의 단추가 될 테지. 이럴 때마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찐다고 푸념하듯 이죽거리는 자들, 순전히 자기 의지로 지방을 저장하거나 배출할 수 있다고 까부는 이들을 발본색원해 최소 10년 동안 매일 새벽 3시에 군만두 한 판을 다 먹고 잠자게 하는 잔혹한 형벌을 내리고 싶다.

음식은 확실히 큰 위안이다. 월간지 마감 스트레스가 폭발하기 직전, 설탕을 한가득 섭취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주장처럼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이유가 아니라, 숙취 끝의 짬뽕 한 그릇, 잠자리에 들기 전에 벌컥벌컥 털어 마시는 치맥이 주는 단순한 위로. 그러나 음식이 나고, 내가 바로 음식이라면 벗어날 길이 없다. 부르주아 돼지가 되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어차피 인간은 많이 먹도록 만들어진 피조물이 아닐까. 적당한 과식이란 없다. 하지만 아무 때나 원하는 걸 다 먹고 사는데도 체중이 그대로라는 인간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기필코 살을 빼고 싶다. 배가 고플 땐 하마처럼 물을 마셔 물배를 채우고 식욕을 억제한다는 커피도 한 10잔쯤 마시면 되겠다. 열흘간 잠도 자지 말아야지. 저녁 6시 이후 입에 닿기라도 하는 건 전부 다 살로 가. 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는 건 괜한 엄살이 아니다.

빼느냐 두느냐

한 번이라도 다이어트를 해본 사람이라면 늘어난 몸무게를 덜어내는 게 인생 최악의 연인과 재결합하기보다 힘들단 걸 안다. 체중은 뼈의 굵기나 섹스의 유전자처럼 개인이 통제하지 못하는 생물학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디어를 필두로 한 우리 사회는 생물학적 특성은 자기들 알 바 아니라는 듯 더 작고 얇고 길어 보이는 법을 악착같이 가르친다. 아예 대놓고 요구한다. 마른 몸을 추앙하고, 말라도 더 마르기를 갈망한다. 젊음이라는 특권이 그렇듯 마른 몸도 일종의 권력이 된 건 어떤 명분으로도 가릴 수 없는 선명한 사실이다. 건강과 마름(다이어트)을 서로 맞바꾼다. 저녁을 건너뛰고, 대신 곧장 회사 지하 헬스장으로 뛰어내려가 무념무상으로 러닝 머신 위를 걷는다. 지구 한 바퀴를 다 돌 것 같은 기세로 하염없이 걷고 또 걷는다. 원 푸드 다이어트에 매진하고, 그래도 잘 빠지지 않는 군살은 지방 분해 혹은 지방 흡입 주사도 마다하지 않는다. 삭센다를 신처럼 모시는 이들도 여럿 봤다. 다이어트 약의 부작용으로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고 위협하는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리기도 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몸, 정확히 말해 ‘몸매’를 가꿔야 한다는 강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야비하게도 지방을 수치스러워하는 문화는 남성보다는 여성을 직접 겨눈다. 원래 못난 것들이 자기 분수도 모르는 법이지. 우리 사회는 왜 여성의 몸을 평가하고 혐오하는 일에 익숙할까. 홍영기 제일 가정의학과 의원 원장은 “우리는 외모 평가를 친밀함의 척도로 여겨 외모를 주제로 말을 걸며 관계를 맺는 특징이 있습니다. 실제로 지방 분해 주사나 식욕 억제 약을 처방받으러 오는 다수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생각 없이 던지는 살이 쪘다느니, 얼굴이 좋아졌다느니 하는 말을 듣고 찾아옵니다. 물론 대부분 정상 체형인 경우가 많죠”라고 설명했다. 즉, 타인의 몸매나 외모에 대한 칭찬과 비난 모두를 일상적인 안부 인사처럼 쓴다는 뜻이다. 칭찬이든 비난이든 외모에 대한 ‘지적질’은 모두 독이 될 수 있다. 특히 몸매에 대한 엄격한 잣대는 정상 체중의 여성들까지 다이어트 강박에 시달리게 한다. 홍영기 원장은 “마른 몸매 강박에 시달리는 여성들은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스스로가 아닌, 타인의 평가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울감이 높고 자존감이 떨어져 심한 경우 우울증이나 섭식장애, 다이어트 중독을 앓기도 합니다”라고 설명했다.

고(故) 다이애너 왕세자비의 폭식증을 치료한 것으로 알려진 영국의 정신분석 심리치료사 수지 오바크는 자신의 책 <몸에 갇힌 사람들>에서 완벽한 몸은 없다고 단언했다. 현대에는 패션, 미용, 영화, 성형수술, 다이어트 산업이 만든 이미지들로 자신을 평가하고 좌절하고 만다. 하지만 TV 속 모델조차, 아니 인스타그램을 수놓는 저 수많은 인플루언서조차 조명, 카메라, 필터, 포토샵 등 기술에 힘입은 왜곡된 이미지로 재현한다. 우리가 상상하는 ‘완벽한 몸의 이미지’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과도한 다이어트 때문에 인간이 겪는 심리적 고통은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 수지 오바크는 “여성 스스로 완벽한 몸을 좇는 불안에서 벗어나라”고 조언한다. 그는 “몸을 개인이 창조할 수 있고, 창조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강박이 괴로움을 불러일으킨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재미를 느끼는 것은 즐거운 일인 만큼 치명적인 일로 만들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의 아름다움은 각자의 독특한 개성과 다양성으로 빛날 수 있다는 얘기다. 오바크의 주장은 정확하다. “각자의 몸을 강요된 열망을 투영하는 곳이 아니라 각자가 깃들어 사는 소중한 집으로 생각하자.”

맨 처음의 기독교인들은 굶는 일을 참회와 정화라고 믿었다. 음식을 거부하는 영광의 순간, 홀쭉한 뱃가죽 위로 갈비뼈가 만져질 때의 승리감. 다이어트 중독인 나는 그 승리와 희열을 잘 알고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내가 살을 빼고 싶은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다. 딱 맞는 스키니 진에 날렵한 부츠를 평생 유니폼처럼 입고 싶다. 그러려면 말라야 한다. 그럼 오늘 밤 대왕 연어 초밥을 먹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살이 좀 빠진다고 내가 진짜 행복해질 수 있을까? 꽉 끼던 스키니 진에 몸이 쑥 들어간다고?